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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Jul 11. 2024

생의 낯빛에서 무엇을 보았나,

낯빛을 잃기 전에,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_ 장 그르니에, <케르겔렌 군도>, 《섬》




한쪽 면과 반대쪽 면, 보이는 면과 가려진 면이다. 그러니까, 달의 ‘앞면’과 ‘뒷면’이 아니라는 얘기다. 보름이 오면 환하게 차오르는 달의 맨 얼굴, 그 너머에는 달의 뒤통수가 있는가. 아니다. 거기에도 달의 맨 얼굴이 있다. 이 별의 지상을 내려다보는 얼굴과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또 하나의 얼굴, 달은 그렇듯 두 얼굴을 지녔으니, 말하자면 로마 신화의 야누스에 비견할 만한다. 야누스는 문을 지키는 신으로 여겨졌고, 시작을 의미함과 동시에 끝을 의미하기도 했다. 야누스에서 비롯된 ‘january’는 한 해의 시작을 뜻하기도 하지만, 한 해가 끝났음을 뜻하기도 한다. 이전 해에서 그다음 해로 나아가는 ‘문’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야누스가 양쪽으로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건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늘 한쪽 얼굴만 보고 있는 달도 그러하다. 달에게는 ‘두 얼굴’이 있다. 달이 두 얼굴을 지니고 있는 건, 그 역시 ‘문’이자 ‘문지기’이기 때문이다. 달은 지구라는 작고 보잘것없는 행성과 끝 모를 우주 사이에 놓인 문인데, 이를 미처 알지 못하는 인간은 그를 지구에 딸린 ‘위성’이라 지칭한다. 위성을 뜻하는 ‘satellite’는 무언가에 ‘종속되어’ 있음을 뜻한다. 달이 문지기라는 걸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과학적인 사실에 기초해 달이 지구에 미치는 막대한 영향을 고려한다면 그를 그저 지구에 종속된 존재로 규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아, 위대한 문지기여.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얼굴이여. 지상에서 꼬물거리는 이 미천한 짐승들의 몰이해를 노여워하지 말아 주오. 나는 은하수 저편을 응시하는 그대의 얼굴을 보고 싶소. 가려진 그대의 얼굴이 말하는 이야기를 듣고 싶소.


허나, 난 끝내 달의 진짜 이야기를 들을 수 없을 게다. 그의 반대쪽 얼굴에 가 닿을 일 없을 것이고, 설령 다른 무슨 계기로, 간접적으로라도, 우주를 향해 있는 그의 얼굴을 엿볼 기회가 생긴다 한들, 그가 응시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가 칠흑 같은 어둠 너머로 맞닥뜨리고 있는 게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구를 향해 있는, 그리하여 내 두 눈과 조우하는, 이지러졌다 차오르곤 하는, 차올랐다 이지러지곤 하는 그의 환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도, 결국 내 마음의 지평을 넘어선 그 무엇도 읽어낼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다른 얼굴에서도 심연의 우주와 소통하는 진짜 이야기가 아닌, 내 마음의 파편밖에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장 그르니에는 <케르겔렌 군도>에서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라고 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늘 목도하게 되는 다른 한쪽 면, 즉 ‘보이는 쪽’이 온통 거짓이고 하찮은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게다. 다만, 보이지 않는 삶의 이면, 존재의 이면에 대한 이해가 수반되지 않을 경우, 우리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그 누구에 대해서도 온전히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울 거라는 얘기다. 사실을 말하자면, 보이는 쪽에 대해서도 우리는 오해하거나 곡해하기 일쑤다. 태양을 중심으로 한 지구와 달의 공전에 대해 알지 못하던 때에, 상현에서 하현까지, 그믐에서 보름까지, 달의 낯빛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저 달이 스스로 제 얼굴을 바꾸는 거라 믿었다. 카를로 로벨리가 지적했듯 ‘사물의 속성이란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걸 알지 못한 채 말이다. 그렇다면, 달과 지구와 태양의 상호작용을 알고 있는 지금, 우리는 달의 ‘보이는 쪽’에 대해 모든 것을 제대로 알고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게다. 여전히 우리는 달의 보이는 쪽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알고 있다.


내 경우, 그르니에의 문장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가려진 쪽’이라고 말하기보다, ‘가려진 쪽’과 ‘보이는 쪽’과 ‘보이는 쪽에서 미처 읽어내지 못한 측면’을 모두 고려하지 않으면, 삶에 대해서도, 존재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게 더 타당해 보인다. 그런 까닭에, 보이는 쪽과 가려진 쪽이라는 개념보다, 두 얼굴을 지닌 문지기 야누스로서 삶과 존재라는 개념에 더 마음이 끌린다. 달은 양쪽으로 열린 문, 우주와 지구의 연속선상에 있다. 지구를 배제한 달도, 심연의 우주를 배제한 달도 상상하기 어렵다. 사족을 붙이자면, 문지기 달을 곁에 두지 않은 지구도 그리 살 만한 행성은 아닐지 모른다.


시간의 측면에서도, 존재의 측면에서도, 삶은 양방향으로 열린 문이자, 양방향을 응시하는 야누스와 같다. 시시각각 다음 지점으로 자리를 옮기는 ‘지금 이 순간’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의 문지방에 서서 지나간 시간과 다가올 시간을 바라보며, 이를 통해 삶의 현재를 해석한다. 또한 우리는 외부 세계를 응시하는 자기 존재와 내부 세계를 응시하는 자기 존재라는 두 얼굴이 등을 맞대고 있는 야누스로서 존재한다. 존재의 야누스적 면모는 내부 세계와 외부 세계를 향한 얼굴이라는 범주로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라, 존재가 세계와 맞닥뜨릴 때 기꺼이 드러내는 측면과 의식적으로 감추는 측면이라는 이중성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사실, 그르니에가 <케르겔렌 군도>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이 부분이었다.


나는 혼자서,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낯선 도시에 도착하는 것을 수없이 꿈꾸어 보았다. 그러면 나는 겸허하게, 아니 남루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렇게 되면 ‘비밀’을 간직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비밀과 가난 속에 은신할 때, 우리는 ‘겸허함을 통해 영감을 얻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누구에게나 굳이 말할 ‘필요 없는’, 혹은 말할 ‘수 없는’ 삶의 이야기들이 있다. 혹은 감추고 싶은, 말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일 수도 있다. 그르니에는 내밀하게 감추어진 것들, 거기에 삶의 본질, 존재의 본질이 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나는 그가 지적한 ‘비밀 이야기’를 삶과 존재의 양면성(혹은 이중성)에 포함시키는 데 동의하지만, 거기에 전적인 본질이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보이지 않는 달의 다른 쪽 얼굴에 그의 본질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달 이야기는, 우리가 보는 그의 얼굴과 보지 못하는 얼굴, 그리고 우리가 보면서도 미처 읽어내지 못하는 측면을 모두 고려할 때 좀 더 온전히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달의 이면은, 그가 비밀스럽게 감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로서 나의 한계로 인해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 누구도 다른 존재를, 타자를 온전히 보지 못한다.


우주를 향해 열려 있는 얼굴과 지구를 내려다보는 얼굴을 지닌 야누스로서 달, 그런 달로서 나를, 존재를 생각한다. 저 멀리 태양빛을 응시하며, 때로는 지구가 드리우는 그림자를 받아내며, 대기와 빛과 바람이 만들어내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삶의 형상들을 내려다보며, 상현에서 하현까지, 보름에서 그믐까지, 명멸하는 시간을 낯빛으로 체화했던 얼굴과,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하며, 시간 너머, 존재와 부재가 혼재한, 의미와 무의미가 뒤섞인, 심연의 우주 앞에서 할 말을 잃은 채, 굳게 입을 다문 얼굴. 지상의 소란과 우주의 침묵 사이에 선 문지기로서 두 얼굴. 문지기의 소명은 양방향을 모두 살피며, 문지기로서 그 자리를 지키며 서 있는 것. 존재에게 삶이란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시지프의 바위 밀어 올리기도 그런 것일지 모른다. 시지프는 고통스럽게 바위를 밀어 올릴 때 지상의 소란을 체화할 것이고, 산 아래로 걸어 내려갈 때 시간 너머 칠흑 같은 어둠을 응시할 것이다. 운명을 받아들인다는 건, 지상의 소란을, 삶을, 칠흑 같은 어둠을, 죽음을 모두 끌어안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상현에서 하현까지, 보름에서 그믐까지 끊임없이 반복되는 생으로서 달이 아니라, 단 한 번 차올랐다 검게 사라지는 생으로서 달을 생각해 본다. 내가 그런 달이라면, 나는 지금 하현으로 가는 달, 혹은 그믐으로 가는 달. 어느 날 불현듯, 혜성과 충돌하거나 지구로 추락하거나 태양이 폭발해 집어삼키지 않는다면, 그믐의 소멸을 기다리게 될 달. 그때 우주와 지상을 연결했던 문은 닫힐 것이고, 문지기로서 소명도 끝날 것이다. 어쩌면, 문이 닫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열리는 것일지도 모를 일. 과거와 미래, 존재와 부재,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무’로 돌아가는…. 나는 당신의 낯빛에서 무엇을 보았나. 당신은 나의 낯빛에서 무엇을 보았나. 생의 낯빛을 잃기 전에….




저 달이 걸어오는 밤이 있다

달은 아스피린 같다

꿀꺽 삼키면 속이 다 환해질 것 같다

 

내 속이 전구알이 달린

크리스마스 무렵의 전나무같이 환해지고

그 전나무 밑에는

암소 한 마리

   

나는 암소를 이끌고 해변으로 간다

그 해변에 전구를 단 전나무처럼 앉아

다시 달을 바라보면

     

오오, 달은 내 속에 든 통증을 다 삼키고

저 혼자 붉어져 있는데, 통증도 없이 살 수는 없잖아,

다시 그 달을 꿀꺽 삼키면

암소는 달과 함께 내 속으로 들어간다

    

온 세상을 다 먹일 젖을 생산할 것처럼

통증이 오고 통증은 빛 같다 그 빛은 아스피린 같다

이렇게 기쁜 적이 없었다


_ 허수경, <달이 걸어오는 밤>,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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