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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식목제 May 28. 2024

삶이라는 바위를 밀어 올릴 때,

‘그의 운명은 그의 것’, ‘그의 바위는 그의 것’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시지프의 소리 없는 기쁨은 송두리째 여기에 있다. 그의 운명은 그의 것이다. 그의 바위는 그의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부조리한 인간이 자신의 고통을 응시할 때 모든 우상은 침묵한다. 문득 본연의 침묵으로 되돌아간 우주 안에서 경이에 찬 작은 목소리들이 대지로부터 무수히 솟아오른다.
_ 알베르 까뮈, <시지프의 신화> 중




바위를 밀어 올린다. 어쩌면 다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걸어 내려가는 중일 수도 있다. 사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은 등을 맞대고 있고, 때로는 서로 중첩되어 있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느 날에는 바위를 밀어 올리며, 터덜터덜 산 아래로 내려가는 나를 만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에는 속절없이 하산하는 길에, 온몸으로 바위를 지탱하며 진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만나기도 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볼 때, 당신은 정녕 저 ‘위’를 올려다보고 있는가. 실은 그곳이 ‘아래’는 아닌가. 이 별의 위쪽은 어디인가. 저 우주에, 삼라만상에, 위와 아래가 있는가. 어디가 위이고, 어디가 아래인가. 위와 아래는 별개인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길과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내려가는 길은 다른 것인가. 삶과 죽음이 하나이듯, 산을 오르는 길과 내려가는 길도 하나는 아닌가.


카를로 로벨리는 저서 《나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서 “양자론의 발견이란 ‘사물의 속성은 그 사물이 다른 사물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의 발견’이라고 생각한다”면서 “사물의 속성은 다른 사물과의 상호작용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썼다. “속성은 대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과 대상 사이에 놓인 다리”이며, 우리는 “대상의 속성을 그 속성이 나타나기 위해 상호작용하는 대상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 삶의 관점으로 확장시키면 어떤가. 삶의 속성은 무엇인가. 존재의 속성은 무엇인가. 시지프와 바위, 바위와 산, 바위를 기어코 굴러 떨어지게 만드는 중력,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지프의 두 다리를 잡아당기는 힘과 이를 이겨내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시지프를 기억하라. 삶과 존재의 속성은 각 사물들과 현상들의 상호작용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에, 기실, 의미란 없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삶에는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어서, 자칫 무의미에 천착하기 쉽고, 그러다 보면 삶 자체를 부정하거나 외면하고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일 수도 있다. 허나, 무의미에 매달릴 필요는 없다. 그건 ‘없는’ 것을 움켜쥐려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과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무의미에 매달린다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의미에 목을 맨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우상’을 만들기로 하는 이들도 있다. 그 정도의 자유의지는 허용되어도 괜찮을 게다. 물론 시지프라면, 당신이 시지프라면, 그런 선택을 하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보다 시지프는, 당신은, 의미와 무의미에 현혹되기보다, 그저 바위를 밀어 올릴 것이다. 삶이라는 고통을 감내하기로 하는 것인데, 보다 중요하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삶을 살아내기로, 그토록 부조리한 삶을 견뎌내기로 하는 것이다. 밀어 올려야 할 바위가 거기 있기 때문이고, 중력이 두 다리를 잡아당기기 때문이고, 밀어 올린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가 언제 어디서 끝날지는 알 수 없다. 밀어 올리던 바위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압사당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산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내려다보다 혼절하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고, 느릿느릿 산 아래로 걸어 내려오다 발을 헛디디는 것으로 끝날 수도 있다. 산기슭에서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려 양다리에 힘을 잔뜩 주다가 돌연 심장이 멎는 것도 가능하겠다. 어느 것이라도 가능하고, 어느 것이라도 괜찮다. 이 이야기에 그럴듯한 결말은 있을 수 없으니까. 나아가, 사실을 말하자면, ‘의식’이 깨어 있는 자로서 인간이 존재하는 한, 시지프의 신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개별 서사로서 시지프의 이야기는 완료될지 몰라도, 부조리한 생의 고통을 응시하고 이를 멸시로 응수하는 시지프의 신화는 인간 종 전체가 절멸하기 전까지 계속될 거라는 얘기다.


바위를 밀어 올리는 순간에는 별다른 사념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그를 지배하는 것은, 전적으로, 생의 고통이다. 더욱이 이 고통에는 머지않아 모든 것이 완결되리라는, 곧 이 고통이 끝날 거라는 전망이 내재되어 있지 않다. 그가 알고 있는 것은 단 하나, 바위는 다시 지상으로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점, 그리하여 다시 무의미한 바위 밀어 올리기를 재개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겨야 한다는 점이다. 산을 내려가며, 그가 생각하는 것은 부조리한 삶 그 자체다.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우상에게 도피함으로써 부조리를 부정하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는다. 삶이라는 운명을 외면할 수 없다는 무력감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내기로, 다시 바위를 밀어 올리기로 한다. 이때 비로소, 시지프는 운명에 지배당하는 자가 아니라, 운명을 제 것으로 삼는, 운명에 굴종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에 맞서는 존재가 된다.


때로는, 산들바람이, 산을 내려가는 시지프의 뺨을 어루만진다. 운명의 바위를 따라, 산등성이를 넘어온 바람은, 운명의 바위와 맞서느라, 과열된 그의 몸을 식혀줄 게다. 그러면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바람을 만질 것이고, 그 바람결에는 저기 어디쯤에서 수줍게 피어난 들꽃의 향기가 실려 올 때도 있을 것이다. 향기를 잡아보려 걸음을 옮기던 그는, 무심코, 산 중턱을 휘감아 흐르던 구름을 움켜쥔다. 손가락 마디마디,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하이얀 수증기의 모호한 감촉을 느끼며, 그는 중얼거린다. “너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삶이란, 존재란, 본디 그런 것이구나. 그런 것이었구나.” 뇌까릴 때, 구름이 걷히고, 한껏 날갯짓하는 새들과, 정신없이 풀을 뜯는 짐승들과, 그들 사이를 강처럼 흐르는 돌멩이들과, 돌멩이들 틈을 비집고 흘러 내리는 물줄기가 눈에 들어온다. 운명의 산에 함께 존재하는 것들, 그들에게 말한다. “너희들도 신기루더냐. 그럼에도, 너희가 있어 다행이다.”


어쩌면 시지프는 생텍쥐페리의 《야간비행》에 실린 한 구절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리비에르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긴장된 두 팔로 굉장히 무거운 짐을 들어 올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것은 휴식도 희망도 없는 노력이었다. (중략) 그는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을 늙어서 ‘시간이 날 때’로 조금씩 밀쳐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젠가는 정말로 시간이 날 것처럼, 삶의 끝에 이르면 상상해 오던 그 다행스러운 평화를 얻어 낼 것처럼. 하지만 평화란 없다. 아마 승리도 없을 것이다. 모든 우편기의 최종적인 도착이란 없다.” 삶의 끝에 이르러 도래할 다행스런 평화란 없다. 승리도 없을 것이다. 우편기의 최종적인 도착이란 것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우편기로서 역할과 의무를 다하는 순간, 더 이상 우편기로서 존재하지 못하는 순간일 것이다. 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 산을 내려오는 시지프는 생각한다. 마침내 도래할 승리와 성공은 없다는 것, 신기루 같은 삶과 존재의 순간순간들을 목격하며 그저 바위를 밀어 올리는 , 거기에 삶의 비의가 있다는 것. 인간의 삶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들은 늙어서 시간이 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운명의 바위를 밀어 올리는 바로 그 순간에 있다는 것. 그리하며 까뮈는 <시지프의 신화> 마지막을 이렇게 맺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행복한 시지프를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바위를 밀어 올린다. 어쩌면 다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걸어 내려가는 중일 수도 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이 이 산을 오르내렸던가. 리비에르가 자각했던 것처럼, ‘휴식도 희망도 없는 노력’을 계속해 가면서, 나는 이미 ‘늙어가고 있다.’ 온몸이 멍투성이이고, 두 팔과 두 다리가 노쇠해 가는 걸 느낀다. 그럼에도, 오늘도 나는, 바위를 밀어 올리며, 중얼거리는 것이다. ‘행복한 바위 밀어 올리기를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나를 그려보지 않으면 안 된다.’




https://youtu.be/JX8IhgEqLUw?si=jWEtKyy5cce2dASi

김수철, <지친 어깨>

산처럼 엎드린 너의 절망을 잠재우고

창 너머로 조용히 동이 트는데 

아직 가시지 않은 통증에 우리는 

슬픔 때문에 돌보지 않은 세월이

너의 가여운 얼굴을 스쳐가듯 바라본다

상처로 길들여진 마음 위로 

흐르는 시간은 그대 모르게 

지친 어깨를 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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