[그리스 일상] 나의 그리스식 시골 밥상 3
얼마 전 짝꿍과 함께 옆 마을로 장을 보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스쿠터를 도로변에 세워두고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하며 슬로 모션으로 움직이고 있는 두 명의 여행객을 보았다. 도로변에 무성하게 자란 선인장에 뽕뽕 솟아있는 선인장 과일을 따려고 하는 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선인장에 살벌하게 박힌 크고 뾰족한 가시들을 피해서 과일을 따내려고 아주 조심스럽게 움직였고, 가시를 피해 과일이 손아귀에 들어오자 신난다는 듯 손바닥으로 과일을 움켜 잡으려는 찰나였다. 나는 순간 'STOP!!!'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으나 달리는 도로에서 우리는 그 장면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에서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이오니아 해 및 에게해 섬을 중심으로 이러한 선인장들이 사방에 번식하고 있다. 이곳, 코르푸에서는 언덕에도, 집 앞마당에도, 길가에도, 도로변에도 사방에서 커다란 미키 마우스 귀처럼 생긴 선인장 무더기에 빨간 혹처럼 생긴 과일이 주렁주렁 달린 우스꽝스러운 모습의 이 생명체를 마주하기 쉽다. 선인장에는 무시무시한 가시들이 다가만 가도 찔러버릴 것 같은 위협감을 조성하고 있다. 거기서 자라는 과일 봉우리들은 얼핏 보면 빨갛고 탐스러워 보이지만, 사실은 미세한 가시들이 눈에 잘 안 보이도록 아주 사악하게 박혀있다. 선인장 가시를 피했다고 그 사이에서 유혹하는 과일을 손으로 움켜쥐었다가는 수많은 미세 가시들이 손바닥을 무참히 공격할 것이었다.
이 사악한 빨간 과일은 Cactus Pear (Opuntia Ficus Indica)라고 하며, 그리스에서는 Φραγκόσυκο (Fragosiko; 프라고시코)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아는 동남아의 용과(Dragon fruit)하고는 다르다. '프라고시코'는 직접 따먹어도 되고 마트나 과일 가게에서도 사 먹을 수도 있다. 짝꿍 집 마당 한 곳에도 거대한 선인장이 웅장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 모습이 마치 진격의 거인 같아서 가끔 그 옆을 걸어가다 쳐다보면 움찔 놀라기도 한다. 하지만 '프라고시코'는 먹는 방법만 알고 먹으면 일상의 신선하고 맛난 먹거리가 되어준다. 가시 투성이 껍질만 조심하여 벗겨 내면, 그 안에는 뭉근하게 달콤한 맛의 부드러운 속살을 즐길 수 있다. 껍질을 무사히 열어 속살이 드러나는 순간, 고진감래의 희열이 느껴진다. 한 점 찍어 입에서 서서히 녹여본다. 입안에 달근함이 퍼진다.
그날 불운했을 두 여행객을 목격한 후, 그들의 처참해진 손바닥이 떠올라 몸서리를 치며 가는 중 맞은편에서 구급차가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들, 괜찮은 거겠지?' 하며 낯선 이들을 걱정한다. 알고 보니 외지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나는 이 코르푸 섬에서 이런 사고는 생각보다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무지한 여행객이나 관광객들이 지천에 널린 빨갛게 잘 익은 '공짜' 과일을 따려다 봉변을 당한다. 하지만 아무도 이에 대해 경고를 주지 않는다.
사실, 나도 당했었다. 시부모 댁에서 과일 상자 안에 담긴 이 과일을 마주하던 날. 농산물은 깨끗하게 세척부터 시작하는 한국인의 습성이 그대로 몸에 베인 난 주방 개수대에 이 빨간 열매를 넣고 흐르는 물에 넣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손가락과 손바닥이 기분 나쁘게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순간 놀라서 난 과일을 팽개치고 두 손을 쳐다보았다. 그때까지도 난 몰랐었다. 과일 껍질도 가시 투성이라는 걸. 오돌토돌 나온 부분은 그저 튀어나온 돌기인 줄 알았지 초미세 가시들의 집합체인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나마 바로 멈춰서 다행이다. 가시들이 어찌나 작고 투명한지 분명히 보이는 건 없는데 손가락과 손바닥이 따가웠다. 참으로 불쾌하고 소름 돋는 느낌이다. 웬만하면 상상하지 말기 바란다. 그날은 거의 하루 종일 틈틈이 핀셋으로 손바닥의 가시를 빼내느라 진을 빼었다. 무식한자는 삶이 피곤하다.
그럼 이 뾰족뾰족 가시 투성이의 과일을 어떻게 따서, 어떻게 벗겨 먹어야 할까? 껍질 표면이 몸에 닿지 않도록만 조심하면 된다. 선인장 나무에 달려있는 과일을 끝에 깡통을 단 장대를 이용하여 따낸다. 농약 없이 자랐기 때문에 굳이 씻을 필요 없다. 접시에 가로로 놓고 포크로 가운데를 찔러 누른 후, 과일 양 끝을 칼로 잘라낸다. 그러고 나서 칼로 열매 가운데를 가로줄로 그어 껍질을 절개한 후, 양옆으로 열어서 벗겨준다. 생물 시간에 개구리 해부하듯 배를 갈라서 열어 준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면 두꺼운 껍질 안에 숨겨졌던 붉은 주황색의 과육이 드러난다. 껍질을 양 옆으로 완전히 열어 벗겨낸 후 포크 그대로 찍어 먹으면 된다. 이제 능숙한 손놀림으로 '프라고시코'를 다루게 되니 달콤하고 가벼운 간식이 생각날 때 더할 나위 없는 먹거리가 생겼다.
2023.09 , Corf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