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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를 넘어 "나란 무엇인가"로

[서평] 히라노 게이치로의 <나란 무엇인가>를 읽다

by 김남정

한 사람은 하나의 본모습을 가진 고정된 존재일까. 소설가 히라노 게이치로는 <나란 무엇인가>에서 이 오래된 물음을 뒤집는다. 그는 '개인(individual)' 대신 '분인(invidual)'(일본 사람들이 번역한 용어다)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며, 우리가 관계 속에서 얼마나 다층적으로 살아가는 존재인지 새롭게 조명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나는 오래도록 혼란스러웠던 '서로 다른 나의 모습들'을 처음으로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눈앞이 번쩍 뜨이게 하는 책이다.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하지 않는 문제


우리가 평소 던지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이다. 이 질문에는 분명한 전제가 있다. 사람에게는 변하지 않는 하나의 정체성이 있고, 상황에 따라 드러나는 여러 모습은 '가면' 또는 '부차적 성격'이라는 생각이다. 영어 individual(나눌 수 없는 존재)를 일본이 '개인'으로 번역하며 근대사회는 한 사람을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고유한 실체로 여겨왔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실제 우리의 경험과 다르다. 어떤 자리에선 활달하고 존재감이 뚜렷하지만, 또 다른 상황에서는 말이 줄고 내성적인 모습이 드러난다. 우리는 이런 차이 앞에서 "진짜 나는 무엇일까?", "혹시 내가 연기하고 있는 걸까?"라고 스스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바로 이 의문에서 출발한다. 그는 개인이라는 개념이 현대인이 겪는 정체성의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고 보고 '분인(dividual)'이라는 새로운 틀을 제시한다.


IE003554217_STD.jpg ▲책표지 <나란 무엇인가> 진정한 나를 깨우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철학에세이 ⓒ 21세기 북스


나를 이루는 여러 '분인', 모두가 나


'분인'이란 타인과의 관계마다 생성되는 서로 다른 '나'이다. 가족 앞에서의 나, 친구들과 있을 때의 나, 어떤 사람 앞에서는 말이 잘 나오고, 또 어떤 사람 앞에서는 유난히 작아지는 나. 이 모든 모습이 각각 독립된 분인 이다. 이 개념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책 속 문장이 강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분인은 바꿔 쓰는 가면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자라나는 또 하나의 나다."


이 문장은 내가 오래 품고 있던 오해를 깨뜨렸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내 행동을 '연기'라고 생각했던 이유는 '진짜 나'는 하나일 거라는 전제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히라노 게이치로는 '여러 모습이 모두 진짜'라고 말한다. "가면이 아니라 또 하나의 나"라는 표현은, 내 안의 모순들을 한꺼번에 품어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분인은 단순한 역할이 아니라 관계의 경험 속에서 형성되고 강화된다. 반복된 상호작용이 특정 분인을 발전시키며, 그 구성 비율에 따라 '대표적인 나'가 정해지는 것이다.


사랑과 애도, 관계가 만들어낸 '나'의 움직임



히라노 게이치로는 사랑과 애도를 분인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이 대목이 특히 깊은 울림을 주었다.


"사랑은 상대를 통해 비로소 사랑하게 된 나의 한 분인을 발견하는 일이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젊은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사랑에 빠져 유난히 밝고 자신감 넘치던 어느 시절, 나는 그 사람이 좋아서 빛난 줄로만 알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관계 속에서 태어난 '반짝이는 분인'을 사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란 둘 사이의 감정만이 아니라, 그 관계가 만들어주는 새로운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해석은 신선하면서도 깊었다.


애도 또한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잃고 슬픔이 깊어지는 이유는 단순히 그 사람을 잃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슬픔이 깊다는 것은 그 사람과 함께 있던 나의 일부가 사라져 버렸다는 뜻이다."


이 문장은 애도의 본질을 단 한 줄로 설명해 주었다. 타인의 부재는 곧 그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던 내 분인의 소멸을 의미한다. 슬픔은 남겨진 사람의 감정이자, 사라진 '나의 한 조각'에 대한 비탄이다. 그동안 잘 설명되지 않던 애도의 깊이가 이 문장 하나로 또렷하게 설명되었다.


히라노 게이치로는 이렇게 사랑과 상실의 감정까지 분인이라는 틀로 자연스럽게 설명해 내며 관계의 본질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현대인들은 여러 플랫폼과 여러 역할을 넘나들며 살아간다. 직장에서의 나, 가정에서의 나, SNS의 나가 완전히 다르게 느껴질 때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변화가 '부정'이 아니라 인간의 자연스러운 구조라고 말해준다.


특히 인생의 전환기를 지나고 있거나, 자녀의 독립 이후 새로운 삶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들에게 큰 위로와 통찰을 준다. 나 역시 최근 삶의 여러 장면을 지나오며 '사라져 가는 분인'과 '새로 생겨나는 분인'을 경험해 왔기에, 히라노 게이치로의 관점이 더 절실하게 와닿았다.


나를 이해하는 새로운 언어


<나란 무엇인가>는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더 넓고 깊은 차원으로 확장하는 책이다. 우리 안의 여러 분인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자기혐오가 줄고 타인에 대한 이해와 관용도 커진다.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달라지는 나를 이해하고 싶다면, 다른 사람과의 자꾸 흔들리는 감정의 이유가 궁금하다면, 혹은 새로운 삶의 국면에서 나를 다시 정의하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나침반이 되어줄 것이다.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3186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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