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선택하지 않은 순간을 더 오래 기억한다

스위스의 봄눈과 독일의 작은 꽃이 남긴 것

by 김남정

우리는 종종 삶을 선택의 결과라고 말한다.
어디로 갈지, 어떤 일을 할지, 누구와 함께 할지를 고민하며 살아간다. 더 좋은 선택을 하기 위해 시간을 들이고, 이미 지나간 선택을 떠올리며 ‘그때 다른 길을 택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야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돌아보는 순간 떠오르는 장면들은 꼭 내가 선택한 순간들만은 아니다. 오히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들이 더 오래 마음에 남는 경우가 많다.



몇 해 전, 2019년 4월 초에 부모님을 모시고 자매 셋과 막내 제부까지 함께 유럽 자동차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여행을 준비하며 우리는 꽤 성실하게 계획을 세웠다. 어느 도시에서 며칠 머물지, 어떤 길로 이동할지, 어느 마을에 들를지까지 지도 위에 작은 표시들을 하나하나 남겼다.

그렇게 촘촘하게 준비한 여행이었지만, 막상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장면은 우리가 미리 골라둔 풍경이 아니었다.


스위스 전통 가옥 샬레에 머물던 어느 날, 길가에는 매화가 가지를 길게 뻗으며 피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커튼을 열자, 마을은 이미 밤새 내린 눈으로 새하얗게 덮여 있었다. 도로 건너편 작은 빵집에서는 따뜻한 오렌지색 조명이 창문 너머로 번져 나왔고, 한 남자가 긴 바게트를 종이봉투에 안고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하얀 눈 위로 그의 발자국이 조용히 이어졌다.


그 순간 우리는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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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몰고 구불구불 이어진 산길을 올라가면서도 눈은 계속 쌓였다. 제설차가 지나간 흔적 옆길에 제부는 길모퉁이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어느새 세 자매는 준비해 온 색색의 우비를 입고 어린아이처럼 눈 위에서 뛰며 발자국을 남기며 웃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터져 나온 웃음과 눈 덮인 풍경이 그날 하루를 오래 마음에 붙들어 두었다.


그날 아침 눈을 바라보며 문득 영화의 대사가 떠올랐다.


영화 포레스트 검프에서 어머니가 아들에게 말하던 문장이다.

“인생은 초콜릿 상자와 같단다. 어떤 걸 집게 될지 아무도 모른단다.”


스위스의 4월 초순에 눈을 만나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예상치 못한 순간이 삶 속에서 오래 기억되는 장면을 만들어 준다.




독일의 작은 마을에서 머물던 날, 우리는 은퇴한 부부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에 체크인했다. 새로 지은 신축 건물이라 깨끗하고 나무향이 은은히 풍기는 목조 계단과 창문 앞 화분들이 정겹게 놓인 작은 숙소였다.

체크인을 하며 부모님과 여행 중이라는 이야기를 잠깐 나누며 오늘이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는 말을 했다. 그날 저녁 방으로 돌아왔을 때 문 앞에는 작은 화분 하나가 놓여 있었다. 분홍 꽃 몇 송이가 피어 있는 작은 화분과 함께 짧은 카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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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50주년(금혼식)을 축하하며, 행복을 기원합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거창한 선물도 아니고, 특별한 이벤트도 아니었지만 마음이 오래 따뜻해졌다.
낯선 나라, 작은 마을에서 우연히 만난 친절이 하루를, 그리고 여행 전체를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 장면 역시 우리가 선택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여행길 위에서 우연히 마주친 순간일 뿐이었다.
하지만 여행이 끝나고 돌아와도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
우리는 많은 것을 선택하며 살아가지만, 삶을 이루는 장면들은 그 선택들 속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예상치 못한 풍경, 우연히 만난 사람, 잠깐 스쳐간 친절이 삶을 조금 더 깊고 부드럽게 만든다.


어쩌면 삶의 지혜는 모든 일을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만들려 애쓰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이미 주어진 순간 속에서 의미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작은 기쁨과 위로를 느끼는 데서 출발한다.


계획과 다르게 흘러간 하루 속에서도, 나중에 돌아보면 작은 기억 하나쯤 남는다.
스위스의 4월의 봄눈처럼, 독일의 작은 꽃 화분처럼.
예상치 못한 순간들이 삶을 조금 더 오래,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든다.


삶은 내가 고른 길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길 위에서 우연히 만난 장면들로 더 오래 기억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오늘 하루에도 내가 계획하지 않았던 작은 장면 하나가 숨어 있을지 모른다.
내일 아침 커튼을 열었을 때, 혹은 길을 걷다 스쳐 지나가는 순간에,
조용하지만 오래 기억될 장면 하나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 순간들을 마음속에 담아두면, 하루를 마무리하는 저녁이 조금 더 부드럽고 따뜻해진다.
오늘 하루, 선택하지 않은 순간들 속에서도 작은 선물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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