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상쾌하게 맑은 공기로 가득 찬 시기를 말하며, 음력으로는 삼월 삼짇날이다. 새봄이 찾아옴을 기뻐하여 술과 음식을 장만해 경치가 좋은 산이나 계곡을 찾아가 꽃놀이를 하고, 새 풀을 밟아 봄을 즐긴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다음은 어느 청명하고 따뜻한 봄날에 신유진 작가의 《몽 카페》를 읽다가 쓴 글이다. 이른바 ‘문장과 대화하기’. 책을 읽다가 어느 한 문장을 만난 지점에서 멈추고는 노트북을 열어 그 순간에 생각난 것들을 옮겼다. 그중 몇 개만 이 자리에 선보인다. 한 줄의 문장에서 때로는 산처럼, 때로는 바다처럼 떠오른 것들이라 매우 수다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며 책속의 내용, 저자의 생각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신유진, 《몽 카페 Mon café》(시간의흐름, 2021)
p.49 좋은 기다림을 생각해야 한다.
카페에서 누군가를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본 기억이 있다.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을. 카페 문이 닫히고 자정이 넘어가도록 근처에서 계속 기다렸다. 그땐 그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본 책이나 영화에선 결국엔 꼭 나타나던데. 다시 잘 되던데. 그때만 해도 드라마와 현실의 구분이 잘 되지 않았나보다. 다음날 아침, 혼자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 내 마음과는 전혀 딴판인 4월의 청명한 하늘을 보았다. 아! 이 책을 읽으며 그때가 생각난 이유가 다 있었다. 날씨 때문이었다. 바로 지금 이 날씨. 4월은 잔인한 계절이라는 말을 거리의 광인처럼 중얼거리며 잉여의 끝을 달렸던 이십대의 내가 생각나는 날씨.
친한 친구 한 명은 한겨울에 강원도 횡성까지 가서 누군가를 기다린 적이 있다고 했다. 카페 비슷한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어서 역 근처 치킨집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창밖으로눈이 펑펑 내렸다고 했다. 치킨은 시키고 기다린 걸까. 한 마리? 반 마리? 맥주도 마셨을까? 많이 추웠다고 했던 것만 기억난다. 강원도의 아들은 끝내 오지 않았다고 했던가. 너무 오래전에 들어서 아무래도 다시 물어봐야 할 것 같다. 웬 뜬금없는 얘기냐고 히죽 웃다가도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보는 친구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누군가를 기다리다 종쳐버린 이십대를 함께 웃으며 추억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얼마나 다행인가.
우리는 너무 많이 기다렸다. 늘 먼저 와서 나를 기다려주거나, 기다리면 항상 제시간에 왔던 사람이었으니 그저 오늘만 늦는 거라고, 조금 더 기다리면 올 거라고 마냥 믿었던 거다. 만약 과거의 나에게 가서 딱 한마디만 해주고 돌아올 수 있다면 나는 그때로 가고 싶다. 낯선 동네, 처음 와보는 카페에 앉아 기대와 불안이 반반씩 섞인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나에게 다가가 말해주고 싶다. “기다리지 마. 안 올 거야.” 이럴 시간에 공부를 하라고, 이런 끈기와 노력을 실용적인 곳에 써보라고 말해줄 수도 있겠지만, 일단은 혼자 있는 나를 데리고 밖으로 나오고 싶다.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꽃이나 보고 하늘이나 보라고 알려주고 싶다.
p.57 서울 사람들은 취향을 즐기는 것도 일하는 것처럼 열심이라 어쩐지 주눅이 든다.
나의 첫 카페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남의 취향 따라하기. 그게 시작이었다.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A의 SNS를 탐색하다가 거기에 자주 등장하는(아마도 A의 취향인 듯한) B라는 사람의 SNS에 들어가게 되었다. 작은 액자 속에 비친 B의 일상을 엿보는 마음은 처음엔 부러움과 질투였다가, 아쉬움과 속상함이기도 했다가, 어느새 친숙함으로 바뀌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A보다 B의 SNS에 더 자주 들어갔고 B가 좋아하는 카페에서 B가 앉았던 자리에 앉아 B가 주문한 커피를 마셔보기도 했다. 이렇게 쓰니 약간 공포스럽다는 생각이 드는데 사실 더 있다. B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손님으로 가서 커피를 주문하기도 했다. 그때 뭘 마셨는지는 잊었는데, 그날 비가 왔던 건 기억난다. 카페에 우산을 두고 와서 전화를 걸었고 B가 받았다. 우산을 맡아두고 있으니 언제든 찾아가라는 B의 친절한 목소리……. 쓰고 보니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본 〈비하인드 허 아이즈〉가 생각나지만, 결말이 그 정도로 무시무시하진 않았다. 내 기준인가?
나는 어느새 B의 취향을 따라하고 있었다. 신체적 경제적 재능적인 한계로 모든 것을 다 따라할 수는 없었지만 일부는 내게 맞는 옷을 골라 입은 것처럼 편안했다. 발단이 어떻게 되었든 취향이란 원래 나한테 편안한 거니까. B가 아니었으면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을 편안하고 좋은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가끔은 B의 SNS에 내가 이미 가본 카페나 내가 본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올라와서 반갑기도 했다. 반갑다고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런 사이가 되려면 정말로 〈비하인드 허 아이즈〉를 따라해야 할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없었다. B가 더 이상 궁금해지지 않은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다. A를 향한 미련이 사라지면서 자연스럽게 잊힌 걸 거라고만 짐작하고 있다. 그거야말로 다행인 결론이었다. 더 많은 종류의 SNS가 생겼고, 더 다양한 취향과 이야기가 하루에도 수십 개씩 내 휴대폰 화면을 스쳐갔지만 B만큼 완벽한 타인이면서 강렬하게 끌리는 존재를 만나는 일은 그 후로 없었다.
p.117 나의 오랜 콤플렉스 중 하나는 특별히 좋아하는 게 없다는 것이다.
내 취향의 본고장이 앞의 내용과 같다 보니 나는 취향이랄 게 없는 사람 같다. 내가 뭔가를 좋아하면 그건 99.9퍼센트 어딘가에서 남의 것을 보고 시작한 것일 테니까. 누군가 자연스럽게 내 마음 속에 들어 왔다가 빠져 나가는 동안에만 가지고 있는 그걸 나의 취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취향이란 게 결국 그런 흔적들의 총 집합인지도 모르겠지만. 짬뽕과 짜장, 산과 바다, 도시와 시골 중에 하나를 고르는 게 취향이라면 더욱 할 말이 없다. 대답은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한동안 커피를 주문할 때 산미 없이 고소하고 묵직한 맛이 내 취향이라고 여긴 적이 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떤 날엔 시큼하고 쌉싸래한 커피 맛이 생각나기도 했다. 그런 날엔 그런 커피를 마시면서 역시 세상에 무조건 나는 이것! 이란 건 없다는 결론을 내려 본다. 책도 마찬가지다. 읽은 책들의 목록으로 취향을 짐작해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앞으로 읽을 책의 목록까지 한정짓게 하고 싶진 않다. 이렇게 말하니까 무슨 다독가라도 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극히 드문 우연에 의해 손에 잡히는 대로 책을 읽을 뿐인데, 그것마저 취향의 제한을 받는다면 내 손에 들어올 책의 수는 얼마나 더 줄어들겠는가.
하지만 취향이 없는 건 마치 창문을 열어두고 공기청정기를 틀어 놓는 것과 같아서 무모하고 비효율적으로 느껴질 때가 있다. 온 세상 사람들과 다 친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지만 사실은 친한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음…… 그렇다는 얘기다.
p.105 “라 포브르흐(La pauvre, 불쌍한 여자).”
십 년도 훨씬 지난 이야기다. 친구와 어쩌다 C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내가 “(C가) 불쌍해”라고 말했더니 듣고 있던 친구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니가 더 불쌍해”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무척 당황했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그때껏 나눈 대화와 연결이 되지 않았다. 얘는 왜 나한테 이렇게 말하지? 지금 우리는 C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었잖아? 내가 왜 불쌍하지? 속으론 갑자기 생각이 많아졌지만 겉으론 어서 상황을 모면하고자 웃어 넘겼던 것 같다. 그다음 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니가 더 불쌍해”라는 말의 힘이 너무 셌다. 그 순간 내가 너무 불행하게 느껴졌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이영애 배우가 우아한 목소리로 “너나 잘하세요”라고 말하는 장면을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한동안 그때 생각이 나서 숨고 싶었다. 그 후로 나는 불쌍하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게 되었다. 누군가의 행복과 불행을 함부로 재단하는 일이며, 그건 생각보다 매우 폭력적이라는 걸 거울처럼 느껴봤으니까.
그 친구와는 여전히 잘 지낸다.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싶을 때마다 그 친구의 눈을 빌린다.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해서 이따금 통화로 내 상황을 보고하고 진단을 받는다. 잘한 일을 말하면 칭찬을 듣고 못한 일을 말하면 위로를 듣는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작년 가을이었으니 이제 슬슬 통화할 때가 온 것 같다.
p.131 “나는 그냥 새를 보는 사람입니다.”
호숫가에 살고 있는 신유진 작가는 거기서 새를 관찰하는 사람을 만났다. 날마다 새를 보거나 그리거나 기록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날 작가는 조심스레 다가가 용도를 물었다. “나는 그냥 새를 보는 사람입니다.” 그의 대답에 나도 작가처럼 멈칫하고 말았다. 어쩐지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말이 슬펐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이십대와 삼십대 초반의 내 고민은 ‘어떻게 작가가 되느냐’에만 몹시 기울어져 있었다. 방법을 몰라서 자주 울었다. 장난감을 갖지 못해 떼쓰며 우는 아이처럼. 그때 한 친구가 내게 해준 말이 있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친구였다. “너 화가가 뭔지 알아? 매일 그리는 사람이야. 그럼 작가는 뭐겠어? 매일 글 쓰는 사람이지. 매일 쓰고 있다면 이미 작가야.”
매일 쓰는 사람이 작가라는 말을 나는 그날 처음 들었다. 그때의 나는 어떤 표정이었을까. 안심하고 울음을 뚝 그쳤을까. 언뜻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 말에는 기대와 절망이 절반씩, 기쁨과 슬픔이 절반씩 섞여 있다고 지금도 생각한다. 이대로도 괜찮다는 말이자 다른 길은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는 말이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지만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말이다. 잊을 수 없는 말을 남긴 친구는 얼마 뒤에 제 살길을 찾아 떠났다. 그 후로 여기저기에서 ‘매일’과 ‘쓰기’가 단짝처럼 붙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 말 속에 담긴 절반의 절망과 슬픔을 온전히 등에 지고 있을 작가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p.122 오늘은 정말 날씨가 좋다. 더는 함부로 외롭지 않겠다.
며칠 전의 일이다. 하루 종일 혼자서 진공상태와 같은 집안에 있는데 기분 나쁠 일이 뭐가 있겠냐마는 사람의 마음까지 완벽히 진공상태가 되는 게 아니어서 언제 어떻게 변할지 아무도 모른다. 하는 일이 이렇다 보니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주로 책에서 시작된다.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기도 하다. 싫은 것을 점점 제하다 보면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수도 있다. 그날도 내가 만약 이 일을 하지 않았다면 굳이 겪지 않았을 일로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괴로워한다고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해결된다고 하더라도 이미 괴롭게 보내느라 놓쳐버린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나는 행복해지고 싶었다. 어떤 상황에도 괴로움보다 즐거움이 더 많은 사람이고 싶었다. 그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맛있는 것을 해먹기로 했다. 냉장고에서 바지락을 꺼내고 파스타를 삶았다. 올리브유에 마늘과 건고추를 넣고 볶다가 삶은 면과 바지락을 섞었다. 이때 파스타 삶은 물을 면이 반쯤 잠길 정도로 부어주면 같이 끓으면서 얼큰하고 맛있는 국물 맛을 낸다.
얼마 전에는 온라인 서점에서 내 책에 달린 안 좋은 평을 보았다. 모든 책의 평을 구석구석 찾아보는 건 아니지만 그 책만큼은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의 노력이 깃들어 있어서 오래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별점 하나짜리 평이 더 눈에 띄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구체적인 이유를 들어줬으면 반성도 하고 도움도 받았을 텐데 그 정도로 여유가 있는 독자는 아니었나보다. 예전 같았으면 그 이유를 내가 생각해내느라 하루 종일 아무것도못했겠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나는 읽던 책의 사진을 찍고 리뷰를 써서 SNS에 올렸다. 작가가 보았으면 하는 마음에 태그도 달았다. 책으로 인해 찾아온 외롭고 허전한 마음을 달래는 데엔 이것만큼 좋은 게 없었다. 내가 읽은 좋은 책을 알리자. 그 책의 좋은 점을 알리자. 작가에게 도움이 되자. 오랜 시간 혼자서 글을 써내야 하는 이에게 내가 함께 있다고 말해주자. 누군가의 말로 마음을 다쳤다면 그만큼 다른 누군가의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기로 했다. 그러면 나도 살 것 같았다. 마음의 일은 정말로 신기하게 작동해서 이게 가능했다.
p.s. “스콘을 구웠더니 너무 작아져서요.”
이 글의 마지막은 카페에서 쓰고 싶었다. 가능하면 처음 가보는 카페에서. 어떤 글이든 마지막엔 장소를 바꿔 전혀 낯선 곳에서 결말을 맺는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나을 거라는, 제법근거 있는 믿음 때문이었다.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에 ‘작가의 기법에 관한 13가지 명제’가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결말을 평소의 작업 공간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라’는 거였다. 나머지 12가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데 유독 이 한 가지, 결말을 다른 장소에서 쓰라는 말이 왠지 그럴듯해서 그때부터 나도 그렇게 해보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했다. 매번 여행을 다닐 순 없으니 마지막 문장을 남겨두고 집을 나와 카페에 가거나, 항상 가던 카페에서 다른 카페로 옮기는 식으로. 자, 그럼 오늘 어떤 카페에 가느냐에 따라 이 글의 결말이 달라진다면? 꽤나 흥미롭고 해볼 만한 경험 아닐까.
실은 오래전부터 눈여겨보던 작은 카페가 있었다. 도서관 가는 길에 항상 지나치는 곳인데 원래는 일본 음식점이 있던 자리였다. 언제 저기서 먹어봐야지 생각만 하는 사이 문을 닫았고 그 자리에 카페가 생겼다. 그 카페는 일반 회사처럼 오후 6시면 문을 닫았다. 나 역시 (시작하는 시간과 상관없이) 오후 6시면 작업을 마무리하기 때문에 묘한 일치감이 느껴지면서 낮에만 문을 여는 이 카페를 궁금해 하고 있었다. 작은 유리창으로 슬쩍 들여다보니 커피와 함께 스콘이나 마들렌 같은 것도 만들어서 팔고 있는 것 같았다.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들어가 보지 못했던 건 역시 너무 작아서였다. 노트북 사용은커녕 책을 읽는 것도 왠지 눈치가 보일 것 같은 그런 작음. 내가 무슨 행동을 하든 주인의 시선에 닿아 있을 것 같아 내 존재 자체가 매우 걸리적거릴 것 같은 그런 작음. 그런데도 어떤 이유에선지, 단지 오늘 날씨가 너무 좋아서였는지, 오늘이 아니면 언제 다시 비가 오고 황사가 찾아올지 모르는 봄날이라선지, 당장 오늘 그 작고 낯선 곳에 한번 가보자는 용기가 생기고 말았다. 너무 작으면 그냥 나오는 거지 뭐.
카페에서 일한 적이 있다. 번 돈으로 밀린 카드 값도 내고 책도 사 읽고 사서교육원도 다니고 도서관 취업까지 하게 되었으니 일은 힘들었지만 나무랄 것 없는 선택이었다. 그때의 경험을 이미 여러 책에 걸쳐 조금씩 늘어놓았지만 그때 생긴 습관에 대해선 아직 말하지 않은 것 같다. 첫인상만으로 상대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판단해버리는 것. 어쩌면 카페 이전에 식당이나 극장에서 일할 때부터 나도 모르게 체득한 건지도 몰랐다. 매일 낯선 사람을 만나고 응대해야 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대비책이자 생존 본능 같은 거였다. 누군가 카페에 들어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최대한 빠르게 훑었다. 그가 자리를 잡고 내 앞에 와서 주문을 하기 전까지 판단을 끝내 놓아야 안심하고 말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도와드릴까요? 겉으론 똑같은 목소리를 내지만 마음속의 톤은 조금씩 달랐다. 시간이 지나 방문자나 이용자가 되어 그때의 나를 떠올리면 좀 안타까워진다. 편견 없이 사람을 대할 순 없었을까. 겉차림만 보고 판단하는 건 너무하잖아. 너 자신을 생각하라고……. 낯선 곳에 갈 때마다 상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할지를 먼저 의식하는 건 과거에 내가 그 자리에서 늘 그런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작은 카페에 들어선 순간 내부가 생각보다 작지 않아서 깜짝 놀랐다. 창가 자리만 있는 줄 알았는데 테이블이 세 개나 더 있었다. 가장 안쪽, 작은 테이블 위에 노트북이 든 가방을 살포시 내려놓았다. 여자 주인은 혼자 온 다른 여자 손님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소곤소곤 다정하게 들렸다. 잠시 기다렸다가 주문을 하러 주인에게 갔다. 아이스 라떼를 고른 뒤 스콘을 먹을까 마들렌을 먹을까 잠시 망설이다가 스콘을 골랐다. 자리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그제야 음악이 아주 조용히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귀에 전혀 자극이 되지 않았다. 잘 왔다! 속으로 외쳤다. 잘 왔어. 왠지 글도 잘 써질 것 같았다. 글이 잘 써진다는 건 속도와 양의 측면이 아닌 쓰는 동안 몸과 정신이 자유로워지는 상태를 말한다. 다 기분 탓이다. 글 쓰면서 자꾸 기분에 좌우되면 안 되지만 좋은 기분은 얼마든지 환영이다. 잠시 뒤에 주인이 커피를 가져다주었다. 접시에는 스콘과 마들렌이 함께 담겨 있었다.주인이 미안해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콘을 구웠더니 너무 작아져서요. 마들렌도 같이 드릴게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