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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역사문화(12)-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

                       -  국립중앙박물관 전시회 -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들>을 관람했다.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특별전이다. 전시품은 합스부르크 가문이 소장했던 회화, 집기, 갑옷 등 96점인데, 회화가 62점으로 압도적으로 많다. 고종 황제가 준 조선시대 갑옷도 있다. 회화는 합스부르크 가문이 배출한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스페인 왕을 비롯하여 그 배우자를 그린 인물화가 대부분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회는 합스부르크 가문Haus Habsburg의 역사 전시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지 않고는 전시회를 감상하기 어렵다. 합스부르크 가문은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645년 동안 21명의 독일 왕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와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제를 배출하며 강력한 왕조를 구축했던 가문이다.     


 * 숫자는 ‘도시로 떠난 독일 역사문화 산책’를 읽은 지인이 관람에 도움이 됐다고 하여 관련 페이지다.    

     

 1. 합스부르크 가문의 등장


  합스부르크 가문이 수백 년 동안 오스트리아를 근거로 통치하여 발상지가 오스트리아로 잘못 알기 쉬운데 발상지는 오늘날 스위스 북부 아르가우 주(Basel 근처)다. 합스부르크가는 1273년 10월 백작 루돌프 4세가 루돌프 1세로 독일 왕(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오르면서 역사의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황제로 취임하기 전인 1254년부터 1273년까지 19년 동안은 황제가 없었던 대공위시대(大空位時代)였다(p.28∼29). 루돌프 1세는 1283년 죽으며 두 아들에게 오스트리아 공국과 슈타이어마르크 공국을 물려주면서 오스트리아는 합스부르크가의 주요 거점이 되었다.


 2. 해가 지지 않는 대 제국을 다스린 카를 5세      


  루돌프 1세가 죽은 후 여러 가문이 황제를 배출했으나 1452년 프리드리히 3세가 황제에 오르며 합스부르크 가문 시대가 다시 열렸다. 합스부르크 가문을 유럽 내 강력한 가문으로 부상시킨 이는 막시밀리안 1세 황제(재위: 1508∼1519년)이다. 그의 결혼 정책을 통해 합스부르크가는 부르군트(현재 네덜란드와 벨기에)는 물론 카스틸리엔과 아라곤 공국을 차지하며 유럽 내 가장 강력한 왕조가 되었다. 그의 손자 황제 카를 5세(재위: 1519∼1556년)는 스페인 왕(카를로스 1세)과 시칠리아 왕을 겸직하며 프랑스, 영국, 동유럽을 제외한 전 유럽을 다스렸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다스린 황제 카를 5세. 스페인 왕으로는 카를로스 1세다. 근친결혼으로 주걱턱이 두드러진다.



 3. 오스트리아 대공녀(왕) 마리아 테레지아     


  신성로마제국은 물론 오스트리아 역사에서 꼭 언급되는 여걸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1717∼1780년)다. 황제 카를 6세(재위: 1711∼1740년)가 아들이 없이 죽자 딸 마리아 테레지아가 오스트리아 대공녀, 헝가리 여왕, 크로아티아 여왕에 올랐다. 이에 대해 프로이센 등 주변국들이 여자의 왕위 계승을 금지하는 ‘살리카 법’을 위반했다며 강하게 반발했다(p.400). 그러나 선제후가 선출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는 오르지 못했다. 이를 틈타 비텔스바흐 가문의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가 카를 7세로 황제에 올랐다. 당연히 합스부르크가가 반발하며 뮌헨을 점령하자 황제는 뮌헨에 돌아오지 못하고 프랑크푸르트에서 머물며 통치했다.



마리아 테레지아(사진 : 손선홍)



 재위 3년 만인 1745년 카를 7세가 죽자 뒤를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으로 로트링겐가의 프란츠 1세가 황제에 올랐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권한도 강했다. 그녀는 5남 11녀를 낳았는데, 남편뿐만 아니라 두 아들(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도 황제가 되었다. 막내 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비(루이 16세의 왕비)였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계속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했다(p.143).       


  o 합스부르크 가문의 근친결혼 정책     


 합스부르크 가문의 약점이 있었다. 제국을 지키기 위해 적극 장려한 근친결혼 정책이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4세의 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는 15살에 외삼촌인 황제 레오폴트와 결혼했다. 그녀는 결혼해서도 남편을 삼촌으로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근친결혼의 가장 큰 피해는 기형과 유전병을 초래했다. 펠리페 4세와 황제 카를 5세에서 보듯이 남자의 경우 주걱턱이 많았다.   * 위 카를 5세 참조

    


4. 신성로마제국의 멸망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등장     


  1792년 프랑스 혁명을 계기로 등장한 나폴레옹은 쾰른, 마인츠, 프랑크푸르트는 물론 바이에른 공국 등 신성로마제국의 대부분을 점령했다. 황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이 압력으로 1806년 껍데기만 남은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를 선언했다. 이로써 신성로마제국은 멸망했다. 이 선언으로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으로부터 오스트리아 제국(1804∼1867년)의 황제 자리를 보장받아 합스부르크가는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1815년 빈 회의 후 오스트리아 제국은 새로 결성된 독일 연방의 맹주가 되었다(40). 이후 프로이센 왕국이 통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1866년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승리하여 독일 연방은 해체되고 프로이센이 주도한 북독일 연방이 출범했다(350). 당연히 오스트리아는 북독일 연방에서 제외되었다.    

    

 5.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합스부르크 가문의 종말     


  프로이센에 패배한 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헝가리를 끌어들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출범시켰다. 그러나 합스부르크가는 점점 약해져갔다. 궁정 생활에 힘들어했던 황제 비 엘리자베스는 스위스 체류 중 암살당했다. 황태자 루돌프는 1889년 1월 빈 근교 마이어링에서 애인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했다. 마이어링은 빈에서 가깝고 경치가 뛰어난 곳이라 빈에 근무할 때 종종 드라이브 갔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사진 : 손선홍)



 황태자가 갑작스럽게 죽자 황제의 동생 카를 루드비히 대공의 아들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황태자가 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페리디난트 황태자 부부는 1914년 6월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의 총탄을 맞고 숨졌다. 황태자 부부의 죽음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프란츠 요세프 1세를 이어 1916년 카를 1세가 즉위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며 제국은 사라졌다. 이로써 합스부르크 가문의 600년여 년의 영광을 막을 내렸다.     


 황제 카를 1세의 장남 오토 폰 합스부르크는 4살 때인 1916년에 황태자가 되었으나 제국의 멸망으로 황제 자리에는 오르지 못했다. 그는 새로 태어난 오스트리아 공화국에서 정치인으로 또 저술가로 많은 활동을 했다. 빈에 근무하던 1990년대 초 나는 그가 주최한 세미나 행사에 몇 차례 참석한 적이 있다. 그는 2011년에 사망했다.           


전시품에는 고종 황제가 수교 기념으로 선사한 갑옷도 있다.


 

조선 갑옷(사진 : 손선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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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고 : 『도시로 떠난 독일 역사 문화 산책』, 푸른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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