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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구오 Mar 02. 2023

나홀로 군산 II

우리는 흐를 뿐이야

       여행지에서 제일 걱정되는 점이 하나 있다. 바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다. 난 알람은 잘 듣는 편인데, 공용공간에서는 알람을 맞추고 자기 좀 그렇지 않나? 그렇다고 프리스타일로 일어나기에는 리스크가 좀 크다. 체크아웃 할 때 쯤에 깨서 내 나머지 계획은 박살나면 어떡해. 나는 이렇게 걱정을 사서 하는 편이다. 아무튼... 군산에서의 둘째 날은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시작됐다. 눈을 떠보니 대략 6시쯤이었고, 옆을 보니 소대장님은 이미 일어나서 핸드폰을 하고 계셨다. 나는 한참 어정대다 여유롭게 샤워를 하고 왔다.


       전날 못했던 인사를 어색하게 나누자, 어느새 소대장님과 대화가 텄다. 그는 알고보니 직업 군인이셨다. (그래서 그의 별칭을 소대장님이라 지었다.) 그리고 내가 군인이라는 것도 한 눈에 알아보셨다. 짬이라는 것은 그런 것일까. 과묵하고 무서울 것 같았던 첫인상과 다르게 소대장님은 굉장히 쾌활하신 분이셨다. 사실 나는 사석에서 직업 군인을 만난 게 처음이어서 그와 얘기하는 상황 자체가 재밌었다. 그는 직업에 대한 만족도도, 열정도 커보이셨다. 자기 인생을 정말 '살아가'는 어른을 만나니 나도 그런 멋있는 청사진을 그리고 싶어졌다.



       우리는 9시에 맞춰 조식을 먹으러 내려갔다. 1층에 있던 카페는 이미 조식을 먹으러 온 투숙객들로 가득했다. 소대장님과 나는 카운터 앞의 테이블에 앉아서, 근사하게 차려진 아침을 먹으며 하던 얘기들을 마저 나눴다.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은 우리를 보고, 나이 차이도 커보이는데 어떻게 친구가 됐냐면서 너스레를 떠셨다. 어느새 그 곳은 집 같았다. 그리고 가야 할 시간이 되자, 한순간에 집을 만들고 떠나는 게 여행의 묘미라는 것을 배우게 됐다.



       소대장님은 커피  잔을 사주시고 떠났다. 사실 나는 커피를  좋아하는데,  커피는 내가 살면서 마셔본 커피 중에 가장 고소했다. 오후에는 군산을 떠나 제주도로 오토바이 여행을 가신다던 소대장님. 짧은 만남이었지만 나는 그처럼 멋있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꿈이 생겼다.


       날씨가 적당하니 걷기에 좋았다. 둘째 날 첫 목적지로 향한 곳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이었다. 박물관 관람하는 것을 좋아해서 왠지 두근거렸다. 그 곳에 가서 통합입장권을 구매해서, 차례대로 근대미술관, 근대건축관, 위봉함까지 갔다. 그 근처에 무료 무인보관함이 있어서, 카메라 하나만 들고 가볍게 다닐 수 있었다. 잘 모르는 지역에 대한 역사를 배우는 것은 재밌는 과정이었다. 홀로 전시관을 도니까 나의 속도에 맞춰서 둘러볼 수 있었다. 마음을 흔드는 공간 앞에 한참을 서있을 수 있었다. 혼자 여행자의 특권이었다.



       요즘 일본 여행을 많이들 가던데, 솔직히 그 전에 한국에 대해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산은 군데군데 일제강점기의 흔적이 남아있었기에, 지난 역사를 직접 체험하기에 좋은 여행지였다. 그런 의미에서 신흥동일본식가옥도 들렀다. 하지만 마침 단체 여행자 무리가 함께 들어가는 바람에, 왠지 양반의 마당에서 봉기를 일으키는 평민1이 된 것 같은 체험을 했다. 사실 가옥 말고는 딱히 뭐가 없어서, 가이드님의 휘황찬란한 투어 진행 실력을 엿듣다가 조용히 나왔다.



       어떤 블로그에서 그 뒤에 있는 말랭이마을이 좋다길래 가봤다. 알고 보니 그 곳은 전날 수시탑에서 내려오며 헤매다가 간 곳이었다. 그래도 어두울 때는 왠지 음산한 느낌이었는데, 밝을 때는 또 다른 정겨운 느낌이었다. 옛날 동네 테마를 가진 추억전시관이 조성되어 있어서, 몇 군데 들어가서 구경도 좀 했다. 혼자 들어와서 사진을 찍으니 안내원 할아버지가 오셔서 설명도 해주셨다. 벽에 낙서가 엄청 많아서 나는 의도한 인테리어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것은 여행객 어린이들이 분필로 맘대로 저질러둔 것이라 하셨다. 사실 그거 덕분에 느낌이 더 사는 것 같았달까. 일종의 참여형 전시와 같았다.



       걷고 또 걸었다. 동선을 따로 안 짜서 온 길을 또 가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익숙해진 소품샵 몇 군데도 들르게 됐다. 여행을 하면 엽서를 사는 습관이 있어서 엽서도 몇 장 구매하고, 아기자기한 인테리어도 구경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은 영화 소품샵이었다. 군산은 영화 촬영지로 자주 활용되었던 곳인지라 영화에 대한 자부심도 큰 지역 같았다. 그런 곳에 위치한 영화 소품샵이라니 들어가보고 싶었달까. 사실 뭘 구매할 생각은 없었고 구경만 하려고 했는데... 최근에 재관람하고 여운 속에 푹 빠져있던 <공동경비구역 JSA> 포스터가 있는 게 아니겠는가. 이걸 사면 필연 짐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손은 이미 그것을 집고 있었고 반대편 손은 카드를 꺼내고 있었다. 아 다시 생각해도 너무 예뻐. 너무 잘 샀어. 누나는 그걸 보고는 군산이랑 JSA랑 무슨 관련이 있냐고 했고, 딱히 대답할 말은 없었다.



       동국사, 철길마을 등 가 볼만한 곳은 다 둘러보니 어느새 떠날 시간이 됐다. 나는 정리하지 못했던 마음을 바다 앞에 앉아 다 털어내려 했다. 온전히 나한테 집중하는 시간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원하긴 했다. 이브 코치님께 배운 명상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다 옆으로 이어진 도로를 따라 한참 걸어 터미널로 향했다.


       여행의 마무리를 멍청한 짓으로 끝마쳤다. 고속버스를 예매해서 별 의심없이 군산고속버스터미널에 앉아있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인천행 버스가 안 오는 것이었다. 이상하다 싶었지만, 주변에 나처럼 초조해보이는 사람들이 꽤 있어서 그냥 기다렸다. 근데 출발 1분 전이 돼도 버스가 안 나와서 매점 아저씨께 물어봤더니 여기는 서울행 버스만 온다고, 옆에 있는 시외버스터미널로 가라는 것이었다. 미친. 그 길로 그냥 엄청 뛰어서 출발 직전이었던 나의 버스를 붙잡을 수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군산에 도착했을 때도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내렸는데 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인가. 그래도 돈 날리지 않아서 다행이었고, 멍청한 짓으로부터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배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 여행지에 관해 고민을 했다. 아무래도 또 떠나야 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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