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식목제 Mar 11. 2024

내게 깃든 ‘말들의 풍경’

혹은, 마음의 지도를 형성한 낱말들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숨죽이고 있는, 오래된 책들을 물끄러미 훑어보다가, 문득 고종석의 《말들의 풍경》이 눈에 들어와 꺼내든다. 자리를 잡고 앉아 펼쳐보니, 생전 처음 보는 글 같다. 너무 오래전에 읽은 탓이다. 그중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에세이에서 멈춘다. 왕성하게 집필하던 시절, 한국어를 아름답게 구사하는 필자로 손꼽히던 그이인지라 유심히 살펴본다. 2006년에 쓴 이 에세이에서, 그는 ‘마흔일곱 해 동안 한국어를 써온 한 남자에게 가장 아름답게 들리는 낱말 열 개’라고 밝혔는데, 본래 신문지상에 연재했던 글들을 모아놓은 이 책에서는 뒤에 이런 말을 덧붙였다. “신문 글은 대체로 서둘러 쓰게 마련이다. 이 글도 예외는 아니어서,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를 내가 평소에 꼽아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마감 직전에 주제를 정하고 나서 궁리한 끝에, 낱말 열 개를 순식간에 골라냈을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골라낸 낱말들은 이렇다.


가시내, 서리서리, 그리움, 저절로, 설레다, 짠하다, 아내, 가을, 넋, 술


책으로 엮을 때, 뭔가 아쉬움이 느껴졌는지, 자신이 아름답다고 여기는 우리말 가운데 놓친 게 여럿 있다며, 그중 ‘그윽하다’가 떠오른다고 덧붙였다. 만약 ‘그윽하다’를 열 낱말 목록에 넣으며 하나를 제외해야 한다면, ‘술’을 빼야겠다면서 말이다.


사실, 고종석이 애초 이 주제를 떠올린 건 김수영이 진작에 쓴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 열 개>라는 에세이 때문이다. 김수영은 하루 종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던 어느 저녁, 심심풀이로 초고들을 들춰보다가 이 에세이를 썼다고 밝힌다. 사실, 이 에세이에서 김수영은 ‘아름다운 낱말 열 개’에 방점을 두고 있다기보다, 1960년대 현실에서 ‘언어’와 ‘언어의 쓰임’에 대한 고민과 성찰을 풀어놓고 있다.


모든 언어는 과오다. 나는 시 속의 모든 과오인 언어를 사랑한다. 언어는 최고의 상상이다. 그리고 시간의 언어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잠정적인 과오다. 수정될 과오. 그래서 최고의 상상인 언어가 일시적인 언어가 되어도 만족할 줄 안다.


김수영이 이런 생각을 이끌어낸 것은, 자신의 시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제3인도교(第三人道橋)’가 실은 ‘제2인도교’를 잘못 쓴 것이라는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나아가, 또한 그는 <거대한 뿌리>에 나오는 구절 “요강, 망건, 장죽, 種苗商, 장전, 구리개, 약방, 신전, 피혁점, 곰보, 애꾸, 애 못 낳는 여자, 無識쟁이, 이 無數한 反動이 좋다”를 떠올리는데, 조상들의 상상력으로 꾸며진 이 낱말들이 사회적으로 점차 사멸되어 가고 있다면서, “따지고 보면 우리말은 소생하는 말보다 없어져가는 말이 더 많다”고 덧붙인다. 언어의 회전이 점점 빨라져서 기존의 언어가 생경해지는 현실도 지적한다. 이를테면 ‘바랭이풀’은 많이 보는 풀이지만, 막상 글 속에서 쓰려고 하면 어쩐지 ‘서먹서먹하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개똥지빠귀’라는 새 이름도 그렇다면서, 그럼에도 그는 이렇게 “실감이 안 나는 생경한 낱말들을 의식적으로 써볼 때가 간혹 있다”고 말한다.


실감이 안 나는 생경한 낱말들을 의식적으로 써볼 때가 간혹 있다. 제3인도교의 과오를 저지르는 식의 억지를 해보는 것이다. 이것은 구태여 말하자면 진공(眞空)의 언어다. 이런 진공의 언어 속에 어떤 순수한 현대성을 찾아볼 수 없을까? 양자가 부합되는 교차점에서 시의 본질인 냉혹한 영원성을 구출해 낼 수 없을까?


그이가 자신에게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말들을 열거한 것도 이런 맥락 위에 있을지 모르겠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들어온, 익숙하고 친근한 말들, 하지만 이제는(김수영 시점에서) 더 이상 잘 쓰이지 않는 말들이었을 게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말들은 아무래도 내가 어렸을 때에 들은 말들이다. 우리 아버지는 상인이라 나는 어려서 서울 아래대의 장사꾼 말들을 자연히 많이 배웠다. ‘마수걸이’, ‘에누리’, ‘색주가’, ‘은근짜’, ‘군것질’, ‘총채’ 같은 낱말 속에는 하나하나 어린 시절의 역사가 스며 있고 신화가 담겨 있다. 또한 ‘글방’, ‘서산대’, ‘벼룻돌’, ‘부싯돌’ 등도 그렇다.
* 아래대 _ 장사꾼들이 말하던, 동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지역. 맞은편 서울 서북 지역은 ‘우대’.(고종석의 설명을 인용.)


김수영과 고종석이 꼽은 낱말들이 확연히 다르다는 데서 알 수 있듯, 또한 고종석이 지적했듯, 가장 아름다운 우리 말이란 ‘세대(와 출신지역과 계급)에 따라, 더 나아가 개인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고종석은 이렇게 설명한다. “요즘 젊은 세대라면, 설령 이 말들의 의미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름다움을 느끼는 단계로 건너가기 위해 포착해야 할 뉘앙스를 도무지 잡아낼 도리가 없을 것이다. (…) 그래서 아름다운 말의 기준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실은 김수영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향수 어린 말들은, 현대에 있어서 아름다운 것의 정의가 바뀌어지듯이, 진정한 아름다운 말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 것을 아무리 열거해보았대야,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 되지는 않고,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미학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 고작이다.


나로서는, 김수영이 고민했듯, 진공의 언어 속에서 어떤 순수한 현대성을 찾고, 시의 본질인 냉혹한 영원성을 구출하는 것으로서 언어의 사용을 도모할 주제는 못 될 듯하다. 개인은 공동체, 혹은 사회 내의 모든 구성원들과 공유하는 언어, 보편적 언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 자주, 오직 자기 자신만 감각하는, 그리고 소수만 공감하는, 주관적 언어의 세계에서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아름다움을 길어 올릴 수 있는 건, 김수영이 지적한 ‘개인적인 취미나 감상’밖에 되지 않는, ‘보편적인 언어미가 아닌 회고미학’에 불과한 언어로부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렇다고 회고미학으로서 언어가 완전히 개인의 틀 안에 갇혀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보편적 언어와 주관적 언어의 영역이 완전히 분리되어 서로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고, 교집합을 이루는 경우도 많으며, 교집합을 이루는 것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혼재한 채 공존·공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진공의 언어에서 현대성을 찾는다’는 그의 말에는, (그가 알았든 몰랐든) 회고미로서 언어와 보편적 아름다움으로서 언어가 모두 혼재된 시공간으로서 현재에 대한 의식이 담겨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바랭이풀도, 개똥지빠귀도, 마수걸이도, 에누리도, 군것질도 그렇다. 그런 낱말들은 김수영 이전 시대에도, 김수영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쓰이면서, 시공간을 넘나들며 회고미와 보편미를 모두 아우르고 있다.


고종석이 꼽은 ‘그리움’ 같은 낱말도 마찬가지다. 그에게 ‘그리움’은 ‘결핍’과 ‘부재’에 따른 정서적 효과로서 ‘그리움’이다. 사랑의 부재, 사랑의 결핍이다. 내 경우, ‘그리움’이라는 명사보다는 ‘그리다’라는 형용사에 더 마음이 끌린다. 물론 ‘사랑하는 마음으로 간절히 생각’한다는 사전적 의미는 통하겠지만, ‘그리다’가 내게 가져다주는 느낌은 훨씬 다채롭고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리다’에서는 결핍과 부재를 넘어선, 보다 동적인 꿈과 희망이 느껴진다. 자세한 이야기는, 일단 여기서는 각설하기로 하고, 이렇듯 ‘그리움’은 개인의 주관적 감상의 영역에서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보이며 다르게 감지되지만, 그 언어를 관통하고 있는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정서는 시공간을 초월해 맞닿아 있다. 김수영이 말하는 그리움과, 고종석이 말하는 그리움과, 내가 말하는 그리움은, 완전히 다른 우주에 있는 게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움’은 언제나 현대성을 지닐 것이다.


고종석과 김수영의 에세이를 읽으며, 내가 아름다운 우리말을 열 개 꼽는다면 어찌하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일상언어에서, 내가 말로든 글로든 흔히, 아무렇지 않게 잘 쓰는 말이어야 한다는 거였다. 어느 책에서 읽은 말, 혹은 사전을 뒤적여 찾아낸 말이 아니라 말이다. 물론 책에서 읽었든, 사전에서 찾았든,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자신의 입말이 되고 글말이 되어 일상언어로서 자주 쓰인다면 괜찮겠지만, ‘아름다운 우리말’을 꼽아보라는 과제 앞에서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아닌, 억지로 궁리한 말은 아니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던 거다. 이를테면, ‘볕뉘’ 같은 낱말은 참 아름답지만, 내가 언제나 일상언어로 쓰는 말이 아니다.(물론 다른 이들 중에는 일상언어로 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추리다 보니, 나라는 사람의 언어가 그리 풍성하지도, 다채롭지도, 그럴듯하지도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가장 아름다운 말’까지는 아니고, 그저 내게 가장 마음이 쓰이는 말 정도를 떠올려볼 수 있었다. 그 맨 앞에, 앞서 언급한 ‘그리다’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다, 에다, 보듬다, 사랑하다, 삶, 밥, 마음, 아름다움, 슬픔, 얼굴


물론, 고종석처럼, 나중에 아차 싶은 마음이 들며, 다른 낱말이 생각날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때, 아무렇지 않게, 슬쩍 바꿔 넣으면 된다. 먼저 자리한 하나를 빼고 싶지 않다면 그냥 더 넣어도 되겠지. 꼭 열 개여야만 하는 건 아니니까. 당신도 해보겠는가. 재미있을 것이다. 어쩌면 서글퍼질지도 모른다. 내 마음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일이기도 하니까. 생각나는 말들이 너무 많다면, 품사별, 주제별로 꼽아봐도 좋겠다. 그리 확장할 수 있다면, 나는 ‘가뭇없이’를 바로 떠올릴 수 있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막막함과 아득함을, 나는, 좋아한다. ‘문득’도 자주 쓰는 말 아니던가. 난, ‘문득’이 품고 있는 이중성을 좋아한다. 그 말에는 우연성과 필연성이 혼재돼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느닷없이 찾아오는 운명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문득, 오래된 책이 눈에 들어와 이 글을 썼다. 문득, 이 글을 쓰다가, 내가 그리던 시간과 공간과 존재를, 떠올린다. 그 시간과 공간과 존재의 얼굴에 서린 아름다움과 슬픔도 더듬는다. 아름다움과 슬픔이 뒤섞인, 삶과 밥 사이에 놓인 마음, 사랑하지 못해 에인 마음을 보듬는다.


덧 1) 왕성하게 집필하던 시기를 지난 이후의 고종석의 행보에 대해 최근에야 알게 됐다. 그리 아름답지 못했다. 허나, 여기서는 논외로 했다.
덧 2) 내게 가장 마음이 쓰이는 말 열 개를 골라놓고 보니, 언제 기회가 되면, 그 말들의 풍경에 대해 써봐야겠다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당신은 안녕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