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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버드 Mar 07. 2023

아홉 살에 되돌려 받은 90점이 남겨준 것

양심이 마음을 날카롭게 찌른 날

'아빠가 아침 일찍 시장에 다녀오셨데요.' 획 하나 차이로 받아쓰기 만점을 놓치고 말았다. 90점짜리 시험지가 못내 아쉬웠다. 마지막 순간까지 '데'인지 '대'인지 헷갈려서, 획을 애매하게 긋되 '데'에 가까워 보이게 썼기 때문이다.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조금만 더 그었으면 백 점이었을 것을. 9살에게도 성적은 중요했다. 저 오자만 아니었으면 우리 반에서 100점은 나밖에 없는 거고 집에 가서 부모님께 자랑하면 기뻐하실 텐데.  


갑자기 마음에 이상한 바람이 일었다. 이미 채점된 시험지를 조작해서 선생님께 점수가 잘못됐다고 이의제기해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가슴이 쿵쾅댔다. 몇 분의 고민 끝에 '대'로 보이도록 고친 시험지를 들고 선생님을 찾아갔다. 채점이 잘못된 것 같다고, 당돌하게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양심을 거스른 일을 저지른 첫 순간이었다. 나를 빤히 바라보는 선생님의 눈빛이 내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얼굴이 너무 뜨거워 고개도 못 들었다. 이 무모한 행동을 후회하며 꾸지람을 기다렸다. 그런데 선생님이, 잘못 봐서 미안하다며 100점으로 고친 시험지를 건네주셨다. 잘했다며 칭찬도 얹어주셨다.


집에 와서 자랑은 했다. 엄마가 기특하다며 저녁으로 구워준 고기를 신나는 척 많이 먹고는 체했다. 거짓말 때문인지 얹힌 고기 때문인지 속이 잔뜩 뒤틀린 탓에 잠도 설쳤다. 한참 뒤척이던 중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결심이 들었다. 자백할 용기를 내는 데에는 이틀이 더 걸렸다. 먼저 엄마에게 이실직고했다. 그런데 엄마조차 날 혼내지 않았다. 선생님께 가서 솔직히 말씀드리고 원래 내 점수를 받아오라며 등굣길을 덤덤히 배웅해다.


그날 나는 수업이 다 끝난 후에도 핑계를 대면서 교실에 한참 남아있었다. 잘못을 되돌릴 용기를 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이제는 문 닫고 가야 한다며 선생님이 가방을 챙겼다. 그제야 창피 시험지를 꺼내 들었다. 사흘 전 일으킨 '100점 사건'의 전말을 고했다. 선생님은 이번에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알고 있었어. 기다리고도 있었어. 잘했다." 어둑한 교실엔 노을이 들고 있었다. 따스했다. 이때 잘했다는 칭찬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알고 보니 선생님은 시험을 본 날 바로 엄마에게 전화했다. 두 어른은 내게 기억에 오래 남는 교훈을 줄 수 있을 것 같다며 입을 맞췄다. 선생님과 엄마는 내 거짓말을 지적하기보다, 나 스스로 반성하고 진실을 고백하길 바라고 기다렸다. 어른들의 판단이 옳았다. 양심에 큰 가책이 되는 일은 절대 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원칙을 세웠기 때문이다.


인디언들은 양심의 모양이 삼각형이라 닳아버리기 전까지 계속 마음을 찌른다고 했다. 나쁜 짓도 처음 한두 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쉽다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내 처음은 정말로 따끔했다. 그때 선생님과 엄마의 '착한 거짓말'은 내 양심 삼각형을 날카롭게 벼르는 칼갈이가 됐다. 사람들과의 술자리에서 학창 시절 시험 때 저지른 사소한 부정행위 일화나 어릴 때 소소하게 물건 훔친 일화가 오갈 때 나는 할 말이 없었다. 어른들이 다듬어준 삼각형을 오래 유지하는 것이 사랑과 포용에 대한 보답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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