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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성중 Mar 28. 2021

지속 가능한 삶에 대하여

서론. 가벼운 선택과 거대한 결과

  이 글은 성인이 된 이후로 품고 있던 생각과 작은 행동들이 단 하나의 다큐멘터리로 인해 하나의 단어로 모이게 되며 시작됐다. 넷플릭스에서 제작된 <씨스피라시>(seaspiracy)은 어업이 종국적으로 해양생태계를 완전히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속 가능한 어업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모델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이를 규제할 주체도, 역량도, 의지도 없다. 우리는 플라스틱이 해양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50%를 훨씬 웃도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어업으로 인해 발생한다는 것은 모른다. 물론 나만 몰랐을 수도 있다. 적어도 나는 몰랐다. 그리고 내가 최대한 피하려고 한 플라스틱 빨대가 해양 플라스틱 쓰레기에서 차지하는 양이 0,03%에 불과하다는 것 또한 몰랐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 다큐멘터리는 단지 어업과 해양생태계의 문제를 포함하여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갖게 한다. <씨스피라시>를 통해 윤리적인 이유로 어류를 더는 먹지 않는다면 다음은 닭, 소와 돼지고기 등의 육류가 가진 문제가 뒤따라온다. 소는 이미 탄소배출의 주범으로 유명하고, 곡물 가격을 떠받혀 기아 문제의 핵심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공장식 축산으로 길러지는 닭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정권의 정치적 성향과 상관없이 질병 감염을 막기 위해 닭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살상해왔다. 돼지 문제는 ASF(아프리카 돼지열병)으로 닭과 같은 처지에 있다는 것이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걸 끊고 모두가 채식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한때 윤리적인 문제로 채식주의자가 되기로 했으나 여러 현실적인 문제와 타협하며 지금은 일반식을 하고 있다. 물론 내가 조금 비겁하고 의지가 약해서 그런 것이기도 하지만, 이는 모두에게 해당할 수 있는 일이다. 이미 이 산업들과 관련해 생계를 이어가는 사람은 셀 수도 없고, 수천 년을 이어온 문화와 식습관은 너무나 거대한 벽이다. 그리고 제일 먼저 이 윤리적 문제를 모두에게 설득시킬 만한 사회적 합의도 이루지 못했다. 당장 나부터 육식을 모두 끊으라면 할 수가 없다. 플라스틱이 문제인지 알면서 쓸 수밖에 없듯이 나도 나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후위기를 비롯한 앞으로 다가올 심각한 재앙은 우리에게 ‘지속가능성’의 문제를 던져주고 있다. 미래는 끊임없는 현실의 연속이다. 미래는 우리가 하는 수많은 선택이 쌓여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지속가능성은 무엇일까. 이 단어 안에는 여러 질문이 숨어 있다. 무엇이 지속 가능하고, 무엇을 지속해야 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이 단어가 단지 인권과 환경 등의 거대 담론에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라고 본다. 어떤 상태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지속가능성에는 상태와 행동이라는 두 가지 층위가 함께 섞여 있다. 쉽게 말해서 우리는 어떤 이상적인 상태가 지속되게 하려면 지속 가능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갑자기 육식을 끊고 사는 등의 행동은 지속 가능하지 않기에 올바른 전략이 아니다.   


  가령, 다이어트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여기서 질문은 자연스레 따라 나온다. 일단 왜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가? 내 몸은 살을 빼야만 하는 상태인가? 그렇다면 어떤 행동이 뒤따라야 하는가? 또 그 행동지속 가능한가? 실패하지 않는 다이어트는 바로 이 질문들을 통해 이뤄질 수 있다. 다이어트의 목표가 되는 상태는 지방을 줄이고 근육량을 늘린 몸이다. 내 몸이 굳이 다이어트를 할 필요가 없는 상태라면 다이어트는 괜한 강박일 수도 있다. 그런데 만약 해야 한다면 이를 위해서는 탄수화물과 지방 섭취를 줄이고, 단백질 섭취를 늘려야 한다. 이 기본적인 원칙 아래에서 우리는 이 목표를 지속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야 한다. 무작정 탄수화물 섭취를 끊고 풀과 닭가슴살만 먹는 것은 지속 가능하지도 않고 좋은 상태도 아니다. 우리에게 지속 가능한 것은 어쩌다 햄버거를 먹을 때 제로 콜라를 먹는 선택이다. 순대국밥을 먹을 때 국물을 남기고 밥을 반만 달라고 하는 정도의 선택이다. 매일 단백질 섭취량을 계산해보고 더 챙겨 먹는 정도의 선택이다. 이런 선택들이 쌓여 장기적으로 다이어트의 목적인 상태에 이른다. 


  나는 다른 거대 담론의 문제들도 이런 선택들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무엇이 지속 가능할 지에 대해 공부하고, 실천하고, 기록하려고 한다. 이번에 브런치를 통해서 이야기하려는 것은 바로 지속가능성 속에 있는 함께 뭉쳐 있는 상태와 행동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이 연재는 나의 실패 기록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실패했다면 그 방법은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에 대한 증명이니 또 다른 성공일 수도 있다. 그 선택지의 문제를 살펴보고 다른 가능성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나는 철학을 공부하며,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은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이를 철학에서는 이론과 실천이라고 한다. 이론과 실천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실천 없는 이론은 공허하며, 이론 없는 실천은 무모하다. 그러므로 이념을 떠나서 마르크스의 다음 말은 반드시 우리 마음속에 새겨둘 가치가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했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마르크스,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중 일부     


  이 말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짐을 지우고 있다. 첫째, 우리는 세계를 해석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그래야 무엇을 변화시켜야 할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둘째,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행동해야 한다. 이 행동은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의 무모한 폭력을 뜻하지 않는다. 우리 삶의 가벼운 실천들이 바로 이 행동이다. 푸코의 말처럼 권력은 언제나 모세혈관처럼 우리 삶에 침투해 있다. 그래서 푸코에게 있어 권력이란 미시권력을 뜻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 푸코의 이론을 이어받아 미시 파시즘을 생활 속에서 저항하도록 독려했다. 내가 말하는 지속 가능한 실천은 이런 생활 속 가벼운 저항이다. 단지 환경과 동물의 생명권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겠다. 우리 사회 속 여러 차별에 관해서도 이는 유효한 전략이다. 이런 문제뿐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에게는 더 다양한 저항들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능하면 한 주에 한 번, 아무리 늦어도 이 주에 한 번 내 가벼운 저항을 기록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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