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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olaris Jul 04. 2023

<멋진 신세계>, 완벽이라는 이름의 디스토피아

우리가 추구하는 완벽을 얻어서는 안되는 이유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 묘사하는 신세계는 불편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사회이다. 개인적으로는 즐거운 자극을 받으며 생활할 요소가 가득하다. 사회생활에서 받는 짜증감과 우울감은 소마 한 알에 사라진다. 그러나 사회에서 개인의 역할은, 사회라는 커다란 기계를 유지시켜 주다가 수명이 다하면 버려지는 부품이다. 단적으로 이를 보여주는 예시가 바로 달라진 탄생의 배경이다. 이 책에서 개인들은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요구에 의해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다. 단순 노동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 알코올로 뇌에 의도적인 장애가 만들어져 생기는 감마, 엡실론 계급이 더 많이 만들어지고, 고지능직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면 그렇지 않은 알파, 베타 계급이 더 많이 태어나는 원리이다 그리고 개인은 이 모든 사실을 어쩌면 너무 당연하게 이해하고 있다. 어릴 때부터 죽음은 당연한 것이라고 교육받고 그에 대한 비판을 할 틈을 주지도 않은 채 즐거움이 가득한 세계에 언제나 연결되어 있게 하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은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명제에 대한 명백한 반례라고 볼 수 있다.


단순히 생각하면 이 책에서 말하는 세계는 진정으로 멋진 신세계이다. 하루 주어진 일을 완료하고, 사회가 제공하는 오락으로 오감을 자극시키며 내일의 일을 위한 준비. 이 ‘완벽한’ 순환 속에서 그들은 존재한다. 지겨운 업무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넷플릭스, SNS, 유튜브 같은 영상매체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해소하며, 내일을 위한 준비를 하는 현대인들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장면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만약 디스토피아의 도래가 필연적이라면, 멋진 신세계의 디스토피아가 그나마 낫다’.라고도 생각할 수도 있다. <1984>가 자극 자체가 극도로 제한된 세계라면, <멋진 신세계>는 자극이 많다 못해 포화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현대 미디어에서 자극을 좇는 것이 일상이 된 세계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이 된다.

그러나 이런 완벽해 보이는 세계도 진정 완벽할 수는 없다. 소설의 주인공 ‘버나드 마르크스’는 이러한 자극만이 가득한 세계에서 유일하게 이런 사회에 의문을 던졌었다. 그러나 그는 야만인 보호구역으로의 여행에서 데려온 야만인 ‘존’과의 만남을 주선하며 잠깐이나마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가 이후 자신의 성공 요인이었던 존이 신세계에서 지나칠 정도로 인기를 얻자 그는 다시 한번 중요도가 떨어지게 되어, 결국엔 다시 이전의 열등감 가득한 인물이 된다. 마르크스는 잠깐이나마 야만인이라는 새로운 자극을 가져온 사람이라고 추앙받았지만, 그 또한 자극이라는 커다란 기계의 한 부품이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이야기를 보고 비참함, 혹은 동정심을 느낀다. 이러한 부정적 감정과, 그 뒤에 따라오는 의문이 우리가 기계가 아닌 사람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 그렇지만 사람도 결국 동물이기에 그런 증거를 거부하고 편한 것을 원하기 마련이다. 생각하는 수고, 노력하는 수고를 줄이는 것을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는 만들어져 있다. 우리는 곧 본능적으로 멋진 신세계를 탐하기 마련이다. 결과적으로 그런 세계를 만드는 시도가 실패할지라도, 그 과정에서 얻은 지혜로 우리는 금단의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 간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과 소통하고 싶은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인류는 무선통신을 만들어냈다. 목소리로 무선통신을 하고 싶어 하는 인류는 전화를 만들어냈다. 전화를 집안이 아니라 밖에서도 하고 싶은 우리는 휴대폰을 만들어냈다. 즉, 우리의 삶을 편하게 만들다 못해 삶 그 자체가 된 기술들은 전부 이러한 멋진 신세계를 위한 욕구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도 자체가 불순한 것인가? 이런 화려한 비극의 세계가 만들어질 본능 자체를 우리는 거부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멋진 신세계>는 그러한 본성을 거부하지 않았을 때 일어날 일이 아니다. 이 책은 그러한 본성이 통제되지 않았을 때 일어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극은 서로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이러한 본성을 거부하는 것이 그것을 통제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본성을 억누른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런 모습을 다룬 책이 바로 조지 오웰의 <1984>이다. 즉, <1984>와 <멋진 신세계>는 디스토피아라는 동전의 양면이다.


음식처럼 자극도 편식, 과식, 결핍의 위험이 있다. 긍정적 자극의 과잉은 사람을 백치로 만들며, 부정적 자극의 과잉은 사람을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렇기에 우리는 편리함, 효율성, 즐거움을 추구하되, 그것을 어느 정도 거부할 이성 또한 필요하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은 좋으나, 그것을 얻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즉, 어느 정도 덜 완벽한 상태가 가장 바람직한 상태라고 생각한다. 완벽이라는 뜻은, 산 정상에서 더 이상 오를수는 없는것 처럼 더 이상 진보해 나갈 상태가 없는, 인류의 본성이 절대 달성될 수 없는 영구적인 욕구불만 상태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완벽을 추구하되 그것을 거머쥐어서는 안 된다. 완벽이라는 빛과, 그것을 달성할 수 없다는 어둠을 우리는 모두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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