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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Mar 26. 2024

피는 꽃을 보며, 지는 꽃을 먼저 떠올리는 봄날이야

2024년 3월 26일, 비 내리다 눈 내리다 비,  1도~6도

춘분에 눈이 내려 적이 당황했는데, 그로부터 한 주가 다 되어 가는 날 내리던 비가 또 눈으로 바뀌는 걸 보며, 아직 겨울이 끝나지 않은 건가 자문하다가, 문득 깨달았어. 아차, 지지난해에도 매화가 필 무렵 눈이 내렸더랬지. 마침 마당 매실나무가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지 한 이틀 지난 참이야. 그럼 그렇지. 꽃 피는 봄을 시샘하는지 축복하는지 알 길 없는 눈이 한 번 내려야, 이곳에서는 정말 봄이 오곤 했지. 이제, 곧, 바람이 불겠지. 4월의 광풍이 찾아오면, 이곳 사람들은 비로소 봄이 되었음을 실감할 거야.


서늘하고 시린 3월이었어. 이렇게 차가운 3월이 또 언제 있었던가, 잘 기억나지 않아. 어쩌면 기억을 잃어가는 건지도 모르겠어. 족히 수십 년은 되었을 어느 봄날 햇살의 감각은 또렷이 기억되지만, 한 해 전, 두 해 전 봄날의 감각은 잘 기억나지 않거든. 늙어가는 일이라는 게 그런 것인지도 몰라. 멀리 있는 기억보다 가까이 있는 기억을 더 쉽게 놓치는 것. 가까이 있는 기억보다 멀리 있는 기억이 더 빈번하게 가슴을 헤집는 것. 멀리 있는 봄의 기억으로 인해, 오늘의 봄이 낯설게 느껴져. 벌써부터, 더 낯설어질 내년 봄을 떠올리다가, 몸서리를 치곤 해.


며칠 전에도 비가 내렸어. 비 그친 뒤 개인 하늘은 오랜만에 참 청명해서, 밤하늘의 별들도 제법 또렷하게 빛을 내더라. 허나, 시골이라 여긴 이곳에서도 별들은 거리를 둔 채 점점이 반짝일 뿐. 문득, 어린 시절, 소양강의 한 작은 섬에서 보내던 밤을 기억해 냈어. 밤하늘을 온통 하얗게 수놓고 있던 별빛들, 그 사이를 순식간에 가로지르던 별똥별, 그리고 은하수를 향해 신호를 보내듯 기기묘묘한 화음을 만들어내던 수십 수백 마리의 두꺼비들. 우리는 그것이 머지않아 잃어버릴 밤하늘이라는 것도 모른 채, 황홀한 그 광경을 넋 놓고 바라보기만 했지. 두꺼비들은 알고 있었을까. 우리의 밤이 빛을 잃어가리라는 걸. 실은, 빛을 잃은 게 밤하늘만은 아니야. 은하수를 올려다보던 우리의 눈빛도 흐려졌는 걸. 두꺼비들은 알고 있었을까. 우리의 생이 빛을 잃어가리라는 걸.


은하수를 육안으로 볼 수 있던 나날, 보름이 되면 우리는 어김없이 달에 사는 토끼를 눈으로 좇곤 했어. 저것 봐, 토끼가 보여, 토끼가 방아를 찧는 모습이 보이지 않아? 호들갑을 떨며, 서로 동의를 구하곤 했지. 그런 밤이면, 우리는 흥에 겨워 ‘푸른 하늘 은하수’* 노래를 부르며 손뼉치기 놀이를 하곤 했어.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에,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가기도 잘도 간다 서쪽 나라로.” 하필, 왜 서쪽 나라였을까. 손바닥을 부딪치며, 손바닥 부딪는 속도를 높이며, ‘처음 펴보는 부챗살’**처럼 까르르 웃으며, 우리는, 서쪽 나라 같은 건 마음에 두지 않았거든. 결국, 서쪽 나라에 가 닿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더라면, 그저, 부챗살이 하나 둘 꺾여 나가리라는 걸 알았더라면, 우리는 달에 사는 토끼 따위 그리지도 않았을 텐데.


오늘은 춘분 지난 3월 26일, 음력으로는 보름을 지난 2월 17일이야. 달의 겨울이 이지러지고 있어. 그믐 지나 다시 달이 찰 때, 정말 봄이 온다더라. 그래? 그러면 나는, 가장 먼저 봄의 보름달을 기다릴 테야. 다음 보름이 오면, 달을 올려다볼까? 달에 사는 토끼에게 물어볼까? 아직, 서쪽 나라로 가지 않았느냐고. 어찌하여, 서쪽 나라로 가지 못했느냐고. 뜻 모를 슬픔이 자꾸만 넘쳐흐르는 봄날이야. 피는 꽃을 보며, 지는 꽃을 먼저 떠올리는 봄날이야.


* 이 노래의 원제목은 <반달>이다. 가사에 ‘반달’이 나오지 않아 흔히 ‘푸른 하늘 은하수’가 제목인 것으로 착각한다. 가사의 ‘하얀 쪽배’가 바로 ‘반달’을 의미한다.
** 처음 펴보는 부챗살 _ 이성복, <소녀들>, 《그 여름의 끝》에서 인용.



춘분에 내린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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