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Feb 18. 2024

봄볕에게 물었다

2024년 2월 18일, 시퍼런 하늘과 바다, 1도~11도

볕의 빛깔이 달라졌다. 봄이 겨울의 등을 떠밀며 치대고 있는 게다. 눈구름이 물러나니, 시퍼런 낯빛을 드러낸 바다 곁에서 봄볕이 살랑거린다. 그게 좀 얄미웠다. 엊그제만 해도, 잔뜩 화가 나 검게 일렁이는 바다의 위세에 눌려, 바다가 몰고 온 잿빛 구름의 그늘에 가려, 숨죽이던 주제였으니 말이다. 겨울바다도 마음이 상한 모양이다. 봄에게 자리를 내어주자면 나름 의식이 필요한데, 제 흥에 겨워 춤을 추는 봄볕의 장난질이 꼴사나웠던 거다. 곧, 한 주 내내, 비구름과 눈구름을 보내겠다며 엄포를 놓고 있으니 말이다. 엄포? 부디 괜한 큰소리였으면 하지만, 봄을 눈앞에 둔, 이곳 2월의 바다가 허튼소리를 한 적 없으니, 그저 그가 봄 햇살의 경거망동을 어여삐 여겨주길 바랄 뿐.


겨울산의 끝자락에서, 봄볕의 춤에 조응하듯, 얼굴에 잔뜩 힘을 준 봄눈들을 만났다. 나는 참 실없는 녀석이라, 봄볕의 살랑거리는 치맛자락이 얄궂다 여기던 속내는 온데간데없이, 걔들의 맨얼굴을 넋 놓고 바라보게 되는 거다. 고 앞에 끈덕지게 앉아, 걔들이 파안대소하는 순간을 목도하고 싶어지기까지 한다. 녀석들은 아마도 한껏 뽐내며 이렇게 말하겠지. 날 기다린 거야? 하하. 기분이 어때? 날 다시 만나서 좋지? 어디 보자. 하암. 우선 기지개부터 좀 켜 볼까? 으쌰! 망상처럼, 극적인 만남을 그려보다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젓는다. 아냐, 아냐, 아직은 아니야. 격노한 겨울바다의 소식을 듣지 못한 거야? 몇 날 며칠, 눈구름이 몰려온다던데? 얼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해. 그러자, 봄볕이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핀잔을 주는 거였다. 어리석은 녀석, 아직도 모르는 거야? 봄눈이 봄눈을 만나니 곧 봄이라는 걸, 그건 바다가 띄워 보내는 봄의 전령이라는 걸, 눈이 그치고 나면 눈이 활짝 열리리라는 걸, 정말 모르는 거야?


문득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니,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그리 화가 나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바다는 그저 겨울바다이기만 한 적 없으니, 봄으로부터 봄까지, 겨울로부터 겨울까지, 생에서 생까지, 죽음에서 죽음까지, 온통 시간과 존재를 품은 바다 그 자체였으니, 내가 속 좁게 단정한 겨울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던 거다. 겨울에도 속하지 못하고, 봄에도 속하지 못한 내 마음이, 차갑게 분노한 바다와 철없이 따뜻한 햇살을 공연히 다투게 만든 거다.


무안해진 나는 봄볕에게 물었다. 나는, 이제, 또, 어디로 가야 하지? 볕이 답했다. 넌 언제나, 어디로 갈 수도 없고, 어디로 가지 않을 수도 없다고 말하곤 했지. 구태여, 어디로 향하려 하지 마. 존재에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지 마. 시간에 끝과 끝이 있다고 생각지 마. 넌 나를 봄볕이라 부르지. 실은 아니야. 바다가 바다 그 자체이듯, 볕도 볕 그 자체이지. 봄볕과 겨울볕이 다른 존재일 거라 짐작하지 마. 존재는 존재 그 자체이며, 시간도 시간 그 자체인데, 시작과 끝이 있다고 믿는 건 네 심상일 뿐이야. 시점도 종점도 없는데, 굳이, 어디로 향해야 할지 답을 구할 필요 있을까?


충분치 않았고, 다시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거라면, 봄눈이 봄눈을 만나 곧 봄이라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거지? 봄눈이 기어이 얼굴을 내미는 게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봄볕이 한심하다는 듯 째려보는 통에 눈이 부셨다. 쯧쯧, 미욱하기 그지없는 녀석이로군. 왜 자꾸 의미를 구하려 하는 거지? 봄이 피는 데에도, 여름이 우거지는 데에도, 가을이 시드는 데에도, 겨울이 는 데에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 봄눈의 의미가 뭐냐고? 네가 존재하게 된 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네 생의 가을이 시들고 있는데, 여즉 봄을 더듬고 있는 건 아니지? 네 생의 겨울이 눈앞에 있는데, 여즉 여름을 추억하고 있는 건 아니지? 네가 지고 없어도, 봄눈은 피어날 거야. 봄눈이 피어나는 바닷가에는 또다시 봄눈이 내릴 거고. 거기, 무슨 의미가 있는 건 아니야.


죽은 어미가 난 날이었고, 옛 벗의 어미가 죽었다는 전갈이 날아든 날이었다.


_ 2024년 2월 16일





매거진의 이전글 봄 앞에 선, 상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