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Dec 19. 2023

마지막 인사, 그리고 첫인사

2023년 12월 19일, 구름 많은 갠 날에서 흐린 날로, -5도~1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다 한들, 달라질 것이 없는데도, 늘, 삶이 죽음으로 건너가는, 존재가 비존재로 무화되는, 그 짧은 순간을 함께하지 못했다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언젠가 우리는, 첫인사와 함께 만났을 테지. 그렇다면, 그날, 이제 잘 가라고, 그래 잘 있으라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걸 하지 못했구나. 이 한세상, 어찌 살 만했느냐고, 많이 고단했느냐고, 그래도 따뜻한 기억 하나쯤은 품고 있느냐고, 살아내느라 애썼다고, 그만 편히 쉬라고, 이제 우주의 일부로 돌아가라고, 곧 나도 그 길을 따라갈 테니 뒤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인사를 건넸어야 하는데.


우리가 언제 처음 만났던가. 닫혀버린 기억의 문 너머, 난,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하지 못하지. 당신들은 내게 어떤 인사를 건네었나. 나는 당신들에게 어떤 얼굴을 내밀었나. 문득, 무력하게 누운 채 버둥거리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을, 당신들의 첫 눈맞춤을 생각해 본다. 그것이 근원적 유대감에서 오는 사랑의 눈빛이었든, 더 무거워진 삶의 무게에서 오는 근심과 걱정의 눈빛이었든, 달라진 상황에서 오는 생경함의 눈빛이었든, 그 무엇이라도, 우리는 인사를 나누었을 테지. 하지만, 당신들은 아무 말 하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저, 눈빛으로, 마음을 삼키고 있었을지도 모르거든.


생의 숱한 첫 만남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삶의 어느 순간, 타자로, 낯선 이로 만나, 삶의 어느 한 조각을 함께 나누기로 했으면서도, 별리의 순간, 아무런 인사도 없이 뒤돌아섰던 나를, 그이들을 생각한다. 어쩌면 그 순간이, 이 생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이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니, 만나서 반가웠다고,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겠다고, 이 생을 잘 살아내다가, 마침내 당도할 그날이 오면, 잘 가라고, 인사했어야 하는데. 기별도 없이, 부고도 없이, 그 순간, 영원한 작별을 하고 있었다는 걸, 우리는 알고 있었으려나.


첫 만남의 순간, 작별의 순간이 담겨 있었다는 걸 몰랐어. 작별의 순간, 첫 만남의 순간을 기억해야 한다는 걸 몰랐어. 첫인사를 건넬 때, 마지막 인사를 준비해야 한다는 걸 몰랐어. 첫인사를 기억하며, 마지막 인사를 건네야 한다는 걸 몰랐어. 바로 그때가,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몰랐어.


마지막 인사를 나누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첫인사를 기억하기 못하기 때문일까. 그이들이 부재하게 된 시간이 이토록 오래되었어도, 그이들의 부재가 이토록 멀어지지 않는 까닭은. 언제쯤, 나는, 부재를, 놓아줄 수 있을까. 언제쯤, 나는, 상실을, 상실할 수 있을까.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수원은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 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


_ 나희덕, <어두워진다는 것>

매거진의 이전글 삶에게, 혹은 밥에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