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인용구 Jan 12. 2024

눈빛이 바래기 전에 세수를 하자

열흘 지나 쓰는 2024년 작심일기

 생각해 보면 "눈빛"은 존재할 수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눈은 시각 자극을 받아들이는 기관, 그러니까 빛을 내는 광원이 아니고 빛을 받아들이는 수용체니까. 그러나 인간의 눈은  카메라와 다르다. 입도 감각기관이자 소화기관인 동시에, 소리를 내어 대화를 가능케 하는 것처럼 눈에도 분명한 표현의 기능이 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사람의 눈을 보면 그 너머의, 내면의 당신을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눈빛은 분명 존재한다.

눈빛의 온도를 통해, 당신의 마음을 읽는다.
눈빛의 세기를 통해, 당신의 의지를 읽는다.
눈빛의 깊이를 통해, 당신의 세월을 읽는다.
눈빛의 초점을 통해, 당신의 관심을 읽는다.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에는, 단순히 "시선"이라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너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빛"이 존재한다. 영어에서는 "~~ stare", "~~ look" 같은 표현을 쓴다. 이를테면 "뚫어질 듯이 쳐다보다", "다정하게 바라보다" 같은 동사의 표현이다. 하지만 눈빛은 순간의 행동이나 상태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는다. 눈빛은 개성이기 때문이다. 목소리의 음색과 같은 것이다. 창법을 달리해도 결코 바뀌지 않는 그 사람의 본질. 때문에 나는 눈빛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감출 수 없는 당신의 개성, 당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직관"적인 무엇이기 때문에. 또 눈빛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다듬어가는 것이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그래서 나의 눈빛이 보여지는 것에도 조심스럽다. 내가 누군가의 눈을 마주치면, 그 사람도 나의 눈을 본다는 뜻이니까. 눈빛 교환.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주고받는, 어쩌면 가장 정당한 give-and-take. 나는 어떤 사람일까? 그 사람은 나의 눈빛에서 무엇을 읽었을까? 나는 당당하게 당신의 눈을 마주 볼 수 있는 사람인가?

내가 갖고 싶은 눈빛을 생각해 본다. 내가 닮고 싶은 사람의 눈빛을,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그것은 어떤 명상의 효과가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 따뜻하고 곧은 눈빛은 백 마디 말 없이도 커다란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거칠게 보풀 일은 마음을 빗질하고 다시금 확신과 애정을 갖고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게 용기를 준다. 그런 눈빛을 갖고 싶다.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무언(無言)의 시(詩) 같은.

문득 거울을 봤다. 아무 생각 없이 거울을 보면 머리나 피부 상태를 보통 보고는 하잖아. 근데, 오랜만에 눈을 마주친 거다, 나와. 그때, 부끄럽지 않아야 할 텐데. 눈을 돌리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오래도록 내 안개 서린 눈을 보았다.

그리고 한참 세수를 했다.

- 20160528 글을 수정


 전문연구요원 출퇴근 인증을 위해 매일 아침저녁으로 홍채 인증을 한다. 기계 앞에 서면 자동으로 카메라가 얼굴을 인식해서 눈을 향해 각도를 조절하는데, 촬영하는 영상을 보면 해상도도 높지 않아 보이는데 나를 식별해 내는 것이 신기할 때가 있다.


물론 신기하다는 게 할 때마다 재밌고 즐겁다는 뜻은 아니고, 오히려 곤욕스러운 쪽에 가깝다. 씻을 때 외에는 거울을 거의 보지 않는 내가, 가슴 높이 기계에 허리를 숙여가며 하루에 두 번 셀카를 찍는다. 미소 한 점 내비치지 않는 추레한 얼굴을 확인하면서, 나는 그날의 퇴근 시간을 가늠한다. 요즘은 주 40시간을 채우는 것이 그렇게 힘들다.


2024년 새해가 밝은지도 2주가 되어간다. 첫날부터 월요일로 시작한 올해는 어쩐지 으쌰으쌰 살 각오가 잡히지 않는다. 연말연시 잦은 모임과 술자리에 연구 생각은 잊은 채, 발등에 떨어진 불이 없다며 며칠을 부질없이 흘려보냈다. 두 달이 채 남지 않은 학회 제출일은 생각 않고 LCK 스프링 개막일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내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정이 넘어서 퇴근을 했지만 성과는 없었던 어제, 퇴근 인증을 하는데 홍채 인식 오류가 두 번 연달아 났다. 안경을 벗고 눈을 카메라에 갖다 대면서 문득 옛날 글이 떠올랐, 새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기계도 못 알아볼 정도로 눈깔이 흐려진 나. 이게 사람 새끼냐. 이런 눈빛으로 "비전" 연구를 한다고 어디 가서 말도 하지 마라 니는.


방에 돌아와 옛날 글을 다듬으면서, 그때의 세수보다 긴 반성을 했다. 해야 할 일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니 슬슬 바쁠 필요를 느꼈다. 당장 밀린 빨래부터 돌렸다. 작심삼일이라는데, 연초에 마음을 다잡는 데에는 삼주가 걸리는구나.


다음 주부터는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겠다.

누군가를 마주할 때 눈 피할 일 없도록.

매거진의 이전글 올해 첫눈 후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