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Mar 05. 2024

당신은 안녕한가,

당신이, 당신의 삶이, 안녕하면 좋겠다

생은 불행한가. 잘 모르겠다. 이를테면, 사는 일이 지겹다, 서글프다, 덧없다 같은 마음을 품은 적은 있는 듯한데, 불행하다고 생각지는 않았다. 불행하다는 마음과 대를 이루는 건 행복하다는 마음이니, 불행하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행복하지 않다는 의미가 되겠다. 누군가 불행하다 느낀다면, 행복하다는 게 무언지를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상당 부분 ‘언어’와 무관하지 않다는 걸 고려한다면, ‘행복’이라는 말이 뜻하는 바를 뜯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게다.


한자어 幸福에서 幸의 사전적 의미를 찾아보면 ‘다행하다’ ‘바라다’ ‘즐기다’ ‘요행하다’ ‘기뻐하다’ 등 다양한 뜻이 기술되어 있는데, 그것으로는 뭔가 성이 안 차 그 어원을 찾아보았다. 본래는 죄인을 잡아 속박하는 ‘수갑’의 형태에서 비롯된 것이란다. 여기서 두 가지로 해석이 갈리는데, 하나는 죄인을 바라보는 입장에서 그를 묶어두었기 때문에 다행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죄인 자신의 입장에서 그보다 더 가혹한 형벌을 면한 채 그저 수갑을 차고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해석이다. 어느 해석이든 간에 주목할 점은, 幸에 적극적인 의미의 기쁨이나 즐거움이 담겨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더 큰 고통의 회피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봐야 한다. 福도 재미있다. 示와 畐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示는 오늘날 사전적 의미로 ‘보이다’ ‘가르치다’라는 뜻이지만, 태생을 살펴보자면 ‘제단’을 나타내며, 가득 찰 ‘畐’은 본래 술단지를 나타내는 ‘酉’에서 변화한 것이란다. 말하자면 제의를 올리며 복을 빌었다는 건데, 고대로부터 이어진 제례에서 부족들이 바란 건, 대개 질병이든 천재지변이든 커다란 화를 입지 않고 무탈하게 살아가게 해 달라는 거였으니, 福 역시 적극적인 의미의 쾌를 추구한다기보다 소박하게 안녕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봐야 할 게다.


얼마 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가(늘 볼 게 정말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서비스 계약을 중단하지 않는 내가 한심하다),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먹어대는 프로그램이 나오길래 잠시 지켜봤다. 거기 등장하는 한 인물이 무언가 입 안 가득 베어 물고는 몇 번의 저작행위 후 꿀꺽 삼키더니 이렇게 말하는 거였다. “아, 행복하다.” 그이가 내뱉은 말을 유심히 들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에(혹은 더 오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회자되는 ‘행복’이라는 개념이 그이가 탄성처럼 쏟아낸 말과 맞닿아 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오늘날 ‘행복’은 욕망의 실현 및 쾌락의 획득과 깊이 연관돼 있다. 게다가 이때 욕망 실현에 대한 갈증은 타자가 소유한 욕망과의 비교를 통해 더욱 심화된다. ‘나’는 남들처럼 먹고 싶고, 남들처럼 여행 다니고 싶고, 남들처럼 부동산과 자동차를 소유하고 싶고, 남들처럼 성공하고 싶고, 남들처럼 자본을 축적하고 싶다. 맛집탐방과 인증은 내가 남들만큼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증거가 되고, 세계 곳곳을 누비며 이를 인증하는 일은 내가 남들만큼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징표가 되며, 주변에 공표할 수 있는 각종 수치들이 상승한다는 건 내가 자본주의 세상에서 남들만큼 ‘행복’존재로 자리 잡아간다는 보증이 된다. 남들이 하듯, 내가 바라는 만큼 살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가 원하는 만큼 욕망을 실현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내가 추구하는 만큼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지 못한다고 느낄 때, ‘나’는 불행하다.


이렇듯, 행복이 욕망의 실현에 따른 쾌와 락의 획득과 긴밀하게 연관될 때, 더 큰 고통과 재난을 회피함으로써 삶의 기본적인 안녕을 바란다는 의미의 행복이라는 개념은 별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또한, 후자의 경우, 행복이라는 것이 무탈하게 생을 생으로 이어가는 일 그 자체로 여겨진다면, 전자의 경우, 행복은 쟁취해야 할 대상이자 목적이 된다. 幸福에서 福은 상술했듯 제례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이란 것이, 간절히 바랄 수는 있으나, 우연적으로 주어지는 것이지 인위적으로 획득되는 것은 아님을 뜻하기도 한다.  해 동안 어디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일할 수 있게 해 달라는, 한 해 농사가 잘되어 추운 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게 해 달라는, 그렇듯 내게 ‘’을 내려달라는 염원에 대한 결과는 보장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더 큰 화를 입지 않아 다행이라는 의미의 ‘행’과 무사히 삶을 살아내게 해 달라는 염원을 담은 ‘복’이 만난 ‘행복’에 기필코 획득해야 할 욕망과 쾌락이라는 의미는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영어 happy의 어원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어 happ도 ‘행운, 우연한 사건, 기회’ 등을 뜻한단다. Happy란, 우연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의미인 셈이다. 그렇다고, 삶에서 아무런 일도 행하지 않은 채 넋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우연히 행복이 찾아들기도 한다는  아니다. 살아 있는 것의 의무이자 권리에 부합하게 삶을 살아내면서, 그 삶에 가급적 고난이 밀어닥치지 않게 해달라고, 무사히 삶의 강을 따라 흘러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할 수는 있지만, 그런 ‘좋은’ 일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이를테면 신의 가호나 자연의 섭리에 따라, 우연히 주어지는 것이라는 얘기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행복’ 철학을 논할 때 등장하는 에우다이모니아(εὐδαιμονία) 욕망이나 쾌락의 실현과는 거리가 멀다. ‘좋다’는 의미의 ‘에우’와 ‘신’이라는 의미의 ‘다이몬’이 합쳐져 형성된 이 개념은 ‘신의 뜻과 조화를 이룬 상태’로서,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가장 좋은 상태, 최고선 상태’를 의미한다. 따라서,  에우다이모니아적 행복이란, 쾌락의 획득에 따른 주관적 만족감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행해야 할 고귀하고 가치 있는 일의 실현이라는 실천철학과 맞닿아 있다. 신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최고선은 불변하는 종착점이 아니므로, 에우다이모니아란 고정된 상태가 아니라 최고선을 향한 도정 그 자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이란 바로 최고선에 이르기 위한 여정 그 자체에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에우다이모니아적 행복은, 말하자면, 수행으로서 행복인 셈이니, 단순히 삶의 안녕을 기하는 걸 넘어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삶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개념이라고도 볼 수 있다.


조금 멀리 왔는데, 다시 본류로 돌아가자. “행복하게 살고 싶어.”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 “행복하기를 바라.” 주체의 희망으로서 행복이든, 타자에 대한 염원으로서 행복이든,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추상성을 띠는 거라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게 대체 어떻게 살고 싶다는 것인지, 누군가의 행복을 바란다는 게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정량적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행복이란 본래 삶의 기본적인 안녕을 바라고 이를 ‘우연히’ 혹은 ‘다행히’ 누리는 데서 얻는 안도감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행복하게 살고 싶다’든가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는 바람에는 살아 있는 존재로서 살아 있기 위해 요구되는 최소한의 안녕에 대한 기대가 내재돼 있다고 봐야 할 게다. 그건, 인간의 존엄, 아니 생명체로서 존엄, 살아 있는 존재라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존엄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기본적인 안녕과 최소한의 존엄을 누린다는 의미의 ‘행’과 ‘복’은 추상적인 대신 보편적인 거라서, 개인, 아니 개체(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 주체)에게 동등하게 적용되고, 차별 없이 요구된다. 나라는 주체가 ‘다행히’ 무탈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라듯, 나를 둘러싼 모든 개체들(타자들)도 안녕과 존엄을 누리는 ‘다행스런’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러나, 이와 달리, 행복이 욕망이나 쾌락의 실현과 연관될 때,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바람은 보다 정량적인 구체성을 띠기 시작한다. ‘아, 저 아파트가 내 것이라면 참 행복할 텐데.’ ‘아아, 내게 10억이 있다면 참 행복할 텐데.’ ‘아아아, 내가 철마다, 해마다, 세계여행을 할 수 있다면 참 행복할 텐데.’ 아아아아, 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추상성을 띠는 행복보다, 이렇듯 구체성을 띠는 행복이 훨씬 접근하기 쉽고 손에 넣기도 쉬워 보인다. 정량적으로 수치화되고 물질화되는 거라서 행복을 획득하기 위한 목표를 설정하기도 쉬워 보인다. 그런가? 실상은 그렇지 않다. 욕망 실현으로서 행복은 중독물질과 유사한 작용기제를 갖고 있어서, 실현 후 행복감(실은 쾌감)이 급격히 감소하고, 더 큰 욕망을 실현하지 않을 경우 불안, 초조, 우울과 같은 부작용이 엄습해 온다. 매우 구체적으로 여겨졌던 행복이, 실은, 신기루였던 거다. 오아시스를 찾았다고 믿었을 때,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해 두 손 가득 물을 퍼올렸을 때, 샘은 다시 환영처럼 저만치로 멀어진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미 중독되었으므로, 이미 예속되었으므로, 신기루 같은 행복을 찾아, 욕망을 따라, 움직일 것이다.


생은 불행한가. 나는 잘 모르겠다. 오랜 시간 생이 휘청거렸고, 숱한 파도를 넘어왔으며, 앞으로도, 죽기 전까지, 쉽지 않은 생이 계속되겠지만, 아직까지는, 최소한의 존엄과 안녕이 위협받는 불행으로 점철된 적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대체로 다행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세상에는 바로 그 ‘최소한’이 위태로운 생이 있고, 생의 지점 곳곳에서 다행하지 못한 삶을 견디는 존재들이 있다. 행복한 삶을 논할 때, 행복하지 못한 삶을 논할 때, 사실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그렇듯 다행하지 못한 삶을 견디는 존재들에 대한 것이어야 하고, 기본적인 안녕과 최소한의 존엄으로서 행복에 대한 이야기여야 할 게다. 쾌와 락으로서 행복, 욕망의 실현으로서 행복이 득세할 때, 우리는 앞다퉈 불행해지느라, 본질에 있어서 다행하지 못한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진다. 다행한 삶으로서 행복이라는 보편성과 공동체성은 사라지고, 욕망의 획득으로서 행복을 향한 개체 간의 경쟁만 남게 되기 때문이다.


21세기가 시작될 즈음,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광고 카피가 대유행을 한 적 있다. 그건 마치, 욕망 실현으로서 행복 추구의 시대가 열릴 것임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그건 논리상 자기모순을 안고 있는 문구였다.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상, 아니 역사를 통틀어 그 어떤 체제에서도 ‘모두’가 부유해지는 일은 실현된 적 없었고, 앞으로도 실현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건 그저, 모두가 자본주의의 정량화된 행복 경쟁에 동참하라는 주문일 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당신은 불행해질 거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부자 되라는 주문이 횡행하던 시기에, 모 대선후보가 TV 연설에서 꺼낸 말도 인구에 회자되었는데, 내용인즉슨 이렇다.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물론, 당시 그 정치인이 말한 ‘살림살이’는 ‘가정경제상황’에 대한 것이었겠지만, ‘살림살이’란 사실 ‘삶을 꾸려 나가는 일 전반의 상태나 형편’을 의미하는 것일 테니, 본질을 따져보자면 ‘모두 삶이 안녕한지’, ‘모두 최소한의 안녕과 존엄을 지키며 살고 있는지’에 대한 물음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인가. ‘모두 부자 되세요’라는 주문이 아니라, ‘다들 안녕하신가요?’라는 물음 아닐까. 분명한 건, 모두 부자가 되는 건 불가능할뿐더러 꿈조차 꾸어 볼 수 없는 일이지만, 다들 안녕한 삶을 사는 건 언뜻 불가능해 보여도 꿈꾸어 볼 수는 있는 일이라는 거다. 물론 그러자면, 각자, 욕망을 쏘아보던 시선을, 삶과 존재를 향한 너그러운 눈길로, 돌려놓아야 할 테지만 말이다.


당신은 안녕한가. 나는, 당신이, 당신의 삶이, 오늘, 안녕하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떠도는 영혼은, 끝내 떠돌 수밖에 없음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