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과 멋진 신세계 사이에서
야만인도 <멋진 신세계>의 문명인도 아닌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책 <멋진 신세계>는 우리에게 더 일반적으로 다가오는 디스토피아와는 조금 다른 사회이다. 이 신세계의 삶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는 그 누구도 시민들을 감시하지 않고 있으며, 정부가 무의미한 전쟁에 시민들을 밀어 넣고 있지도 않으며, 약 한 알 먹으면 나을 질병으로 사람이 죽지도 않으며, 부유층이 사치를 부리는 동안 하층민이 흙을 퍼먹으며 하루하루 연명하지도 않는다. 그전에, 부유층과 하층민이라는 경제적 차이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전쟁, 질병, 기아, 가난이 전부 지워진 이 세계는 얼핏 보면 디스토피아가 아닌 유토피아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토마스 모어의 저서에서 다룬 이상적인 세계인 유토피아와 달리, 그 누구도 이 책을 이상적인 미래상이라고 하지 않는다. 사람의 욕구를 모든 면에서 만족시키는 이 세계는 단 한 가지의 치명적인 허점이 있다. 바로 그 세계는 인간을 위해서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허점이다. 그렇다면 이 세계는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으며,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는 우리는 과연 무엇인가?
작중에서 신(God)이라는 단어는 포드(Ford)로 대체되어 있다. 종교적 상징물인 십자가 또한 윗부분이 잘려나간 T자 형태를 하고 있다. 세계 최초의 대량생산이 가능한 자동차의 모델과 그 창조자의 이름 밑에서 사람들은 효율, 사회적 안정, 소비, 그리고 쾌락만을 입력받게 된다. 현대 산업구조의 기초를 창시한 사람을 곧 신으로 모시는 도그마 아래 살아가는 구성원들은 사람보다는 하나의 부품으로 취급된다. 이 책의 세계를 이루는 사회 구성원들은 태어나기도 전에 어떤 계급에 얼마나 사람이 필요할 것인지 정해지며, 필요한 신체 상태와 알아야 할 지식이 전부 교육된 상태로 사회에 나온다. 여러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멋진 신세계에서는, 각자 맡아야 하는 역할의 중요성을 따져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의도적으로 불균형하게 발달된다. 이들의 사회와 문화는 현대 세계에서 보는 우리와는 너무나도 이질적이라, 정말 저 세계에 사는 것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인지조차 의문이 들 정도이다. 비록 이들과 우리는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비슷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지만, 리처드 도킨스가 주장한 일종의 문화적 유전자인 '밈'은 서로 닮은 점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이 다르다. 즉, 문화적으로 보면 우리는 전혀 다른 종이기 때문에 저들의 세계는 우리에게 전혀 멋지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멋진 신세계를 멋지지 않다고 인식하게 만드는 요소는 무엇일까. 바로 멋진 신세계의 정책들, 보카노프스키 과정부터 소마까지 모든 대량생산과 사회적 안정에 중점을 둔 이 정책들에 얼굴을 찌푸리고 도덕적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대부분은 인간성이 결여됐기에 혐오감이 든다라는 답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인간성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이길래 서류상으로는 정말 완벽하고 효율의 극치를 달리는 제도에 브레이크를 거는 것일까? 그 답은 멋진 신세계의 이방인, 야만인 존에게서 찾을 수 있다. 야만인 보호구역에서 나고 자란 존은 책을 읽는 우리의 시선에서 멋진 신세계를 바라보며, 그가 글을 읽는 법을 배울 때 읽은 셰익스피어 작품들을 인용하며 이 세계에 대한 평가를 내린다. 소설의 최후반부에서, 존과 멋진 신세계를 통치하는 10인의 통치자들 중 한 명과 나누는 대화에서 우리가 왜 이런 세계를 거부하는지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존은 신세계에서 이미 사람들이 이루어낸 가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위한 투쟁 또한 위대하다고 주장한다. 오히려 진정한 문명인이라면 쾌락으로 스스로를 물들이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인내하며 용기를 내 목적의식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셰익스피어의 걸작 <햄릿>의 구절 "못마땅한 모든 장애물을 인내하는 대신에 없애 버리죠. 포악한 운명의 돌팔매질과 화살들에 시달릴 것이냐, 아니면 바다처럼 밀려오는 고난을 맞아 무기를 들고 싸워 그 뿌리를 뽑을 것이냐, 어느 쪽이 우리들의 이성을 위해 좋으냐..."을 인용하며 이를 뒷받침한다. 즉, 모든 결과물과 혜택이 주어진 멋진 신세계는 허울로만 이루어진 세계이며, 그 이득을 얻기 위한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정이 없다는 사실을 비판한다.
야만인 존의 말처럼, 우리는 어떠한 성질들을 가치 있다고 말하며 그것을 위해 끝없이 투쟁한다. 그 가치를 얻지 못하더라도 그 과정 또한 목표로 하던 가치만큼이나 귀중하게 여겨진다. 야만인 존과 독자들의 세계는 무스타파 몬드와 다른 9인의 지도자들이 통치하는 세계만큼 멋지지는 않지만, ‘희망’이라는 미덕으로 그 멋짐을 대신한다. 신세계에선 희망을 가질만할 것이 없다. 무언가에 대해 희망을 가진다는 의미는 그것이 내게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며, 신세계에는 사람이 원할법한 모든 것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다른 사람조차도 ‘모두는 모두에게 속해있다’라는 이름 아래 서로를 탐하는 것이 자유롭다. 그러나 항상 무언가가 부족한 우리는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진 채 인내하고 용기를 가지며 우리 자신을 가꾼다. 마치 근대 이전 성행한 연금술이 금을 만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현대 화학의 근간을 다져놓은 것처럼, 우리는 실수와 실패를 발판 삼아 더 위대한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비록 그러한 실패와 실수를 금기시하고 그것의 존재를 꺼려한다는 배신을 밥 먹듯 저지르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시행착오는 오히려 미소를 지으며 사람들에게 새로운 발전의 가능성의 길을 보여준다. 이러한 경험들이 학습을 통해 내려오면서, 우리는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전한 문제 해결 방법을 알게 되어 이전에는 신경 쓰지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분야를 헤쳐나가는 도전과 투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갈수록 이러한 도전들과 투쟁들은 더더욱 어려워지고 복잡해졌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낸 후 얻은 보상은 그 어떤 촉감 영화나 소마보다 우리를 오랫동안 행복하게 만든다. 바로 이것이 존이 말했던 가치의 의미이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런 가치를 좇는 그에게, 고난 없는 쭉정이 같은 긍정적인 자극은 그 어떤 가치도 없게 느껴질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멋진 신세계는 마치 바닷물로 칼을 만들려는 것 같은 공허한 시도처럼 보일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당신 뜻대로>를 인용하자면, “역경이야 말로 소중한 것”인데, 몬드의 신세계에서는 그 가장 소중한 것을 없애버렸기 때문에 그는 이 세계를 절대 좋아할 수가 없다. 그러나 신세계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야만스럽다고 생각한다. A에서 B까지 가는데 더 빠르고, 효율적이고, 안정적인 방법이 있는데 굳이 그러지 않는 것을 야만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멀리한다. 우리도 현실에서 이와 비슷한 행위를 자주 접하고 스스로 행하지만, 그래도 필자는 우리가 레니나 크라운 같은 '문명인'보다는 존과 더욱 가까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케이블카나 자동차가 있음에도 왜 등산이나 자전거 국토종주 같은 불편하고 비효율적인 행위를 고수하는 것인가? 답은 간단하다. 우리는 그러한 불편함을 극복하는 하나의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언가 불편함을 느끼면 그것을 벗어나고 개선하려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다. 그 본능 덕분에 우리가 원시인에서 지금까지 진화해 온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매우 이중적이기 때문에 일부분은 여전히 불편함을 고수한다. 불편함은 역경을 의미하며, 우린 역경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쾌감을 얻도록 진화하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라는 커다랗고 멋진 기계를 구성하는 부품도, 불편함을 강제로 주입당하며 고통받아야 하는 노예도 아닌 인간, 다시 말해 '멋진 야만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