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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채운 Oct 16. 2024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의 덕목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제5회 자, 뭘 써야 할까? 리뷰

사람과 사물,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시간을 두고 생각하여 주의 깊게 검증하며, 최대한 있는 그대로의 형태로 현상을 기억 저장소에 라벨링 하여 넣어두었다가 유효하게 재료를 조합하는 매직을 통해 쓸모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의 종합적인 모습>





하루키가 말하는 소설가란?


소설가로 적합한 사람은 이를테면 '이건 이렇다'라는 결론이 머릿속에서 내려지더라도, 혹은 자칫 내려질 것 같더라도, '아니, 잠깐, 어쩌면 이건 나 혼자만의 억측일 수도 있어'라고 멈춰 서서 다시 생각해 보는 사람입니다. p.120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그동안의 글쓰기에 대해 돌아보게 되는 문장이었다. 읽으면 바로 튀어나오는 즉각적인 반응들, 그것을 차르르 글로 풀어내는 나 자신이 실은 조금 마음에 들기도 했다. 결론 내리기에도 나의 주장을 피력하기에도 주저함이 없는 사람이었던 나는 어쩌면 소설가로서의 덕목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아닌 듯싶다. 물론 하루키처럼 꾸준히 의식하고 연습하여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뭐라카니 하룻개'처럼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듯한 나의 모습을 늘 생각하며 조금 더 조심스레 한 글자 한 문장씩을 내놓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뭘 물어봤을 때 거침없이 자신의 완성형 의견을 말해주는 사람이 늘 멋있다 여겼었는데 (이를테면 결혼 전 남편) 살아보니 장단점이 확연히 보인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고 있을 땐 자석처럼 내 인생을 강력히 끌어주기도 하지만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닿을 수 없는 밀어냄으로 영영 멀어질 수밖에 없더라는 것.


어쩌면 우물쭈물 자신의 생각을 말하기 주저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배려해 어느 정도 자신의 생각의 여백을 그의 언어로 채워놓을 여유를 마련해 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단호하게 결론지어야 할 일도 있겠지만 단호박처럼 다 썰어버린 관계 안에서 그다지 부대낄 일도 상대적으로 행복할 일도 줄었다는 걸 생각하면 이제부터는 나도 조금 우물쭈물 살아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내가 그렇게까지 싫은 건 아닐 거야. 조금 더 나를 보여주면, 아니 내가 그를 조금 더 알고 나면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될지도 몰라. 성급히 그와 나의 관계를 결론짓지 말고 어물쩍 내버려 두는 것도 좋겠다. 혹여 정말로 그러했던 마음을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게 이야기의 결말을 내가 빨리 써버리진 말자. 이렇게 나도 소설가식 사고법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




실속 없(어보이)는 재료에
의미를 부여하는 매직


뒤쪽 창고를 열고 거기에 우선 있는 것을 - 뭔가 좀 시원찮은 잡동사니밖에 눈에 띄지 않는다고 해도 - 아무튼 쓸어 모으고 그다음에는 분발해서 짜잔 하고 매직을 쓰는 수밖에 없습니다. p.130-131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문구에세이를 써보면 좋겠다는 이야기가 나온 지 세 달은 지났을 것이다. 누가 봐도 나는 숨길 수 없는 문구덕후임이 확실하고 문구 이야기가 나오면 나도 모르게 마이크를 잡고 무대 위에 올라가 홈쇼핑 쇼호스트 노릇을 자처하곤 했다. 나 역시 나보다 더 마음 뜨거운 문구덕후와 기록인의 영향을 받았고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어 알게 된 정보들이지만 배움이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 내가 배우고 내 몸을 통과해 나간 이야기는 내 삶과 반응을 일으킨 무언가가 덧입혀져 나온 나만의 고유한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막연히 이미 이렇게 문구에 대한 이야기가 많고, 나보다 더 열심히 더 활발히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는 사람들이 충분히 넘치도록 많은데, 빈약한 나의 이야기가 책으로 나올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할 말이 많은 건 아닌데 라는 생각에 주늑들어 있었다. 이런 나의 생각을 하루키 님이 알고 위로를 건네주는 듯했다. 아무튼 쓸어 모으고 분발해서 짜잔 매직을 써보라고.


실로 문구는 나에게 사소한 구원이었다. 내가 백만 원짜리 초콜릿을 먹고 천만 원짜리 가방을 살 수 있는 재력이 있었다면 그렇게 기분전환을 시도했겠지만 나에겐 만 원정도의 한계가 있었고 그 만원으로 누린 행복은 누가 뭐라 해도 내 삶의 우울감을 해소해 준 것이 확실했다. 내 마음속 다이소는 '행복을 파는 잡화점', 꿈을 파는 백화점 못지않게 의미 있는 곳이라는 말이다.


문구에세이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대박을 치겠다는 마음으로는 한 글자도 써 내려가지 못할 테지만 내 삶을 구원해 준 문구에 대한 감사의 인사로서 글을 써 내려간다면 그건 충분히 가능하고 또 가능한 일이다. 그건 내 진심이니까. 누가 믿어주지 않아도 내가 느껴 스스로 인정하는 확신 같은 그 무엇이니까.




하루키식 문장의 3요소
(리듬, 화음, 즉흥연주)


이렇게 키보드를 두드리면서 나는 항상 거기에서 올바른 리듬을 추구하고 적합한 여운과 음색을 찾습니다. 그것은 내 문장에서 변함없이 중요한 요소입니다. p.134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이 10명 있다고 하면 그 일을 그저 그렇게 해내는 사람과 장인의 반열에 올라가는 사람의 차이에는 '철학'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것 같다. 문장 하나에 담긴 그의 철학이 이렇게나 명확했다니 하루키도 그런 사람이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문장들이 심포니처럼 쾅쾅 울려 퍼진 데에는 이런 작가의 철학이 녹아들어서였겠구 싶었다.

 

그렇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글쓰기의 철학은? 문장을 되돌아보는 철학은? 대답은 물론 (아직) 없다이다. 앞으로 있어봐야겠다. 그걸 생각해 내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겠지만 대를 이어 찾아올 고객을 맞이할 글 맛집에 글 철학이 없어선 안될 일이라는 것에 나도 동의하게 되었기에 역시 이 즈음에서 멋들어지게 붓으로 써서 나만의 글 철학을 액자로 걸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를테면 믿음, 소망, 사랑 같은)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건전한 야심


인간의 삶이란 얼핏 보기에는 아무리 시시하더라도 실은 그런 흥미로운 것을 자연스럽게 줄줄이 만들어냅니다. 거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되풀이하는 것 같지만, '건전한 야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키포인트입니다. p.137

자신이 잘하는 언어를 무기로 삼아서 자신의 눈에 가장 분명하게 보이는 것을 자신이 쓰기 쉬운 말로 써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p.138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읽고 쓰며 보내는 시간이 하루에 적어도 두세 시간 이상은 들어가는 듯하다. 보통 그 이상인 날도 많지만 돈 안 되는 일에 이렇게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데에는 끝내 나이가 들어서까지도 쓰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야심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하면 평생 그다지 빛날 일 없을지도 모르는 평범한 인생에서 흥미로운 것, 기쁘고 신기한 것, 나를 웃게 해주는 어떤 것, 다른 이에게 줄 기쁨 같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발견해 나가는 사람으로 살겠다는 결심 같은 것이다. 숨기지 않겠다. 나는 이런 야심이 넘쳐나는 사람이라는 것을.




결코 손해 볼 것 없는 직업,
소설가


세계는 따분하고 시시한 듯 보이면서도 실로 수많은 매력적이고 수수께끼 같은 원석이 가득합니다. 소설가란 그것을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을 말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 멋진 것은 그런 게 기본적으로 공짜라는 점입니다. 당신이 올바른 한 쌍의 눈만 작도 있다면 그런 귀중한 원석은 무엇이든 선택 무제한, 채집 무제한입니다. p.140

직업으로서의 소설가 | 무라카미 하루키 | 현대문학


캐리어 두 개 가득 모은 스티커와 다꾸용품들, 수집이 강점인 나에게 어쩌면 글 쓰는 직업은 천직 중에 천직이 아닐까 싶다. 하루키와 아인슈타인은 따로 적지 않아도 마음속에 중요하게 떠오른 영감을 저장했다고 하는데 모르겠다 아이 둘 낳고 마미브레인을 갖게 된 나는 중요하다 생각한 일들도 적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엉뚱한 때에 다시 생각나 숨바꼭질하듯 찾으러 다니기 바쁘다. 메모는 필수라는 뜻이다. (야금야금 이런저런 이유로 사 모은 노트들을 어쩔 수 없이 써야 해서는 아니다. 맞나?)


요즘 아이들은 시간을 많이 내어주는 부모보다 함께 여행을 다니며 좋은 경험을 하게 해주는 부모를 더 선호한다고 하지만 나는 내가 가진 (현재로서는) 최선의 것으로 추억을 가득 담은 스크랩북을 선물해주고 싶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우리들의 이야기가 언제든 되살아나는 매직을 부린 책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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