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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an 19. 2024

부끄러운 채로, 기어이 살아갈 거라서

2024년 1월 19일, 잿빛 하늘에 빗방울, 0도~2도

며칠 동안 고된 비행을 하며 구해온 먹이를 토해내 새끼를 먹이는 알바트로스의 참혹한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플라스틱이 무언지 알 길 없는 어미는 아기새에게 생이 아니라 죽음을 건네주고 있다는 걸 몰랐다. 오랜 기다림 끝에, 어미가 게워내는 것들을 허겁지겁 받아 먹은 새끼들은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간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에선가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야기를 듣자, 난 곧바로 내 삶의 현재에 대한 회의감에 사로잡혔다. 내가 밥을 벌고 있는 일이야말로, 인간이 만들어내는 온갖 쓰레기를 종류별로 다양하게 배출하는 일이라서, 말 그대로 소리 내어 이렇게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이 일로 밥벌이를 하는 나는 대체 뭐 하는 자인가. 가뜩이나, 밥을 버는 것 말고는 참 무의미한 생이라 자괴하던 나는, 비루한 생을 이어가자고 밥을 버는 일조차 생을 죽이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자, 치욕스러워졌다.


그래? 정말이야? 치욕 운운하는 내게, 내가 물었다. 그래서, 이 일을 당장 멈출 셈이야? 너는 지난여름에도, 욕망과 소비의 최전선에서 일하는 게 어쩌고 저쩌고 하며 웅얼거렸지만, 결국 아무 짓도 하지 않았잖아? 인간의 유해함에 대해 노상 지껄이지만, 네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게 다 아니야? 그렇게 걱정이 된다면, 너무 참혹해서 그토록 슬프다면, 네가 앞장서 혁명을 하든가, 그도 아니면 차라리 죽어버리는 건 어때? 그러면 유해한 존재가 하나는 사라지잖아.


그른 말이 하나도 없었다. 혁명? 난 삶을, 존재를 혁명할 자가 아니었다. 좁은 우리에서 제 똥을 밟고 살다가 살해당하는 소를 연민하는 척하면서 고기를 먹는 자이고, 기후위기로 모두가 절멸해도 마땅한 짓을 벌인 게 인간이라며 혀를 끌끌 차는 척하면서 화석연료를 아낌없이 쓰는 자이며, 알바트로스의 운명을 참혹해하는 척하면서 욕망의 소비를 계속 하는 자다. 나는 내일도 끈덕지게 밥벌이를 하기 위해 가게 문을 열 것이고, 유해한 생을 끝냄으로써 조금이라도 빚 갚음을 하려는 결단을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알바트로스의 소식을 전해 들은 날 밤, 밖으로 나가 하늘을 올려다보니 유난히 별빛이 많이 보이는 거였다. 저 중에는 수억 광년 너머에서 출발한 빛도 있다는데,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별일 수도 있다는데, 수억 년은커녕 몇십 년 전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내가 지금 여기 당도한 별빛을 바라보다 보면, 찰나에 티끌처럼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나의 보잘것없음을 느낀다. 그렇듯 보잘것없는 내가, 인간이라는 집단의 욕망의 일부가 되어, 아무렇지 않게 유해한 존재로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그러나,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는, 부끄러운 채로, 여전히 부끄러운 짓을 하며, 기어이 살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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