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민선 Aug 07. 2021

입추立秋

08.07.(양력), 태양 황경 135°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음을 알리는 절기다. 이날부터 입동立冬 전까지를 가을이라고 한다. 입추 무렵은 벼가 한창 익어가는 때여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는 것이 좋다. 조선 시대에는 입추가 지나서 비가 닷새 이상 계속되면 비를 멎게 해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리기도 했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1

8월의 첫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도 그랬지만 깨고 나서 느낀 것도 부끄러움이었다. 어느 수업 시간이었다. 칠판 앞에 나가 답을 써야 했는데 하나도 쓸 수가 없었다. 그저 지우개로 일없이 칠판의 빈곳을 쓸어내리기만 했다. 나를 쳐다보고 있을 아이들의 시선이 의식돼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더욱 민망한  누가 시켜서 나간 게 아니라 나 스스로 나갔다는 . 답을 써보겠다고 내 발로 걸어서 칠판 앞으로. 하지만 아무것도 쓰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다가 내 자리로 돌아왔다. 여기서 꿈이 깼다면 좋았겠지만 아니었다. 그 후로도 꿈은 한동안 이어져 나는 부끄러움을 안은 채 꿈의 세계를 계속 살아야 했다. 나는 무척이나 창피해했지만 반 아이들은 그 일에 대해 아무 말이 없었다. 나를 위해서 일부러 입을 다물어주고 있는 걸까. 답을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뭔가 알고 있는 것처럼 칠판 앞으로 나간 내 모습이 얼마나 황당하고 우스웠을까. 그런 생각으로 꿈에서 학교를 다니며 며칠을 보냈다.      


잠에서 깨고 나서도 한동안 눈만 끔뻑거렸다.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꿈속의 일들을 곱씹었다. 꿈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너무 오래 잔 탓에 꿈속의 일도 내 삶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꿈에서 느끼는 감정은 현실과 영향을 주고받는다던데. 부끄러움. 나는 이 감정을 현실의 삶에서 찾고 있었다. 내가 지금 부끄러워할 만한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요즘 느끼는 가장 부끄러움은 다름 아닌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다. 그래도 해보자고, 잘하면 된다고, 계속 가보자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지만 과연 내가 글을 써도 되는 사람인가, 이 책이 누군가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가, 쓰레기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닌가를 되짚어보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는 매번 나 자신의 부끄러움과 싸우면서 글을 쓰고 있다. 부끄러움이 지나치면 결국에는 사람을 숨게 만들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이런 꿈을 꾸고 나면 아, 자칫하면 뭔가 할 말이 있어서 스스로 칠판 앞에 섰지만 아무런 답도 내 놓지 못하고 돌아서는 꼴이 되겠구나,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2

구독해서 읽고 있메일링 서비스가 하나 있다. 지금까지 꼬박꼬박 메일을 받기만 하고 잘 읽었다, 어쨌다 답장 한마디 보내지 않았다. 메일링 서비스라는 게 답장을 하기도 좀 그렇고, 오는 답장에 일일이 신경 쓰는 게 작가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쓰지 않고 있었는데 지난번 메일에 작가가 직접 ‘피드백을 해주면 좋겠다’는 뜻을 밝히는 바람에 일생일대의 고민이 시작됐다. 피드백을 하는 게 나을까, 그냥 모른 척하는 게 나을까. 매우 재밌게 막힘없이 읽고 있다면 고민 없이 그렇다고 말하겠지만 약간 긴가민가한 부분이 있었다. 이것에 대해 말해도 될지 망설여졌다. 물론 나의 이해력 문제일 수도 있지만 작가가 먼저 독자의 의견을 물어보았으니 이쯤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래도 기분 나쁠 거야, 란 생각과 아니, 어쩌면 도움이 될지도 몰라, 라는 생각이 내 안에서 마구 다투었다. 결국엔 오지랖 떨지 말고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데 어느 새 나는 작가에게 메일을 쓰고 있었다. 귀에 뭐가 씌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드백을 해주면 좋겠다’는 말이 꼭 SOS처럼 들렸다. 작가가 독자에게 보내는! 구조신호!  


메일을 쓰게 된 것은 그간 작가와 친밀해졌다고 생각한 도 있었다. 지난겨울부터 봄을 지나 이제 여름까지, 계절이 바뀌도록 매주 똑같은 요일 똑같은 시간에 메일을 받고 있으니 친밀감이 안 생기고 배기나. 하지만 그건 나만의 생각인지도 모른다. 동시다발로 메일을 보내는 작가에게 독자 개개인을 향한 친밀감 같은 게 있을까. 모른 척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메일을 보내고 나서 그만 더 큰 고민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또 괜한 짓을 했나? 구독형 메일링 서비스를 많이 이용해보지 않아서 이 세계의 문법을 잘 모르는 건가? ‘피드백을 해 달라’는 말에 그냥 ‘잘 읽고 있다. 계속 써 달라’ 한마디로 충분한데 사족이 지나쳤나? 다른 사람들은 어떤 피드백을 할까? 어떤 피드백이 작가에게 도움이 될까? 애초에 피드백이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부터 잘못된 걸까? 피드백이란 과연 무엇인가? 8월 첫날 꾸었던 꿈이 생각났다. 시키지도 않은 답을 적으러 칠판 앞으로 나섰다가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되돌아 나오는 상황. 부끄러울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의 꿈일 거라고 생각해놓고 그새 부끄러운 짓을 해버린 건 아닌지. 


3

‘글은 물체와 같아서 누가 어떤 면을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는 말을 어떤 영화를 보다가 발견했는데 그게 어떤 영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볼 땐 다 아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넘어갔는데 머릿속에 남은 건 이 문장뿐이다. 필자가 아무리 요리조리 살피며 사포질을 해댔어도 독자는 그림자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는 모서리의 거친 부분만 골라서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모서리는 필자가 쓴 것이 아닌가? 그 모서리도 필자가 쓴 것이 맞다. 대체 어떤 영화였지? 아, 생각났다.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4

또 책을 잃어버렸다. 꼭 읽으려고 하는 책은 찾아보면 없다. 며칠 전에는 갑자기 정지돈의 『모든 것은 영원했다』가 궁금해져서 찾아보았는데 없었다. 박수영이 손에 쥐고 읽고 있던 모습이 생생한데 서재를 아무리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서재라고 해봐야 손바닥만 한데. 이중 삼중으로 꽂혀 있는 책들을 다 빼고 안까지 속속들이 다 뒤져보아도 없었다. 박수영도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정지돈의 책은 박수영이 좋아해서 책장 한 칸에 정지돈 컬렉션을 만들어 놓을 정도였다. 거기에도 찾는 책만 없었다. 박수영은 나를 의심했다. 내가 책을 버리거나 중고서점에 팔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는 박수영의 책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고 다시 한 번 못 박았다. 박수영은 안 보이는 책을 찾느니 새로 사자고 했다. 서점도 돕고 출판사와 작가도 돕는 일이라나. 무슨 소리냐고, 집에 있는데 왜 사냐고, 내 책도 좀 사달라고 말했다. 그 책을 발견한 건 찾기를 포기하고 나서였다. 서가 맨 앞 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른 책들 사이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조금만 참고 기다려보면, 아니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있으면 어디선가 나타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잃어버린 것 같다.


잃어버린 책은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다. 도서관 건축 관련 내용이 있어서 2019년 6월에 『도서관의 말들』을 쓰면서 참고하려고 샀다가 필요한 글을 다 쓰고 나자 헌신짝처럼 버린 책. 그 후로 어디에 뒀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이사 올 때 챙겨오긴 했는지. 중고 판매 목록에도 없던데 그렇다면 버린 건지. 책이란 건 왜 꼭 잃어버린 뒤에야 간절히 읽고 싶어지는지. 하필 더운 여름에 안 보이는 책을 찾으려니 온몸에서 땀이 났다. “여름 지나서 찾을까?” “그 책은 여름에 읽어야 제 맛인데.” 며칠을 헤매던 우리는 결국 다시 사는 것으로 합의했다. 박수영은 그게 여러모로 경제적인 일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잃어버린 그 책을 다시 찾는 것이지 않을까. 도서관처럼 별도의 바코드를 달아서 장서 점검할 때 사용하는 스캐너로 찾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새 책이 오면 이번엔 잘 모셔둘 것인가? 그것도 의문이다.


5

부끄러운 일은 뜻밖의 장소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가는 길에 아이스 라떼를 테이크아웃하려고 주문하는 과정에서 나도 모르게 마스크를 벗었다. 왜? 이어폰을 꽂고 팟캐스트를 듣고 있었는데 직원이 뭔가를 물어보는 것 같아서 한쪽 이어폰을 뺀다는 것이 실수로 마스크 귀걸이를 뺀 거다. 이런 멍충이! 직원이 주문을 받다 말고 다소 매섭게 느껴지는 눈으로 말했다. “마스크 써주세요!” 나는 죄지은 사람이 되어 얼른 마스크를 꼈다. 죄지은 것 맞다. 대체 왜 이어폰이 아닌 마스크 걸이를 뺐을까. 같은 귀에 걸려 있어서 헷갈렸나. 헷갈릴 게 따로 있지. 돈 주고 혼나면서 받아온 아이스 라떼는 다행히도 맛있었다.


8월 9일부터 18세~49세까지 일반 국민에 대한 백신 접종 10부제 사전예약이 시작된다. 주민등록상 생년월일 끝자리와 일치하는 날짜에 백신 접종 예약을 할 수 있다. 나도 드디어 일반 국민의 자격으로, ‘사회 필수 인력’이 아니라는 설움을 벗고 백신 접종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전 국민이 주사를 맞고 나면 이 형벌 같은 마스크도 벗을 수 있을까?<끝>

 

매거진의 이전글 대서大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