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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an 30. 2024

‘나는 왜 쓰는가’*

속된 욕망 혹은 마음 들여다보기

어릴 때 어떤 식으로 성장했는지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한 작가의 동기를 헤아리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글의 주제는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그는 작가 생활을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나름의 정서적 태도를 갖게 되며, 그것은 그가 완전히 벗어날 수 없는 무엇이다. 물론 그는 마땅히 자신의 기질을 다스려야 하고, 미성숙한 단계에 고착되거나 비뚤어진 심기에 매몰되는 일을 피해야 한다. 하지만 일찍이 받은 영향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린다면, 글을 쓰고자 하는 충동 자체가 없어져버릴 것이다. 나는 생계 때문인 경우를 제외한다면, 글을 쓰는 동기는 크게 네 가지라고 생각한다.


_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 부분


‘나는 왜 쓰는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면, 딱히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을 수 없다. 게다가 나는 작가가 아니니, 조지 오웰 식의 진지한 성찰을 하기도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쓰는 행위’, 그것도 일회성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법 오랫동안, 꾸준히 무언가를 적는 행위를 하는 동기에 대해서는 한 번쯤 생각해 볼 만도 하다. 삶을 살아내는 데 있어서, 문자로 무언가를 굳이 기록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쓰는 행위 자체가 엄청난 쾌락을 가져다주어서 그 일에 중독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내 경우, 조지 오웰이 글을 쓰는 동기를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해 제시하기 전에 언급한 말들이 더 눈에 들어오기는 했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 삶에서 형성 돼온 정서적 배경이 산출된 글의 매우 중요한 동기가 되며, 그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버릴 경우 글을 쓰려는 충동 자체가 사라져 버릴 수 있다는 것. 이 지적에 꽤 동의하는 편이라 특별히 눈여겨본 것인지도 모른다. 남의 글을 살피고, 매만지고, 알리는 일을 20년 가까이하면서도 내 글을 써보자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딱히 거부한 건 아니다. 그저 욕구가 태동하지 않았던 거다. 그러다가, 출판 경력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우연히 만난 (지금은 폐간된) 어느 잡지에서 일하던 젊은 친구가 에세이를 좀 써줄 수 있느냐고 청해왔던 게 계기가 되었다. 1년여간 연재 글을 쓰면서(사실 연재라고 하기에는 일관성이 없는, 요즘 쓰는 것과 같은, 일기에 가까운 글이었다)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한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그건, 저 우물 깊은 곳에 침잠해 있는 내 마음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전히 그걸 쓰고 있는 걸 보니, 오웰의 지적을 따르자면, 난 아직 그 정서적 배경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다.


오웰이 뒤이어 적은 네 가지 주요 동기도 결국은 성장기와 성인기에 이를 때까지 형성된 정서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네 동기 모두 ‘작가’가 되고자 하는, 그러니까 나처럼 혼잣말을 지껄이는 게 아니라,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이들과 더 유관한 동기로 여겨지기는 한다. 난 오웰이 첫 번째로 꼽은 ‘순전한 이기심’에서, 그가 꽤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그럴듯한 이유를 갖다 댄다 해도, 결국 작가가 글을 쓰는 데는 자기 욕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지극히 사적인 배경이 가장 큰 동기로 작용한다. 물론 오웰이 언급한, ‘똑똑해 보이고 싶은 욕구,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욕구,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욕구,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하고 싶은 욕구’ 등등과 다른 무엇이 작용하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말이다. 오웰은 작가가 대개 허영심이 많고 자기중심적이라고 지적했다. 작가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난 그의 지적에 일리가 있다고 믿는다. ‘자기 세계’가 강하지 않은 사람이 작가가 되기는 어려워 보인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대로 ‘책을 쓴다는 건 고통스런 병을 오래 앓는 것처럼 끔찍하고 힘겨운 싸움’이 될 때가 많은데, 다시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삶을 기어코 살아가려 하는’ 작가들만의 허영심과 자기중심성이 없고서는 그 싸움을 계속해 나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혼잣말을 뇌까린다면서 쓰는 나 역시 순전한 이기심 말고 무엇 때문에 굳이 쓰고 있겠는가.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마음을 쓴다고는 하지만, 굳이 마음을 문자화하는 까닭은 문자화함으로써 마음을 대상화하고 극화시킬 수 있을뿐더러, 이를 통해 일종의 희열, 즉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는 오웰이 제시한 두 번째 동기, 즉 ‘미학적 열정’과도 연결돼 있다. 그는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 혹은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가져다주는 묘미에 대한 인식’, 즉 ‘미학적 고려’가 글쓰기의 주요 동기 중 하나라고 주장한다. 타당한 지적이다. 외부 세계를 예리하게 지각하지 못하는 사람이, 생각을 문자화·문장화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글을 쓸 가능성은 별로 없다. 물론 그렇듯 예리한 촉수와 감성을 지녔다고 해서 글 쓰는 일이 늘 기꺼워지는 건 아니다. 지각된 세계를, 감지된 내면을 쓰는 일이 늘 생각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서, 생각이 뒤엉킬 때, 문장이 헝클어질 때, 글을 ‘쓰고자 하는’ 자는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그럼에도 그는 쓰고자 하는 욕구를 멈추지 못한다. 쓰는 행위가 가져다주는, 그리고 씀으로써 산출된 문장이 안겨주는 희열을 잊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학적 열정이 가장 잘 구현되는 건 아무래도 시 쓰기를 통해 산출되는 언어, 즉 ‘시어’겠지만, 그렇다고 꼭 시어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잘 쓰인 소설은, 흥미를 자아내고 몰입을 이끌어내는, 잘 짜인 서사 구조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문장 자체가 유려해, 소설을 구성하는 문장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희열을 느끼게 해 준다. 그건 에세이도 마찬가지다. ‘에세이(essay)’는, 알다시피, 몽테뉴의 Les Essais(수상록)에 등장하는 단어 essai에서 비롯된 말인데, 그는 이 신조어를 프랑스어 essayer에서 가져왔다. 이는 ‘시험하다’ ‘처음으로 시도하다’와 같은 의미를 지닌다. 몽테뉴는 Les Essais를 통해 무엇을 하고 싶은 건지를 이렇게 썼다. “이 에세들은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이요, 그것들을 통해 내가 하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지식을 주려는 것이 아니라 나에 대해 알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논하려는 게 아니라, 자신의 타고난 능력을 ‘시험(essai)’해보려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에세이’의 기원으로부터 생각해 보자면, 에세이란 그저 일상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신변잡기라기보다, 자기 사유를 끝까지 밀어붙여 자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탐색하는 글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에세이의 언어가 시어 못지않게 미학적으로 직조되어야 하는 이유다. 사실 나는, 잘 쓰인 글은, 꼭 문학이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철학이든 물리학이든 생물학이든 간에 미학적으로 잘 구현되어 있다고 느낀다.


오웰이 제시한 나머지 두 동기에 대해서 동의하는 ‘요즈음’ 작가들은 그렇게 많지 않을 듯하다. 하나는 ‘역사적 충동’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목적’이다. 그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이를 후세를 위해 보존해 두려는 욕구’를 ‘역사적 충동’으로 정의했고,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구,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타인의 생각을 바꾸고자 하는 욕구’를 ‘정치적 목적’과 연결시켰다. 사실, 이 두 동기는 20세기 후반까지도 작가들이 펜을 드는 주요한 이유에 속했다. 20세기 초중반, 격동하는 유럽 사회에서 분투하는 생을 살아간 조지 오웰에게는 더욱이 이 두 동기가 중요하게 작용했으리라. 그래서 그는 ‘정치적인 편향이 없는 책은 단 한 권도 없’으며,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에세이 말미에서는 이렇게 덧붙인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돼 있던 때였다.” 그래서 그는 《동물농장》이나 《1984》가 정치적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특별히 신경을 많이 쓴 작품임을 밝히기도 했다.


역사적 충동까지는 모르겠지만, 나 역시 정치적 목적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글을 쓰는 것 같지는 않다. 원가족사를 둘러싼 우물 파기야 그렇다 쳐도, 인간의 욕망에 대한 삐딱한 시선이나, 기후위기와 인간의 절멸에 대한 부정적 언어들은 하나같이 정치적인 것들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한 글을 쓰면서 내가 담아내고자 하는 건 결국, 브레이크 없는 인간의 욕망과, 멈추지 않을 경우 필연적으로 귀결될 비관적인 결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고, 거기에는 이를 누구에게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그리하여 단 한 사람이라도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게 만들려는 의도가 내재돼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오웰은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이라고 했지만, 내 생각에, 예술은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사회·정치적 지형의 변화에 따라, 예술의 언어(여러 예술 표현 양식을, 예술의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편의상 ‘언어’라고 하자)도 변화되어 왔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고, 앞으로도 이는 유효할 것이다.


오웰의 에세이를 따라가면서 생각을 확장해 본 까닭은, 사실, 수시로, 굳이 내가 왜 쓰고 있는지 회의에 빠질 때가 많기 때문일 게다. 그건 어쩌면, 그의 말대로 허영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내 마음을, 내 생각을 이만큼 문자화하고 문장화할 수 있다는 데서 오는 희열과 만족감을 즐기고자 하는 허영심. 이것이 허영이 아니라, 마음 들여다보기를 통한 수행 같은 거였다면, 지금쯤, 조금은 더 나은 인간이 되어 있어야 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작가가 아님에도, 내 글쓰기가 오웰이 지적한 속된 동기(네 가지 동기 모두 속된 동기다)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생각을 한다. 언제는, 글쓰기가 마음 읽기라더니, 이제는, 마음 읽기에 순전한 ‘성찰’만 있었던 건지 자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당분간, 드물게라도, 무언가를 쓸 것 같다. 속된 욕망 때문이든, 자기 성찰을 위한 것이든, 마음의 우물 들여다보기를 멈춘 채로, 일상을 잘 살아갈 자신이 아직은 없기 때문이다. 몽테뉴가 말한바, 나의 변덕스러운 생각을 따라가며 나를 들여다보고 나를 알아가는 일, 그것이 이 혼잣말 같은 글, 나의 에세이를 써 나가는 이유인 듯하다. 말하자면, 이는 나의 Les Essais인 셈이다.




* 에세이 주제목 _ 조지 오웰, <나는 왜 쓰는가>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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