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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Feb 06. 2024

떠도는 영혼은, 끝내 떠돌 수밖에 없음을

뿌리내리지 못한 삶에게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큰 도시에서 직장을 다니며 생을 꾸려가던 한 남자가 더 이상 업계에서 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그이는 그 차가운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막막한 심정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그때 나는 남도 어디께서 나고 자란 그이에게 물었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어때요? 거기서 흙을 일구며 새로 시작하는 겁니다. 저는 돌아갈 고향이 없어요. 있다면 그리했을 겁니다.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던 그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처럼, 이렇듯 큰 도시에 밥을 벌러 온 이가 돌연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건 생이 실패했다는 징표이며, 그이의 실패는 두고두고 고향 마을에 회자되리라는 거였다. 부모님의 낯을 뵐 면목이 없다고 했다. 예전에는 흔히 ‘자식 농사’라는 말을 하곤 했다. 말하자면, 자식은 ‘타자’로서 양육의 대상이라기보다, 부모 된 자의 ‘삶의 성과’ 같은 거였다. 대처에 나가 잘된 자식이 있다는 건, 그이 역시 잘 산 부모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 남자가, 나고 자란 곳으로 낙향하긴 어려울 것 같다고 한 말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돌아갈 고향은 없지만, 어머니 생전, 아버지가 생을 망각하기 전, 파주 집에 갈 때면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나는 잘된 농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나 내 밥벌이를 마뜩잖아했다. 기껏 그런 일을 하라고 고등교육을 시킨 게 아니라는 생각이 좀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서였다. 그래도, 아버지의 야심 찬 농사에 속하지 않았던 나는 사정이 좀 나은 편이었다. 어머니의 착한 비를 맞고 자란 장자는, 명문 법대에 합격하며 기대를 한몸에 받았던 장자는, 잘못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망친 농사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아버지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고 말았다. 상처를 받은 걸로 치면, 낱알을 제대로 맺지 못한 벼인 장자도 다를 바 없었다. 아버지는 언젠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을 들려주곤 했지만, 장자라는 벼는 미처 익지도 못한 채 힘없이 고개를 떨구곤 했다. 농사를 망친 아버지는 쭉정이 벼들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느 날에는 자신의 농사법에 문제가 있었던 건 아닌지 자책했고, 어느 날에는 아내가 논에 물을 잘못 댄 탓이라고 비난했고, 어느 날에는 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한숨 쉬었다.


설이 되었지만, 돌아갈 고향이 없는 나는, 그저 여기 바닷가 마을에 있기로 한다. 하기야, 편의점 노동자로 살아가는 터라 쉼 없이 일해야 해서, 갈 곳이 있다 한들 어차피 움직이지도 못할 참이다. ‘설’은 한자로 ‘愼日’이라 하여, ‘경거망동을 삼가는 날’이라고 하는데, 이리 정의한 건 새로 시작하는 첫날에 한 해의 운이 달려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란다. 경거망동이란 것을 어떻게 규정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사실, 설날의 풍경을 돌이켜보면, 우리는 조심성 없고 경솔하게 누구의 마음에 상처를 내곤 했다. 그저 지난해 살아내느라 애 많이 썼다고, 올해도 사느라 힘겨울 테니 떡국 한 그릇 먹고 힘내자고, 온기를 나누는 자리이면 좋으련만, 우리는 걱정과 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제 마음속의 때를 누구에게 묻히는 데 여념이 없었다. 설은, 그런 날일 때가 많았서, 우리는 늘 서먹한 마음으로 만나, 불편한 마음으로 헤어지곤 했던 것이다. 그러니, 돌아갈 고향이 없어서, 쉬는 날이고 뭐고 일을 해야 해서, 가족의 절반이 죽고 없어서, 산 자들을 삶답게 만날 수 없어서, 그저 바닷가 마을에 가만히 있기로 한 것이 서글퍼해야 할 일은 아닌 셈이다.


물론, 일찍이 상실하지 못할 상실을 안고 살아온 자에게는, 부재를 안고 살다가 이미 늙어버린 자에게는, 외로움에 이력이 나 더 이상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 자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없다는 것도, 떡국을 나누어 먹을 어미가 없다는 것도, 그리 서러운 일이 아니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어미가 차려주는 밥 한 그릇과 어미가 건네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리운 존재가 있고, 다 큰 어른인 줄 알았던 마음이 ‘우리 아가’ 한마디에 섧게 무너져 내리는 존재도 있다. 오래전, 어머니가, 다 큰 나를 두고 “아가, 이것 좀 먹어”라고 말한 적 있다. 무엇을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명히 기억하는 거라면, 다 큰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지 않았다는 거다. 청년이 되어서도, 장년이 되어서도, 가끔은, 누구에게 작은 존재가 되고 싶을 때가 있는 법이다. 부러 어린양을 피우는 건 아니라 하더라도, 실은 그이가 나보다 더 쪼그라든 존재라 하더라도, ‘아가’라 불러주는 이의 떡국을 먹으며 당신이 차려준 음식이 제일 맛나다고 너스레를 떨고 싶어지는 때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분노를 가르쳐주는 도시에 유배된 후 피폐해진 영혼을 안고서는, 삶을 삶답게 살지 못해 무너져 내린 마음을 안고서는, 차마 고향 마을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차마 어미가 차려준 밥을 삼켜 넣을 면목이 없어, 차라리 고아 된 심정으로 허허로운 도시를 배회하기로 하는 존재도 있다.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그 남자도, 어쩌면 그런 마음이었을지 모른다.


그 도시에서 났지만, 늘 유랑민 같은 심정으로 살았다. 뿌리내릴 곳이 없어서, 내 가지는 자꾸만 말라비틀어져 갔다. 그리하여, 갈급한 마음으로, 하지만 순진한 마음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다면, 뿌리내릴 곳이 없다면, 내가 찾아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뇌까렸다. 어리석게도, 떠도는 영혼은, 끝내 떠돌 수밖에 없다는 걸, 알지 못했다. 가게에서 손님들을 맞을 때면, 가끔, 집 떠나 다니러 온 그이들이 아니라, 여기 거처하는 내가 길 떠난 자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까닭에, 그이들이 바닷가 마을의 사정에 대해 물어올 때면, 이렇게 답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죄송합니다. 사실 저는 떠돌이예요. 당신의 도시에서도 기숙한 적 있습니다. 오래전 일이지요. 거기서 대지에 뿌리내리지 못한 나무들이 분재로 심긴 채 시름시름 앓다가 죽어가는 걸 본 적 있어요. 이건 비밀인데, 저는 분재로 심기기 싫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녔답니다. 제 뿌리가 말라가고 있다는 것도, 가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도 깨닫지 못한 채 말이에요. 그렇다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올 때, 기어코 뿌리내릴 곳을 찾겠다는 각오를 다진 건 아니었어요. 아까 말씀드렸지만, 저는 떠도는 존재라서요. 미안합니다. 제가 말이 많았지요. 그저 바닷가 마을의 사정은 잘 모른다고, 정착한 존재의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고, 뿌리내린 나무는 어떻게 살아가는지 잘 모른다고 말씀드리면 되는 거였는데….


올해도, 어김없이, 설이 왔다는 소식을 듣는다. 떠도는 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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