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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Jun 05. 2021

망종芒種

06.05.(양력), 태양 황경 75°

벼, 보리와 같이 수염이 있는 까끄라기 곡식의 종자를 뿌려야 할 적당한 시기이며, 모내기와 보리 베기에 알맞은 때라 바쁜 농사철이다. 사마귀나 반딧불이가 나타나고, 매화가 열매 맺기 시작한다. 이날 하늘에서 천둥이 치면 그해의 모든 일이 불길하고, 우박이 내리면 시절이 좋다고 여기는 풍습이 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사무실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한 가지 주제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있다. 매주 신청을 받고 있는데 그때마다 꼬박꼬박 참석한 이유는 사무실을 함께 쓰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짜로 나눠 주는 샌드위치와 커피 때문이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주지 않았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지금까지 네 번의 모임을 하는 동안 생각지도 않은 네 번의 자기소개를 했다. 각자의 일정에 따라 매주 모이는 사람이 조금씩 바뀌었는데 나는 빠짐없이 다 참석한 거다. 샌드위치와 커피 때문에.


독립출판을 하면서 자기소개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 되었다. 직업으로 소개하기가 아직 애매한 부분이 있기도 하지만 소개를 해도 잘 모르는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일까. 상대가 나를 아는 경우보다 모르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당연할 텐데 나를 모르거나 말해도 별 관심이 없는 눈치면 왠지 서운하고 서글퍼진다. 아주 낮은 강도의 서운함과 서글픔이라 일상생활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지만 모이고 쌓이면 글을 쓰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 자의식 과잉인가 싶지만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앞으로는 내 글을 읽은 소수의 사람과 만나고 싶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어떤 고민이 있고 어떻게 돌파해 나가고 있는지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람. 지금까지 나는 그런 이야기만을 써왔기 때문이다. 책과 상관없이 그저 나이를 먹어서인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지난 네 번째 모임도 샌드위치와 커피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신청해서 조용히 앉아 있었는데 불쑥 질문이 들어왔다. 어떻게 작업하고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어…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그저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얼버무리다가, 사실은 샌드위치 먹으려고 신청한 것뿐이라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내가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 생각해내려 애써보았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들이 여기 모인 이유는 나처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 염탐하기 위해서도, 샌드위치와 커피만 축내기 위해서도 아닐 테니까.


“나는 외주를 겸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정해 놓은 마감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다. 일단 쓰고 싶은 글을 쓰고, 그 글이 모이면 책으로 만든다. 편집과 디자인과 인쇄와 유통을 혼자 다 해야 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시간이다. 깨어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한다. 여기 사무실에 와 있는 동안에는 감금되었다고 생각하고 쓴다. 한 가지 주제를 생각하고 그게 완결될 때까지 쓴다. 다른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냥 쓴다.”  


두서없이 했던 말을 정리하면 이렇다. ‘그냥’이라는 말을 실제로는 훨씬 많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말줄임표도 간간이 있어야 할 것 같고. 질문에 제대로 대답한 건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질문에도 내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저거뿐일 것 같으니까. 귀가 솔깃할 만한 노하우도 아니고 그저 아주 원론적이고 기본적인,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는 고리타분한 소리다. 새로운 환경을 만들고 도전하는 타입도 아니어서 다른 사람들처럼 이렇게 해보니 좋았다, 아니다, 같은 사례를 별로 가지고 있지도 못하다. 꾸준히 쓰고 있지만 어느 날엔 이렇게 쓰기만 하다가 죽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숨이 꼴깍꼴깍 넘어간다. 이런 고민을 얘기하자니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모르겠고 특히 이제 시작하려는 사람에겐 하등 도움 안 되는 고민이라는 것을 알기에 잠자코 있게 되는 거다. 어느 순간 탁! 하고 꼭 필요한 말이 떠오르는 절묘한 타이밍을 기다리면서. 그런 기회가 아직 없었을 뿐이다.


이 자리를 빌려 이런 말은 할 수 있을 것 같다. 얼마 전에 사무실에서 그래픽 디자이너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주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디자이너이고 나의 작가 생활 초반의 운을 다 가져다 쓴 결과로 만들어진 『도서관의 말들』을 디자인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디자인한 책의 원고를 쓴 사람으로서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디자인하기 전에 원고를 다 읽어보았는지, 어디까지 읽었는지, 읽을 만했는지, 표지에 그려진 사각형들은 책을 의미하는지, 도서대출카드를 의미하는지 따위를 물론 하나도 물어보지 않았다. 물어보지 않고도 그의 강연을 듣는 동안 어느 정도 해결되었다. 오래 생각하고 천천히 말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어쩐지 그의 작업 방식에 대한 답을 들은 것 같았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기억에 남는 말을 들었다. 귀를 막고 작업했다는 말. 말하는 속도가 나보다 느린 것도 좋았지만 특히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¹  


나는 자기 작업을 고집스럽게 밀고 나가는 사람을 좋아한다. 떠도는 생각으로만 존재하는 것을 하나의 덩어리로 만들어 한 권의 책이든 무엇이든 형태가 있는 것으로 붙잡아두는 사람. 끝까지 가보는 사람. 그런 사람의 작업물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시간이 담겨 있다. 이웃의 간섭과 세상의 소란에도 흔들리지 않고 버텨낸 그 사람만의 풍부한 시간. 형태와 내용이 곧 그 사람인 것 같은 작업물을 만나면 나도 이렇게 하고 싶고, 이렇게 살고 싶어진다.


그러니까 귀를 막고 작업해보라고 말하고 싶은데 대화하러 만나는 모임의 취지와 잘 맞는지는 모르겠다. 어디까지나 INFP형인 개인 창작자가 비슷한 성향의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여러분, 지금 당장 귀를 막으세요.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 맨 처음 하려고 했던 그것을 하세요. 다른 사람 얘기 듣지 말고 무엇이 됐든 일단 해보세요. 과정 중에서, 혹은 결과물을 마주했을 때 답이 보일 거예요. 아, 망했구나. 이게 아니었구나. 그걸 디딤돌 삼아 다음 작업을 하는 겁니다. 계속 그렇게요. 나의 작업은 그렇게 하나씩 만들어 나가는 거라고 생각합니다만…. 나는 어떤 모임에서도, 누구에게도 이런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실패를 방조하는 무책임한 말은 나 자신에게만.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분들만 보시고 잊어주시길.


여러 사람 앞에서 을 해야 는 부담만 없으면 모임에 나가고 싶은데 계속해서 내가 누군지 밝히고 어떻게 작업하고 있는지 털어놓아야 한다면 그 시간이 외롭고 공허할 것 같다. 샌드위치와 커피는 모임 공포증을 없애주는 좋은 미끼였지만 사람들 앞에서 자연스럽게 나를 드러내는 것까지는 도와주지 않았다. 두 차례의 모임이 더 남았는데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눈 딱 감고 샌드위치를 위해 신청할 것인가, 그냥 사먹을 것인가. <끝>



1. 2021년 5월 11일 플랫폼피P에서 열렸던 이기준 디자이너의 강연으로 주제는 ‘귀 막고 눈 뜨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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