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 문제로 고민하던 시기였다. 세밑 어느 날, 머리를 식히자는 친구의 제안으로 우리는 대구 근교에 있는 팔공산을 찾았다. 집을 나올 때부터 하늘에는 먹구름이 잔뜩 끼어 있었다. 행여 비가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긴 했지만 우리는 갓바위만 갔다 오자며 한두 시간 안에는 별일 없으리라 믿었다. 지방에 사는 젊은이들은 취업이 어려워 힘들어하는 요즘이지만 1990년대 초반 내가 이십 대였을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특히 친구나 나처럼 어문학을 전공하면 교사가 아니고서는 선택할 수 있는 취업의 폭이 그리 넓지 않았다.
대구에 남고 싶어 하는 친구와 달리 나는 서울로 가서 독립하고 싶었다. 88올림픽 이후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면서 대학 동기 중에는 유럽이나 북미 지역을 다녀온 애들이 꽤 있었다. 그들의 여행담을 들으면서 나도 언젠가는 돈을 벌고 자립하면 세계여행을 하리라 마음먹었고, 그래서 직장은 결혼을 위한 중간다리가 아니라 내가 평생 매진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서울에서의 취업은 어려웠고, 과연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직장을 오래 다닐 능력은 있는 건지, 서울로 가겠다는 마음만 먹었지 실제로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던 시절이었다.
친구와 내가 한 시간 정도 산에 오르자 차를 파는 간이매점이 나왔다. 우리는 잠시 쉬어 가기로 하고 각자 커피 믹스 한 잔을 시켜 겨울 산을 바라보며 마셨다. 친구와 얘기를 나눈다고 해서 고민하던 문제가 사라지거나 그 버거움이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게 친구가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많은 위로를 받았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나를 산으로 불러 내준 그녀가 새삼 고마웠다. 카페인으로 재충전하고 다시 산을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자 결국 흐린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눈발이 흩날리는가 싶더니 이내 굵은 눈이 펑펑 쏟아졌다. 대구는 여간해서는 눈이 오는 도시가 아닌데 하필이면 그날 몇십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친구와 나는 하산하기로 하고 오던 길을 되짚어 내려갔다. 그런데 눈이 내리는 속도에 우리의 걸음이 따라가지를 못했다. 울퉁불퉁한 산길은 눈으로 인해 미끄러웠으며, 우리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서로의 팔을 꽉 잡고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떼었다. 바람과 눈이 한데 엉겨 얼굴로 달려드는 통에 앞을 보기가 어려웠고 모자와 파카는 그새 눅진하게 젖어 있었다.
“우리 이러다가 조난하는 거 아니야? 엎어지면 코 닿는 이 팔공산에서?”
친구가 기막히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팔공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대구 사람들에겐 ‘앞산’ 다음으로 친숙한 산이었다. 어머니도 집안의 대소사가 있어 신경 써야 하는 일이 생기면 오전 중에 팔공산의 갓바위나 동화사를 찾아 후딱 당신의 염원을 빌고 오는, 소위 그런 만만한 산이었다. 에베레스트의 안나푸르나도 아니고 우리가 일컫는 산은 바로 이름마저 순박하기 그지없는 팔공산이었다.
그런데 이 만만한 곳에서 눈을 맞닥뜨리자 우리는 좀 당황했다. 눈은 순식간에 산의 모든 풍경과 지형을 하얗게 덮었고 우리가 걸어 올라왔던 길마저 감춰버렸다. 눈이 내리는 소리 외에 주위는 고요했고 그 한가운데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산을 오를 때 간간이 마주치던 등산객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마치 이 넓은 세상에 친구와 나만 덜렁 버려진 듯 이유를 알 수 없는 외로움마저 들었다.
한참 걸었는데도 우리는 왠지 한 자리에서만 맴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불과 몇 시간 전만 해도 지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여유를 주던 즐거운 산행이 이제는 괴로움의 원천이 되었다. 우리는 서로 말이 없어졌고 걱정으로 인해 얼굴은 어두워졌다. ‘이대로 길을 못 찾고 헤매다가 해가 지면 어떡하지?’ ‘우리를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나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남자 주인공 해리를 떠올리며, 그가 겪었던 것처럼 사소하다고 여겼던 일상이 예기치 않은 불행으로 이어지면서 엉뚱한 장소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하는 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들었다.
제1차 세계대전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았던 1930년대 초반, 슬럼프에 빠져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 해리는 아내 헬렌과 함께 아프리카 사파리 여행을 떠났다. 부유한 아내 덕에 평화롭게 여행하던 해리는 어느 날 영양 떼의 사진을 찍으려다가 가시덤불에 무릎이 살짝 긁히는 상처를 입었고, 이를 제대로 소독하지 못했던 그의 다리는 감염으로 인해 괴사하는 중이었다. 또한 여행을 위해 타고 왔던 트럭마저도 고장 나면서 그들은 구조대가 올 때까지 무한정 기다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다. 해리는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면서 작가로서 좀 더 치열하게 살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다가 하얀 만년설로 뒤덮인 아프리카 최고봉 킬리만자로가 자신이 생을 마감할 곳이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패혈증으로 죽었다.
지금 우리의 상황이 헤밍웨이 소설의 데자뷔 아니냐고 내가 친구에게 말하자 그녀는 주접을 떤다며 나를 타박했다. 친구의 비난에 화가 났던 나는 소설 속에서 위기에 처한 해리가 자신을 간호하는 헬렌에게 끊임없이 시비를 걸고 싸움을 했던 것처럼 말다툼을 벌였다.
“그런 말도 못 하니? 지금 우리 모습이 너무 어이없어서 한마디 한 건데 그걸 받아줄 이해심도 없니?”
“야, 너만 불안한 거 아니라고!”
친구가 불쑥 고함을 지르자 나는 그녀를 옆으로 밀었다. 눈 위에 풀썩 주저앉았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더니 나를 밀었다. 그녀의 화난 심정을 대변하듯 강하게 밀린 나는 앞으로 넘어지면서 그대로 얼굴을 돌부리에 박았다. 비릿한 맛이 입안에 느껴지는 걸로 봐서 윗입술이 찢어지면서 피가 난 듯했다. 순간 나는 그녀에 대한 미움으로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게!”
내가 친구의 모자를 벗기고 머리카락을 잡고 흔들자 그녀도 내게 와락 달려들어 우리는 같이 넘어지면서 바닥에 뒹굴었다. 잠시 몸싸움을 벌이다가 하늘을 향해 반듯하게 누운 우리는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눈송이가 얼굴 위로 하염없이 떨어졌다. 이렇게 한 삼십 분 정도 누워 있으면 우리도 이 눈 속에서 사라질 판이었다.
“설마 여기서 우리가 죽기야 하겠니?”
내가 먼저 일어나 옷에서 눈을 털면서 말했다. 그리곤 누워 있는 친구의 팔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래,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내려갈 수 있어.”
결연한 표정의 얼굴로 친구가 내게 웃어 보였다. 나는 입술에 난 피를 손등으로 닦으면서 우리가 올라왔던 길을 찬찬히 살펴보자고 했다. 하지만 길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건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더듬이가 고장 난 곤충처럼 방향감각을 잃고 점점 더 사람이 다니지 않을 것 같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심지어 우리는 나무와 관목을 헤쳐가며 걷다가 경사진 곳에서 주르륵 미끄러지면서 엉덩방아를 심하게 찧었다. 친구가 먼저 울었고 나도 따라서 울었다. 가족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고, 서울로 가기 전에 꼼짝없이 이 설산에 갇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꺼이꺼이 커진 우리의 울음소리는 고요한 산속의 정적을 깼고 누군가가 그 소란에 인기척을 냈다.
“보살님들, 거기서 뭐 하고 계십니까?”
우리가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뒤돌아보니 화려한 단청이 그려진 처마 밑에서 한 스님이 싸리비를 들고 서 있었다. 알고 봤더니 우리는 바로 동화사 뒷마당과 이어진 산자락에서 헤매고 있었다. 머쓱해진 우리는 정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조용히 산에서 내려와 동화사 경내를 한 바퀴 돌고 난 후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버스 창밖을 통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설산이 뒤로 멀어져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우리는 너털웃음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