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도 준비된 운명이 있습니까
연말, 혼란스러운 나라 상황을 보면서 많은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 하루에도 탄식을 자아내는 뉴스가 몇 개 씩 쏟아지는데 힘 없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나의 분노만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고, 나의 목소리에는 누구도 귀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무력감을 느끼는 건 국민과 민심을 개돼지로 아는 국민의힘 때문이야.)
이럴 때면 나에게도 어떤 역사적 사명이 주어지는 날이 올까 궁금하다. 그러니까, 나도 어떤 비범한 일을 해내서 역사에 기록될 수 있을지. 위대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물론, 모든 삶은 위대하다. 보통의 인간의 평범한 삶 또한 주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하나의 생애에는 누구도 가치를 함부로 논할 수 없는 희로애락과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러나 한 사람이 죽고 난 뒤에도, 후세에도 영향을 미치는 삶이 있다. 청년 전태일의 삶이 그랬고, 농민 백남기의 죽음이 그랬다.
나는 무엇을 남길 수 있을까, 나의 삶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혹시 나도 삶과 맞바꿀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을까. 사내로 태어나 어떤 거창한 포부도 없이 사는 삶, 이대로 괜찮을까. 큰 사람이 되고 싶다- 고 생각했다가, 아냐 그냥 조용히 가늘고 길게 호의호식하며 행복하게만 살고 싶다, 생각했다가. 위대한, 역사적인 삶을 사는 것을 기대하다가, 그 괴로움을 가늠하다가. 안도하는 스스로의 비겁함에 놀라서. 어떤 운명이 나를 부를 때 도망치지 않을 용기를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연말 시화전에 전시한 짧은 글인데, (전) 부회장님의 손글씨로 멋지게 써주셔서 막상 보니 십자가보단 비행기를 닮아서 글을 살짝 수정했다. 누구도 부럽지 않고,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