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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aris Jul 24. 2023

내가 글을 쓰는 이유

    필자가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린 지도 3주가 되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두 글이 모두 10개 이상의 라이킷을 받고 구독자들도 꽤나 생긴 것에 대해 꽤나 뿌듯함을 느끼고 있다(이 자리를 빌려 필자의 글들을 읽은 모두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너무 지루한 글에 깜빡 졸은 독자가 있다면 덜 지루한 문체를 개발하도록 노력하겠다). 이 시점에, 자칫하면 기고만장해져 모든 것을 망치기 쉬운 우매함의 봉우리 위에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필자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아기 때 나는 말이 늦게 트였지만, 트인 순간부터 집안은 조용할 때가 없었다. 는 내가 어렴풋이 들은 모든 것을 입 밖으로 내야만 성이 풀리는 아이였다. 어린이집에 있는 장난감에 쓰인 설명서부터 나무블록이 담긴 박스 위에 써져 있는 몬테소리라는 완전히 새로운 단어가 무슨 뜻인지에 대한 의문까지 전부 내 입 밖으로 꺼내는데서 즐거움을 얻었다. 밖에서 아이들과 몸을 부딪히며 뛰놀기보다는, 책을 읽고 그 안에서 입과 머리로 뛰노는 것을 좋아했다. 그렇게 방구석을 좋아하는 나를 우려하면서도 받아준 부모님의 사랑 아래 나는 초등학생이 되었다.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이라는 희미하지만 큰 벽을 넘은 것이다. 그리고 그 벽 너머 나에게 돌아온 것은 사랑과 관심보다는 낯섦에 대한 경계심이었다. 부모님과 달리 같은 반 아이들은 끝없이 얘기하는 나에게 사랑이 아닌 경계심과 무관심으로 답했다. 아쉽긴 하지만,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다들 그렇듯 너무나도 다른 서로를 대하는데 서툴렀을 뿐이다.

    더 이상 나의 호기심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던 나는 내 안으로 파고들며 다른 생존전략을 찾았다. 바로 영어이다. 부모님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나는 영어를 나의 취미로 삼았다. 읽고, 말하고, 쓰고, 듣고. 학교 성적은 아무래도 좋았다. 난 그저 재밌어서 영어를 두 번째 국어로 만들기 시작했다. 영어에 자신감을 얻은 초등학교 6학년의 나는, 중학교에 가면 모든 과목을 씹어먹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으로 가득했다. 그러나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성적에 대한 중요성이 다달이 강조되며 그런 순수한 호기심이 설 자리는 없었다. 오직 경쟁과 성적만이 남은 교육 환경에서 순수한 호기심은 설 곳이 없었다. 공부도, 탐구도 이유 없이 행해지는 것은 시간 낭비였다. 전부 생활기록부를 위해 어떤 명확한 목표를 위해서 하는 활동이어야만 했다. 교과세부특기사항과 생활기록부에 '그냥'은 마치 하나의 욕설처럼 터부시되던 단어였다. 다른 아이들은 원래부터 이런 활동이 맞는 성향이었는지, 아니면 그런 환경에 적응할 방법을 찾은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보다 훨씬 좋은 성적을 더 적은 노력을 들이고 받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지금껏 내가 옳다고 생각하며 행한 나만의 공부는 의미 없는 '뻘짓'인가? 이러한 괴리감에 고통받던 나는 고등학생이 되자, 나만의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내가 더 이상 내가 아니기 전에 지금 나의 발자국을 남기자. 학교 성적은 상관없다.

     다행히도 나에게는 시작점이 있었다. 바로 영어이다. 아무 이유 없이 얻었기에 더더욱 나의 것인 영어. 영어로 나만의 고유한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처음 한 시도는 번역이었다. 나름 재미도 있고, 결과물 또한 괜찮은 평가를 받았지만 번역을 하면 할수록 무언가 새로운 것을 원하는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번역은 원문에 대한 반역이라는 말이 있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원문이 쓰인 뉘앙스나 문화적 맥락을 파괴하고 번역가의 입맛대로 재조립하는 행위라는 의미이다. 번역된 문장은 더 이상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 번역가의 작품인 것이다. 그러한 원문과 번역본 사이의 이질감이 나는 불만이었다. 원문과 번역본 전부 나의 의지 아래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 방법을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버티는 도중, 2016년 어느 겨울밤에 세상이 나에게 아이디어를 선물해 주었다.

    평소같이 왜 하는지 절반밖에 납득이 되지 않는 공부를 마치고 의자에 앉아 쉬던 중, 아무 맥락 없이 내 머릿속에 어떤 여자아이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검은 머리에, 맑은 녹색 눈을 가지고 귀여운 치마와 티셔츠를 좋아하며, 선물 받은 베레모를 아끼는 어떤 여자아이였다. 마치 대천사 가브리엘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처럼 나는 휴대폰의 메모장을 켜 그 아이의 특징을 적어나갔다. 그날이 그 아이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빠르게 적는 것이 용이한 영어로 처음부터 끝까지 적어나가고, 이후 조금 더 섬세한 한글로 다시 적었다. 모든 설명을 마친 내 머릿속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이미 정해져 있었다. "퓨리티"(Purity). 순수히 나로부터 비롯된 인물이기에 무엇보다 순수한 아이에게 걸맞은 이름이었다. 그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그 아이가 있을법한 세계를 만들고, 그 세계에 마법과 기술이라는 양념을 첨가했다. 국어 시간에 배운 소설의 3요소인 인물, 사건, 배경을 살찌워 마침내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 세계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 하나의 커다란 유니버스가 되었다. 이제 퓨리티 아나벨라 셀레네와 나는 나이도 다르고 성별도 다르지만 지금까지 알던 세상을 벗어나는, 갈등과 위험과 기회가 가득한 세상의 출발선 위에 섰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 세계에는 치명적인 오점이 있다. 바로 내가 그 세계를 남에게 보여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무리 멋진 무언가가 나에게 있어도 남들이 봐주지 않으면 그 의미가 퇴색되기 마련이다. 머리로는 그 사실을 알고 가족들도 몇 번이고 글을 보여달라 부탁했지만 그럴 용기가 서지 않았다. 두려웠다. 초등학교 때 멋모르고 나선 풋익은 유치원생처럼 비웃음 당하고 경계당할까 봐 두려웠다. 가족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퓨리티의 이야기는 오직 같은 작가인 학교 후배 한 명과, 일산 어딘가에 거주하는 글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주 마음씨 좋은 지인 한 명만이 알고 있다. 그렇게 신뢰하는 그들에게도 글을 보여주기 위해 전송 버튼을 누르기 전에 수많은 부끄러움과 불안감이 든다. '이번 글은 별로 마음에 안 들어하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이 주된 원인이다. 이외에도 대학교에서 느낀 불안함과 의구심, 그리고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다. 그렇게 불안감을 껴안은 채로 나는 군대에 다녀왔다.

    군대를 다녀온 후의 남학생들은 생각이 많아진다고들 한다. 나는 더더욱 스스로에게 질문을 많이 하는 내성적인 성격이기에 안 그래도 많은 생각이 더더욱 많아졌다. 이에 나는 고민 없이 휴학을 연장하고 생각을 정리하는데 집중했다. 앞으로의 진로뿐만 아니라, 군대라는 세상에 강제적으로 노출된 나를 정리하는데 집중했다. 그러한 일환으로,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걸 아시는 부모님의 추천으로 내가 평소에 드는 생각을 남에게 보여줄 곳으로 브런치를 택했다. 물론 필자는 브런치에서도 발행 버튼을 누르기 전에 수많은 부끄러움과 불안감이 든다. 하지만 그런 작은 불안감을 겪어야 나중에 꼭 필요할 때 나의 주장을 밀고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기는 법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일종의 심리적 백신이다. 나도 언젠간 많은 수필들과 독후감들을 올린 후, 나의 소설을 세상에 선보일 용기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다. 세상에 남기는 나만의 발자국도 누군가가 봐야 완성되는 법이다. 아직까진 아주 유치하고 교훈도 없고 아직 제목도 없는 개연성 없는 뒤죽박죽인 소설이지만, 죽기 전에 세상 앞에 던져두고 떠나고 싶은 엄연한 나만의 이야기이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 하지 않던가. 나도 내 뒤죽박죽 엉망진창 소설이 세상에서 가장 재밌고 가치 있는 소설이기에 나는 오늘도 구글 문서를 켜 퓨리티와 나의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이제 소설을 넘어 글쓰기라는 행위가 나만의 안식처가 되었다. 아무리 남 앞에서는 떨리더라도 빈 문서와 깜빡이는 커서 앞에서 나는 조리 있는 하나의 주장을 만들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즉, 내가 글쓰기를 시작한 이유는 내성적인 내가 세상과 원활하고 자신 있게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내 소설의 서문으로 이 글의 마무리를 대신하고자 한다. 모두 이 풍진 세상과의 소통 싸움에서 지지 않기를 바란다.

이 세상에 정답은 없지만, 오답은 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합니다. 실제로 옳은 말인 것 같기도 하고, 설령 전부 다 진실이 아니라고 하더라고 사람 살아가는 동안에는 충분히 가슴에 품을 말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어린이에서 청소년, 청소년에서 풋어른이 되어가면서 그 역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집니다. 내가 가는 길이 정답이고, 오답은 없다고 누구보다 당당하게 주장하는 사람들이요. 그런 사람들이 주로 어떤 집단에서 좋은 의미로나, 나쁜 뜻으로나 중심이 되더라고요. 결국엔 나중엔 이러한 목소리 크고 가진 게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흐름을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굳은 믿음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어떨까요? 오답과 정답을 가릴 자신만의 정답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이라는 이름의 휘몰아치는 태풍 어딘가에서 어떤 운명을 맞이할까요? 성공이라고 자주 언급되는 자의 답안지를 베껴서 그것에 자신의 행동을 맞춰가면서?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곧 정답이라 판단하며 고정된 기준 없이, 바람에 날아가는 나뭇잎처럼 살아야 할까요? 안타깝게도 그 답은 누구에게서 찾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답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그저 잘 찾아보기만 하면 됩니다. 걱정 마세요, 평생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답은 내 안에 있다는 사실만 믿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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