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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경 Jun 26. 2022

학교와 실존주의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가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창의성을 가진 존재는 어린아이이다. 또한 타인에 의해 갇히지 않고 자신을 의식적으로 사랑할 수 있는 것도 어린아이이다. 어릴수록 창의적인 눈을 가진 자유의 존재자가 되어 살아 있는 삶을 살아간다. 그런 어린이라는 투명한 실존적 자아들이 타의에 의해 한데 모여 생활하는 곳이 바로 학교이다. 학교에는 체제 유지를 위하여 규범, 질서, 선생님의 지시 등 자율성을 억압하는 각종 요소들이 존재한다. 천편일률적으로 짜여진 교육이라는 장치는 아이들의 머리와 마음을 통제한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La Nausee)>에서 로캉탱이 천편일률적인 삶을 보았을 때 구토하고 구토하지 않는 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없다고 한 것처럼, 존재하기 위해 반항한다. 학교에서 여러 반항의 모습들을 마주하는데, 하기 싫은 것은 억지로 하지 않겠다는 반항, 복도에서는 꼭 뛰어다니는 반항, 수업 시간에 멍 때리는 반항, 규칙을 지키지 않는 반항, 고독할 수 있는 반항 등 반항의 모습은 다양하다. 그러한 반항의 모습은 아이들이 자유를 가지고 활동하는 존재라는 것,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이러한 모습은 어른의 세계에서도 존재한다. 교사들도 시시때때로 반항하며 부조리함에 순응하기도 하지만 맞서기도 한다. 교사는 체제와 교육 장치 운영을 위해 고용된 고용인으로서 체제 유지와 원활한 교육 운영을 위하여 일해야 할 것들을 역할로서 부여받는다. 그 안에서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에 등장하는 ‘지구별 인간’의 모습처럼 어떤 이는 왕처럼 군림하고, 어떤 이는 허영심에 가득 차며, 어떤 이는 사업가로 살아간다. 또 어떤 이는 명령에 충실하게 가로등을 켜고 끄는 사람으로 산다. 자기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아 체제와 자기를 동일 시 하여 눈을 감아 버리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부조리에 대하여 맞서는 나름의 방식들을 갖고 살아가기도 한다. 예를 들면 교육 철학을 정립하여 부조리한 것을 조리 있게 바꾸는 노력, 수동적 수용이 아닌 질문과 탐구를 통해 자신만의 교육 장치를 세우는 것 등 학교에서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교사들도 비위가 맞지 않는 것에 대하여 ‘구토’한다.  

학교나 교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마주하다 보면, 이러한 구토의 모습이 더 적나라하게 표현될 때를 마주한다. 그럴 때마다 학교에 몸담고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공격받는 것 같아 괜스레 기분도 나쁘고 속도 상했었으나, 학교가 국가나 사회적 장치이며 학교의 고용인으로 있었던 교사들의 과거 모습을 토대로 과거의 기억(어쩌면 트라우마)을 안고 살아가는 한 때 아이였던 어른의 당연한 구토의 게워냄이었으리라. 나도 학창 시절 교사에게 지시를 따르지 않거나 규율을 지키지 않았을 때 체벌을 받았던 기억이 있고, 일률적인 학교 야간 자율학습 참여가 싫어서 학교를 빠져나갈 궁리를 갖기 일수였던 기억이 다분하다. 학교는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게 지켜주는 곳이었다기보다는 자기를 잃어버려야만 살 수 있는 곳이었다. 학교는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성을 키울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석하기 일수인데, 사회가 살아남기를 해야 하는 정글과도 같은 곳이니 자기를 잃어버리며 타인에 맞추어 살아남는 법을 터득하는 곳으로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학교는 진정 어릴 때부터 실존을 위협하는 부조리한 곳일 뿐인가?

코로나로 등교를 하지 못하고 아이들이 집에만 있을 때 학교에 가고 싶다는 바람과 보내달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자기를 잃어버리는 곳이 학교인데 그곳에 가기를 바라는 마음의 정체는 무엇일까? 학교는 당연히 가야 마땅한 곳이라는 사회적 관습이나 대중의 의식, 국가의 필요를 개의치 않는 자율적 존재인 아이들은 진심으로 학교에 가기를 바랐다. 그 마음속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 학교에 가면 친구들을 만날 수 있어 함께 놀 수 있는 상대가 있고, 즐겁게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절대자유와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펼칠 수 있는 곳이 학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는 실존을 위협하기도 하지만 실존에 생명력을 넣어 주는 곳이란 말이다. 사르트르는 사회 속에서 자기 자신이고자 하는 사회적 실존의 태도를 중요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학교가 작은 사회로서 실존적 주체들이 만나서 관계를 맺고 소통하는 '함께'의 기쁨을 준다. 학교에 있는 동안 학원으로 불려가거나 놀고 싶은데 엄마에게 호출 당할 일은 없다. 또한 니체가 말한 디오니소스적 열정을 갖고 예술가가 되어 보기, 사랑하기, 배움을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얼마든지 주어진다. 어른이 볼 수 없는 가치를 볼 수 있는 눈도 아이들에게는 있는데- 아이들의 그림만 봐도 알 수 있다. 아이들의 그림에는 어른이 절대 따라할 수 없는 실존적 자기 서사가 담겨 있다. 그러한 자기 서사가 학교에 가면 더욱 찬란하게 펼쳐진다.

학교의 교육은 결과적 본질이 아닌 과정의 본질이다.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닌  아이들의 ‘존재’ 이후에 존재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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