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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Mar 07. 2024

봄은 죽음을 돌아보기 좋은 시절,

2024년 3월 7일, 마지막 눈 혹은 첫눈, 0도~2도

3월 7일이라서, 죽은 시인을 생각하며 낡은 시집을 뒤적이고 있는데, 뜬금없이, 눈이 내린다. 이틀 전 경칩에 눈을 뜬 개구리들이, 혹 때를 잘못 안 것 아닌가 당황할 듯도 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이곳 바닷가 마을에는 3월에도 곧잘 눈발이 날린다. 끝 모를 바다와 거대한 산맥 사이에 있는 탓이다. 지지난해에는 만개한 매화 위로 소복이 눈이 덮이기도 했다.


한겨울에는 눈길 걱정에 전전긍긍하느라 눈 내리는 하늘을 제대로 올려다보지도 못했는데, 오늘에야, 쏟아지는 눈을 가만히 응시한다. 지난 시절의 마지막 눈일까, 새로 오는 시절의 첫눈일까. 첫눈인 게 좋다. 어쩐지, 봄을 축복해 주는 것 같으니까. 곧 춘분이 되면, 밤은 다시 낮에게 좀 더 자리를 내어줄 것이고, 으쓱해진 낮은 한껏 두 팔을 벌리며 저를 뽐내겠지. 그러면, 정말, 봄이 시작되는 것이다.


늘 춘분이 되어야 비로소 봄이 시작되는 것 같았고, 추분이 되면 겨울이 멀리 있지 않다고 느꼈다. 빛과 어둠이 서로에게 잠식당하기 전,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는 두 날은 엄숙하고 장엄하게 여겨지기까지 한다. 춘분 일출 무렵, 동쪽으로부터 서서히 어둠을 갉아먹는 하늘을 바라보라. 밤의 야윈 뺨을 어루만지다가 슬며시 밀어내는, 낮의 얄궂은 민낯을 느껴보라. 개나리 같은 봄이 거기서부터 시작될 테니까.


경칩으로부터 춘분으로 가는 길목, 봄눈이 나풀나풀 아름답게도 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에 봄의 씨앗이 새겨져 있는 건 아닌지, 그리하여, 지상에 당도하자마자 죽어버리는 그것이, 마침내 봄으로 피어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다가, 눈의 죽음이 봄의 탄생으로 이어진다는 게, 죽음으로 생을 축복한다는 게, 조금 서글퍼졌다. 하지만 어쩌랴. 봄은 죽음을 돌아보기 좋은 시절이고, 죽음은 생을 피워내기 좋은 거름인 것을. 곧, 눈이 그칠 듯하다.




눈[雪]은
숲을 다 빠져나가지 못하고
여기저기 쌓여 있다.

“자네인가,
서둘지 말아.”
쿵, 그가 쓰러진다.
날카로운 날[刃]을 받으며.

나는 나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온다
홀로 잔가지를 치며
나무의 침묵을 듣는다.
“나는 여기 있다.
죽음이란
가면을 벗은 삶인 것.
우리도, 우리의 겨울도 그와 같은 것”

우리는
서로 닮은 아픔을 향하여
불을 지피었다.
창 너머 숲속의 밤은
더욱 깊은 고요를 위하여 몸을 뒤채인다.
  
내 청결한 죽음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부재할 것이다.
타오르는 그와 아름다운 거리를 두고
그래, 심장을 조금씩 덥혀가면서.

늦겨울 태어나는 아침은
가장 완벽한 자연을 만들기 위하여 오는 것.
그 후에
눈 녹아 흐르는 방향을 거슬러
우리의 봄은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_ 기형도, <겨울·눈·나무·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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