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8월 초순 내가 고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였다. 방학이기는 했지만, 대학입학 학력고사가 몇 달 남지 않은 상황에서 3학년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 나와서 오전에는 수업을 받았고, 점심시간 이후부터 저녁 6시까지는 자율학습을 했다. 에어컨이 없는 교실에는 65명의 학생이 천장에 매달린 서너 대의 선풍기에 의존에 무더위와 씨름하고 있었다.
내가 앉아 있는 방향으로 선풍기가 왔다 가는 시간은 고작 2초 정도였고, 그건 겨우 내 머리카락 몇 올 정도 들어 올렸다 내릴 미약한 바람에 불과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얼굴과 등에서는 비지땀이 흘러내렸고,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기자가 나와 매일 38도 이상 찍고 있는 대구의 한낮 더위가 얼마나 힘든지를 설명하면서 잔뜩 달구어진 아스팔트 도로 위에 달걀을 깨트려 익히는 장면을 내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더위보다 더 무서웠던 건 ‘1시간 덜 자면 대학에 붙고 더 자면 떨어진다’라는 선생님의 엄포가 가져온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이었다. 공부를 잘하건 못하건 간에 우리는 입시에 대한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모두 한 번씩은 빡빡한 수험생의 일상으로부터 도망가는 일탈을 꿈꾸었다. 불안과 더위,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르지 않는 답답함 등이 나를 무기력하게 만들 그즈음 나는 우연히 어머니가 숨겨놓은 비상금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가족의 눈을 피해 안전하게 돈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로 장판 밑을 자주 이용했다. 어머니의 이런 습관을 눈치챈 나는 가끔 방안의 장판을 들어보곤 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안방 아랫목에서 한동안 보이지 않았던 돈이 반쯤 접힌 채 놓여 있었다. 이게 웬 재수냐 싶어 나는 얼른 돈을 내 가방에 숨겼고, 다음날 학교에 가서 친구들에게 자랑했다. 당시 46,000원이면 꽤 큰 금액이었고 친구들은 환호했다. 그중 한 명이 나를 부추겼다.
“음, 내가 볼 때 너 부메랑 파마를 하면 정말 예쁠 것 같아. 우리 그 돈으로 파마하러 시내에 나가자!”
그러면서 친구는 부메랑 파마가 요즘 제일 유행하는 스타일이며 영화배우 브룩 쉴즈처럼 풍성하고 구불거리는 머릿결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여성 잡지와 하이틴 로맨스를 즐겨 읽는 그 친구는 우리보다 조숙했고 세상 물정에도 밝아 그녀의 말에는 뭔가 어른처럼 신뢰감이 느껴졌다. 1981년에 개봉한 영화 ‘끝없는 사랑’에 나온 브룩 쉴즈는 세기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고 그녀의 사진을 코팅해서 가지고 다니는 여학생들이 많았다.
브룩 쉴즈의 머리 스타일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아니 사실은 그냥 공부 하기가 싫었던 나와 친구는 자율학습 시간에 교실에서 몰래 빠져나와 시내로 갔다. 보세 옷가게를 기웃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분식집에 들어가 순대, 쫄면, 떡볶이, 납작만두를 사 먹었다. 그리곤 저녁 6시가 조금 넘어서 우리는 결연한 표정을 지은 채 미용실로 들어갔다.
내가 파마하겠다고 호기롭게 선언했지만, 명백한 교칙 위반이므로 우리는 솔직히 겁이 났다. 하지만 그녀나 나나 이쯤에서 그만하고 집에 가자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다. 뭐랄까, 일종의 자존심 싸움 같은 오기가 발동했다. 교복 자율화로 인해 우리는 평상복 차림이었고 키가 컸던 탓에 미용실에서는 별 의심 없이 우리를 대학생처럼 대했다. 내 생애 처음 하는 파마라 나의 심장은 쿵쾅거렸고, 미용사가 머리를 롯트로 감기 시작하자 나는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었다. 그건 아마 친구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았다.
그런데 파마하는 데 최소 서너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우리는 미처 몰랐다. 오랜 인내심 끝에 파마가 완성되었을 때는 밤 10시가 넘었고, 나의 머리카락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곱슬곱슬했다. 우리는 직감적으로 망했다는 걸 알았다. 당장 다음날 학교에 어떻게 갈지, 두려움으로 인해 내 심장은 쪼그라들었다. 밤 11시가 다 되어 집에 들어가자 온 가족이 난리가 났다. 돈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는 파마가 아니어도 이미 나를 단죄(?)할 계획을 세워 두고 있었는데, 내가 뽀글뽀글한 머리를 한 채 나타났으니, 불같이 화를 냈다. 그날 내가 어머니로부터 맞았던 등짝 스매싱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매운 손맛이었다.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면서 학교에 가서 혼날 생각에 걱정이 되어 밤새 잠을 설쳤다.
내가 '머리를 감으면 파마가 빨리 풀리므로 당분간 조심하라'라는 미용사의 말을 기억하고, 파마를 한 그다음 날 아침부터 한 달 동안 열심히 머리를 감았는데도, 웨이브는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내 눈에는 오히려 더 고불거리는 것 같았다. 교실에 도착하면 나는 파마를 권유한 친구를 곧장 내 자리로 불러내 디스코 머리를 땋도록 했다. 애초에 그녀가 부추겼으므로 그건 당연한 벌칙이었고 그녀는 묵묵히 감내했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머리 손질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므로 사냥을 하느라 미친 듯이 뛰어다닌 수사자 갈기처럼 집에서는 잔뜩 헝클어진 털 뭉치 같은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런 나를 보면서 가족들은 “그러잖아도 더워 죽겠는데 더 덥다”라며 성화를 부렸다.
또 하루는 늦잠을 자서 지각하는 바람에 미처 머리를 땋지 못하고 운동장 조회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학생주임이 내 앞에서 서서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며 “너 파마 했지?”라고 날카롭게 물은 적이 있었다. 나는 마음속으로는 덜덜 떨었지만, 시치미 뚝 떼고 “원래 곱슬머리입니다!”라고 끝까지 우긴 탓에 학생주임이 피식 쓴웃음을 지으며 그냥 넘어갔던 일은 나의 영원한 고등학생 시절 무용담이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학생주임은 내 대답에 어이가 없었을 테지만 나의 일탈을 그냥 눈감아준 듯했다. 이제는 모두 추억이 되었지만, 그 여름날 부메랑 파마로 인해 힘든 고3 시절이 의외로 빨리 지나간 것은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