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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선 Sep 07. 2021

백로白露

09.07.(양력), 태양 황경 165°

‘흰 이슬’이라는 뜻으로 밤의 기온이 내려가고 이슬이 맺히기 시작하여 가을의 기운을 느끼는 절기다. 장마가 끝나서 맑은 날씨가 계속되어 논밭의 작물들이 잘 영그는 때이기도 하다. 전남지방에서는 백로 전에 서리가 내리면 시절이 나쁘고, 백로 무렵에 바람이 많이 불면 벼농사가 좋지 않다고 한다. 경상도에서는 이때 비가 오면 대풍년이 든다고 한다. (출처: 국립민속박물관 www.nfm.go.kr)


지난 9월 1일에 폐막한 제23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기다리던 영화를 봤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퍼스트 카우》(2019)다. 어떤 감독의 영화를 보기 위해 영화제를 손꼽아 기다리고 예매 사이트가 열리자마자 부랴부랴 예매를 하고 폭우가 내리는 중에도 설레는 마음으로 극장에 가는 것까지 너무 오랜만의 일이었다.


켈리 라이카트 감독을 알게 된 것은 지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팟캐스트 〈김혜리의 필름클럽〉에서 감독과 영화를 소개하는 내용을 듣는 순간 몹시 보고 싶어졌고 유일하게 네이버 시리즈온에 올라와 있는 것부터 바로 봤다. 하루 차이로 두 편의 작품 《어떤 여자들》(2016)과 《웬디와 루시》(2008)를 연이어 보고 또 다른 작품도 찾아보려 했지만 그건 어려웠다. 다른 영화제를 통해 작품을 본 사람들의 리뷰나, 영화제와 관련된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으면서 다음 영화제를 기다리던 중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상영 목록에서 이 영화의 제목을 발견했다. 아마도 나와 같은 관객이 적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영화제라는 게 원래 이렇게 경쟁이 치열했나? 온라인 예매 창이 오픈하는 시간에 맞춰 바로 들어갔지만 총 2회 중에 첫 회는 이미 매진. 얼른 다른 날을 찾아 겨우 표를 살 수 있었다. 잠시 뒤에 들어가 보니 두 번째 날까지 모두 매진이었다. 요즘의 한가한 상영관 사정을 감안하고 서두르지 않았다면 이번 기회도 놓칠 뻔했다.


상영관이 있는 월드컵경기장까지는 평소라면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지만 비가 많이 와서 전철을 탔다. 전철 안은 퇴근하는 사람으로 가득했다. 웬만해선 전철을 탈 일이 없는 요즘의 나로선 오랜만에 보는 광경이었다. 극장 안에 입장하자 비로소 영화제에 온 것 같았다. 바깥에는 비도 오고 바람도 불어서 상대적으로 실내가 안온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한동안 한산했던 메가박스가 다시 사람들로 북적이는 풍경니 신기했다. QR 체크인과 손 소독 안내, 티켓 교환, 상영관 입장까지 모두 젊은 여성 스태프가 진행하고 있었다. 대학생 때 생각도 나고 왠지 모르게 심리적으로 안정감이 느껴지면서 나 역시 이들에게 그런 안정감을 똑같이 주고 싶은 마음에 더 조심히 다가가게 되었다.


거리두기를 한 상영관은 나머지 자리가 모두 채워져 있었다. 자리에 앉아 커다란 스크린을 마주한 채 두 시간이 넘는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가만히 앉은 채로 어딘가 먼 곳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마지막 장면에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꾹 참았다. 뒤쪽에서 누군가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났는데 하마터면 나도 덩달아 터져 나올 뻔했지만 간신히 눌렀다. 사람 많은 곳에선 울고 싶지 않았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자 여기저기서 박수 소리가 들렸다. 아아, 이쯤 되자 여기가 집이면 얼마나 좋을까, 모두 잠든 캄캄한 밤으로 순간 이동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마음껏 울고 싶어졌다.  


돌아오는 길에는 박수영과 영화의 좋았던 장면에 대해 이야기했다. 뭔가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한 채 말하기보단 속으로 곱씹고 생각하고 싶어 하는 박수영에게 나만 혼자 쫑알쫑알 쉬지 않고 떠들었다. 그래도 다 풀리지 않았다. 풀고 싶었다. 어딘가에 남기고 싶었다. 내내 내 얘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여준 박수영은 딱 한마디를 했다. “정말 엄청난 영화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이 영화마저 좋을 수가 있을까. 같은 감독의 영화를 지금까지 세 편 보았는데 우선순위를 따질 수 없을 만큼 모두가 다 좋았다. 모두가 다 다르면서, 모두가 다 같았다. 어떻게 하면 이럴 수 있을까. 모든 영화에서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세계가 다 보였다. 모든 장면이 생면부지의 내게 보내온 초대장처럼 느껴졌다. 모든 사람이 그의 영화를 좋아할 거라는 생각은 쉽게 들지 않지만 그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한 작품만 좋아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았다.


《퍼스트 카우》는 ‘새에겐 둥지를, 거미에겐 거미줄을, 인간에겐 우정을’이라는 윌리엄 블레이크의 『지옥의 잠언(Proverbs of hell)』 속 구절과 함께 시작된다. 한 소녀가 두 구의 유골을 발견하고 거기서부터 훌쩍 거슬러 과거로, 그러니까 나란히 누운 채 오랜 세월을 보냈을 유골의 주인이 살던 시대로,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무도 모르게 존재했던 이들의 시간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사냥꾼을 따라다니며 요리를 해주는 쿠키와, 도망자 킹 루. 두 사람은 19세기 미국 개척시대의 오리건에서 만났다. 절박한 순간에 서로를 도와주면서 함께 살게 된 두 사람은 마을에 새로 들어온 암소에게서 몰래 우유를 훔쳐 만든 빵을 팔고 돈을 벌게 된다. 빵이 맛있다는 소문은 마침내 암소의 포악한 주인에게까지 퍼지고, 두 사람은 위기임을 알면서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우유를 훔치기로 한다.  


대강의 줄거리만 봐서는 어쩐지 교훈이 담긴 우화 같기도 하고, 누군가는 뻔한 이야기라며 결과를 예측해볼지도 모르겠다. 쓰는 동안에도 과연 감독이 구현한 장면을 거둬 낸 텍스트만으로 이 영화를 온전히 보여주기란 어렵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일단은 먼저 영화를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다. 하지만 나 역시 누군가 언어로만 들려주는 내용을 듣고 단박에 이 감독과 영화를 좋아하게 될 거라고 예상했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으니 이 시도가 영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믿어본다. 이 턱없이 부족한 문장도 누군가에게는 닿지 않을까. 마침내 영화를 보게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미국 서부에 위치한 오리건은 이전 영화인 《웬디와 루시》의 배경이기도 하다. 《어떤 여자들》의 경우는 바로 옆인 몬태나가 배경이다. 황량한 대자연이나 인구밀도가 아주 낮은 시골과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지금까지 확인한 감독의 주요 탐구 영역인 것 같다. 흔히들 서부극으로 알고 있지만 지금껏 우리가 알던 남자들의 활극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 새롭고 미세한 시선이라는 점이 흥미를 끌었다. 너무 많은 것을 한꺼번에 쏟아내듯 보여주기보다 적은 수의 긴밀한 관계와 거기서 오는 예민한 긴장감을 보여주는 게 이 감독의 특징인 것 같았다. 이를 테면 《퍼스트 카우》에서 쿠키와 킹 루가 만나는 장면,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서로의 삶에 조금씩 영향을 미치는 장면, 특히 주인공 쿠키의 성격을 보여주는 하나하나의 작은 동작과 눈빛과 대사와 말투는 너무나도 조심스러워서 건드리면 톡 터지는 이슬 방울이나 투명하게 빛나는 유리 조각의 예리한 날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에서 그런 인물과 장면을 만나면 마치 ‘네 마음 깊숙한 곳의 가장 여린 부분을 나는 알아’라는 음성을 듣는 것만 같고, 어두운 영화관에서 혼자 느끼는 그때의 기분은 무엇으로 대신할 수 없을 만큼 좋다.   


켈리 라이카트는 1994년에 데뷔한 뒤 27년 동안 일곱 편의 장편영화를 만들었다. 첫 장편 이후 두 번째 영화를 내놓기까지 13년이 걸렸는데 당시 여성 감독이 투자를 받기 어려운 상황과 구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 긴 시간을 결코 그냥 보내지 않았다는 것을 그의 다음 영화들이 증명해주는 것 같았다. 아직 보지 못한 영화도 어서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지난 여러 차례의 영화제에서 모두 반응이 좋았는데도 정식 개봉을 하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런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극장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까. 이 영화를 좋아할 사람이라면 분명히 어느 하나가 아닌 전부를, 모든 장면을, 샅샅이, 낱낱이 좋아할 수밖에 없을 텐데. 켈리 라이카트 감독의 다음 영화를 기다리는 일로 남은 인생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성실하게 살고 싶다. 그가 온힘을 다해 만든 영화를 보는 이 미안하거나 부끄럽지 않도록.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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