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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용 Jun 02. 2021

[역대 UEFA Euro Champion 리뷰] 4편

람바참바 풋볼로 화려하게 무장한 디 먄샤프트, 유럽의 왕의 자리에 오르다

UEFA Euro 1972 챔피언 서독


개최지: 벨기에

본선 대회 기간: 1972년 6월 14일 ~ 1972년 6월 18일

참가국: 서독, 소련, 벨기에, 헝가리


머리말


2020년에 하기로 했던 UEFA EURO 2020은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로 인한 락다운으로 1년 뒤인 2021년에 개최하게 되었다.

그리고 2021년 6월 11일 개막하며 터키와 이탈리아의 경기가 열린다. 그렇다 유로 2020까지 약 한 달 남은 것이다.

그래서 유로의 역대 챔피언을 리뷰하는 컨텐츠를 하려고 한다. 월드컵처럼 전 세계인의 축제라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축구 팬들에게는 유로 역시 월드컵 못지않은 큰 행사다.


서독이 우승하기까지



대회 진행 방식은 지난 대회와 동일하다. 다만 결승전은 연장전 이후 재경기 대신 승부차기로 진행된다.

서독은 지난 1968년 최초로 예선에 참가했지만 최종 예선도 가지 못하고 탈락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황금 세대인 폴란드, 터키, 알바니아 세 팀을 상대로 4승 2무 10득점 2실점이란 성적으로 예선 조별 리그를 통과했다.

최종 예선에서는 잉글랜드를 만났으며 첫 경기를 잉글랜드의 성지 웸블리에서 치른다.

당시 서독은 웸블리에서 잉글랜드를 이겨보지 못했으며 에이서 베켄바우어와 네처조차도 5골보다 적게 내주고 경기를 끝내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라며 이 경기의 어려움을 인지했다.

하지만 그들의 푸념은 사실 겸손이었다. 서독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압도적인 점유율을 기록하며 경기를 주도했다. 잉글랜드는 볼을 제대로 만지지도 못했다. 울리 회네스의 선제골 이후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잉글랜드는 프란시스 리가 동점골을 넣는 데 성공했지만 네처에게 페널티 킥을 허용하고 게르트 뮐러에게 쐐기골을 허용하며 3-1로 패배한다. 잉글랜드 언론은 이날 서독의 경기력을 높게 평가하며 1953년에 헝가리가 돌아온 것 같다고 했다.

원정에선 서독과 잉글랜드는 0-0으로 비겼으며 서독은 처음으로 본선에 진출하게 된다.

본선에는 디펜딩 챔피언인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뚫은 벨기에, 루마니아를 상대로 최종 플레이오프까지 치르며 간신히 진출한 헝가리, 그리고 지난 대회 준우승 팀 유고슬라비아를 밀어내고 올라온 소련이 진출했다. 개최국은 벨기에로 정해졌다.

서독은 준결승에서 개최국 벨기에를 만나 게르트 뮐러의 멀티 골로 2-1로 승리했다. 결승전에서는 헝가리를 1-0으로 꺾은 소련을 만난다.

왼쪽부터 베켄바우어, 마이어, 슈바르첸벡, 하인케스, 네처, 빔머, 게르트 뮐러, 회트게스, 크레머스, 브라이트너, 울리 회네스


소련은 지난 세 번의 유로에서 두 번이나 결승전에 올랐으며 4강에는 세 번 모두 올랐다. 그리고 우승 경력도 있던 유로의 터줏대감이었고 서독은 처녀 출전국이었다.

선제골은 서독에서 나왔다. 전반 27분에 네처의 슈팅이 골 포스트를 맞고 나가 하인케스의 발 밑으로 왔고 연이서 하인케스가 날린 슈팅을 루다코프가 선방했지만 루다코프를 맞고 나온 골을 게르트 뮐러가 받아서 밀어 넣어 득점했다. 그리고 전반은 1-0으로 종료되었다.

후반 17분 하인케스는 자신에게 수비수들이 집중되자 쓰루패스를 흘렸으며 이를 수비형 미드필더인 빔머가 받아 득점했다. 6분 뒤 주로 수비적인 임무를 맡았던 슈바르첸벡이 베켄바우어 대신 역습 상황에서 오버래핑을 했으며 게르트 뮐러-하인케스-슈바르첸벡-게르트 뮐러로 이어지는 유려한 패스 끝에 게르트 뮐러가 득점에 성공했다. 서독 대표팀은 이 골을 통해 압도적인 포지션 체인지 능력과 조직적인 패스워크가 뛰어났는지 세상에 보여줬다.

이후에도 소련은 베켄바우어와 네처를 막는데만 집중해 서독에게 휘둘렸으며 서독은 압도적으로 소련을 찍어 누르며 우승했다.

결승전 상대였던 소련의 감독 올렉산드르 포노마로프는 "이런 팀에게 패하는 것은 굴욕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으며 해외 언론들은 1970년의 브라질이나 1954년의 헝가리에 비유하기도 했다. 그 정도로 강력한 팀이었다.


우승국 서독은 어떤 팀이었을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독일의 이미지는 실리적인 축구와 투박하며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한방이 강한 축구로 알고 있다.

하지만 이건 1974 월드컵 결승전과 1990년대의 수비적인 모습의 임팩트가 강해서 그렇게 기억되는 거지 이번 대회에서의 서독은 투박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여 1970년대 서독은 리베로인 베켄바우어와 스토퍼인 슈바르첸벡마저도 공격에 참여할 정도로 스위칭 플레이가 잘 되는 팀이었고 빠른 포제션 체인지와 빠른 패스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점유율로 상대에게 볼 잡을 틈도 주지 않았던 화려한 팀이었다.

독일 언론은 이 화려한 축구를 람바참바 풋볼이라고 불렀다. 람바참바는 독일에서 춤추며 흥겨울 때 쓰는 의성어이며 브라질의 삼바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만큼 당시 서독의 축구는 유럽의 브라질과도 같았다.


서독 대표팀 라인업

감독: 헬무트 쇤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서독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헤어베르트 밑에서 수석 코치를 역임한 후 그가 사임하고 디 만샤프트의 감독이 되었다.


화려한 운영과 실리적인 운영에 모두 능했으며 이 대회에서는 "나는 보루시아의 속도와 바바리아의 지능을 결합시켰다."라고 스스로 말했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오늘날의 바르셀로나를 연상시키는 포제션 체인지와 점유율을 보여줬다.

베켄바우어를 활용한 독일식 리베로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당시에는 한 팀에는 플레이메이커가 한 명이었으나 서독은 베켄바우어와 네처 모두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으며 이는 서로 부담을 덜어주는 모습을 보였고 이런 모습을 본 다른 감독들은 베켄바우어와 같은 독일식 리베로를 양성하려고 노력한다.

훗날 서독 월드컵에서는 카테나치오를 기반으로 한 실리적인 운영으로 네덜란드를 쓰러트리기도 했다.


골키퍼: 제프 마이어 (바이에른 뮌헨)

1944년 2월 28일 (결승전 당시 28세)

당대 서독을 대표하는 골키퍼였으며 이 대회에서도 화려한 필드플레이어진에 가려졌지만 탄탄한 안정감을 보여줬다.


리베로: 프란츠 베켄바우어 (바이에른 뮌헨)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5년 9월 11일 (결승전 당시 26세)


당대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가 역대 최고의 수비수이자 리베로로 만개하게 된 대회이다.

이탈리아식 리베로는 수비 라인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며 스토퍼들을 지원했다. 하지만 베켄바우어의 독일식 리베로는 그것보다 더 진화했다. 베켄바우어는 마치 플레이메이커와 같은 경기 영향력으로 경기장을 누비며 팀의 중심으로서 경기를 지휘했으며 팀원들은 베켄바우어의 지휘에 따라 스위칭하며 움직였다.

포워드처럼 드리블로 직접 슈팅을 날리기도 했으며 공격형 미드필더처럼 패스로 상대 수비진을 허물기도 했고 순수한 수비 능력도 완벽했다.

대회 베스트 일레븐은 물론이고 1972년 발롱도르 투표에서 1위를 차지하며 발롱도르를 차지하기도 했다.


스토퍼: 한스 게오르크 슈바르첸벡 (바이에른 뮌헨)

1948년 4월 3일 (결승전 당시 24세)

넓은 커버 범위와 훌륭한 대인 수비 능력으로 베켄바우어의 오버래핑을 커버하며 명성을 쌓았다. 결승전에서는 베켄바우어 대신 기습적으로 공격에 가담해 득점에 기여하기도 했다.


라이트 백: 호어스트 회트게스 (베르더 브레멘)

1943년 9월 10일 (결승전 당시 28세)

당대 서독에서는 베르티 포그츠가 최고의 측면 수비수로 호평받았으나 부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로 회트게스가 주전 자리를 차지했다. 베르더 브레멘의 레전드로 철의 정강이라 불릴 정도로 태클과 대인 수비에 능했다.


레프트 백: 파울 브라이트너 (바이에른 뮌헨)

1951년 9월 5일 (결승전 당시 20세)

데뷔한 시즌에 바로 주전 자리를 차지했던 재능 있는 선수로 수비 능력은 물론이고 넓은 시야에서 나오는 창의적인 패싱력과 빠른 판단력과 스피드를 활용한 오버래핑 하거나 수비로 복귀하는 능력 모두 대단한 선수다. 훗날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에서도 역대 최고 레벨로 평가받았다.

대회 내내 공수 양면에서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으며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18위를 차지했다.


수비형 미드필더: 헤어베르트 비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4년 11월 9일 (결승전 당시 27세)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다재다능한 미드필더로 서독의 피보테 역할을 맡으며 포백 보호와 공격형 미드필더 지원을 도맡았다. 베켄바우어가 공격에 나설 시 그의 자리를 커버하기도 했으며 측면과 중앙, 공격 지역과 수비 지역을 오가며 넓은 활동 반경으로 공수 양면에서 크게 기여했다.

이러한 활약을 인정받아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공격형 미드필더: 귄터 네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4년 9월 14일 (결승전 당시 27세)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독일 역대 최고의 공격형 미드필더 중 하나로 센티미터 단위로 패스를 조절해 컴퓨터 패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베켄바우어와 분담해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으며 베켄바우어가 상대적으로 밑선에서 지휘하면 윗선으로 올라와서 찬스 메이킹을 이끌었다. 이러한 활약을 기록한 네처는 대회 베스트 일레븐과 발롱도르 투표 공동 2위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렸다.



공격형 미드필더: 울리 회네스 (바이에른 뮌헨)

1952년 1월 5일 (결승전 당시 20세)

지금은 바이에른 뮌헨의 전직 회장으로 유명하지만 회네스의 선수 시절도 대단했다. 100m 달리기를 11초에 뛰었던 그는 약관의 나이에 훌륭한 재능을 보이며 유로에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빠른 스피드를 활용해 윙어들과 스위칭을 하며 상대 수비진을 교란하며 우승에 기여했다. 훌륭한 재능을 마음껏 뽐내며 대회 베스트 일레븐으로 선정되었다.


라이트 윙: 유프 하인케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45년 5월 9일 (결승전 당시 27세)

묀헨글라트바흐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이자 윙포워드로 빠른 스피드를 활용한 침투 능력과 정확한 골 결정력을 자랑했다. 결승전에서는 영리한 패스를 활용해 두 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우승에 기여했으며 결승전에서의 활약으로 대회 베스트 일레븐으로 선정되었다.


레프트 윙: 에르빈 크레머스 (샬케 04)

1949년 3월 23일 (결승전 당시 23세)

샬케의 전설적인 윙어로 측면 플레이에 능했다. 기존에 주전이었던 하네스 뢰어를 밀어내고 주전으로 좋은 활약을 했다.


스트라이커: 게르트 뮐러

출처: 법정스님의 소유


1945년 11월 3일 (결승전 당시 26세)


엄청난 득점력으로 인해 골을 넣는 데에만 능한 선수로 인식되었으나 이 대회에서의 게르트 뮐러는 득점왕은 기본이고 훌륭한 연계 능력으로 다른 서독 선수들에게 수많은 찬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결승전에서 멀티골을 넣어 우승에 공헌했으며 이런 활약으로 인해 발롱도르 공동 2위와 대회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다.




결론


서독은 그간 1954 스위스 월드컵의 우승에도 불구하고 축구 열강으로 평가받지는 못했으나 이번 대회로 인해 유럽을 대표하는 축구 열강으로 공인받았다. 그리고 서독의 우승 주역인 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뮐러, 귄터 네처는 발롱도르 포디움을 독식하며 아약스에서 트레블을 이룬 요한 크루이프를 포디움 밖으로 밀어냈다.

뿐만이 아니라 20세기 끝까지 서독과 함께할 독일식 리베로 시스템을 처음으로 선보였다. 이후 독일식 리베로는 독일 축구의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이 대회 이후 서독은 상승세를 유지했으며 두 번의 유로 우승과 세 번의 월드컵 우승을 기록하며 유럽 최고의 축구 열강 자리를 굳힌다. 지금은 독일이 여러모로 힘든 시기지만 언젠간 람바참바처럼 다시 올라올 수 있을 것이다.


유로 우승 트로피를 드는 프란츠 베켄바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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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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