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방산, 용머리 해안을 거쳐 사계해안을 걷는다. 용머리해안로를 따라 사계해안으로 진입하는 것도 좋지만 우리는 사계 마을을 구경하며 가기로 했다. 마을로 가는 길에 인도는 없다. 아슬아슬 갓길을 걷는다. 한쪽으로는 푸른 대파밭이 펼쳐져있고 뒤로는 산방산이 우뚝 솟아 균형을 맞춘다.
"제주도 대파가 유명한가?"
대파밭 옆에 또 대파밭 그 옆에 또 대파밭... 끝없이 이어지는 대파밭 덕분에 잡초도 대파로 보일 지경이 될 때쯤 생긴 의문이다.
"글쎄..."그가 대답하고 검색을 한다.
"유명한지는 모르겠는데 월동 경작물이라네..."
뭐, 그렇다면 의문이 풀린다. 밭 하나에 여러 가지 작물을 재배하나 보다.
마을로 들어가니 돌담 안에 놓인 작은 농가주택들이 아기자기하다. 내가 생각한 제주의 모습, 그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서있다.
사계리 꿈드림 문화숲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북카페로 책 대여는 사계리 주민만 가능하고 외지인은 커피를 마시거나 책을 읽을 수 있다.
무인으로 운영되고 코로나 19로 인해 방문객들은 제주 안심체크, 혹은 방명록 작성을 해야 한다. 음료와 과자는 모두 1천 원. 과일은 무료로 먹을 수 있는 제주도에서 가장 혜자스러운 장소다. 이 장소를 오래도록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예쁜 마음"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1945년 무렵 건립된 진지동굴은 일제강점기 말 패전에 직면한 일본군이 해상으로 들어오는 연합군 함대를 향해 소형 선박을 이용한 자살 폭파 공격을 하기 위해 구축한 군사 시설이다. 그 형태는 일자형, H형, 디귿자형 등으로 되어 있으며 제주도의 남동쪽에 있는 송악산 해안절벽을 따라 17기가 만들어졌다.
제주도 주민을 강제 동원하여 해안 절벽을 뚫어 만든 이 시설물은 일제 침략의 현장을 생생하게 증언함과 더불어 참혹한 죽음이 강요되는 전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제주 관광청>
현재는 관광객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진지 동굴 초입까지 가면 송악산 해안절벽을 따라 구멍이 뚫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픔의 역사, 일제강점기. 일본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기고 35년 만인 1945년 떠났다. 떠나는 순간까지 대한민국 이곳저곳에 난도질을 해놓고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도려내지 않고 보존한다. 대한민국 역사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되새기면서 말이다.
진지동굴을 멀리서 바라보고 송악산 초입 공원으로 향한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송악산이라고 적힌 표지석이 있다. 비록 오르진 않았지만 오른 척은 할 수 있겠지 싶어 사진 한 장을 남기고 돌아간다.
오늘 우리에게 제주란 "파도, 바람, 역사"다. 산방산에서 봤던 바람구멍, 해안사구 너머에서 들려온 파도소리, 아픔의 역사로 남아 있는 17기의 동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