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8월 30일, 아테네 올림픽 마지막 이벤트인 남자 마라톤 경기에서 힘든 기색이 역력한 한 마라토너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올림픽 메인스타디움으로 뛰어들어 왔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흔적이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트랙을 돌며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관중을 향해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는, 자긍심이 듬뿍 배인 제스처였다.
주경기장에 모여 있던 관중은 일제히 일어나 ‘리마! 리마!’를 외쳤다. 일부 관중은 “Don’t cry, Lima! (울지 마세요, 리마)”라고 소리를 지르면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비록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혼신의 힘을 다한 마라톤 영웅에게 보내는 열렬한 기립박수였다. 앞서 1분 16초 먼저 테이프를 끊은 우승자는 이탈리아의 스테파노 발디니였지만, 세계인은 ‘진정한 우승자’인 리마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주었다.
반데를레이 리마. 그는 이날 남자 마라톤에서 25km부터 단독 선두로 치고 나갔다. 유력한 1위 주자. 그러나 37km 지점에서 황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아일랜드 출신의 종말론 추종자인 한 관중이 갑자기 뛰어들어 리마를 밀치는 바람에 인도로 넘어졌고, 다시 일어나 달렸지만 이미 페이스를 잃어버렸다. 리마는 35km까지만 해도 단독 선두를 달리며 스테파노 발디니에게 28초 앞서 있었지만, 이 사건의 충격으로 약 5분 후 선두를 내주고 끝내 뒤로 처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리마 선수는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경기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마라톤에서는 거의 무아 상태에서 달리므로 한 번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 달리는 것조차 힘들다. 마지막 완주하는 그 순간까지 극심한 고통 때문에 포기하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는 끝내 포기하지 않고 달려 결국 3위로 들어왔다. 금메달의 기회를 놓치고도 두 팔을 벌리고 활짝 웃으며 결승점을 통과하는 리마 선수를 보며 관중은 놀라움과 감동에 휩싸였다.
시상대에 올라 동메달을 목에 건 그는 금메달리스트가 된 스테파노 발디니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경기를 마친 후 인터뷰에서 리마 선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깜짝 놀랐습니다. 나를 방어할 수도 없었고, 집중력이 흐트러지면서 리듬을 잃어버렸습니다. 6초 정도 손해를 본 것 같습니다. 마라톤을 해 본 사람은 중간에 중단했다가 다시 뛰는 것이 육체적, 심리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 것입니다. 하지만 사고가 없었다고 해도 내가 우승할 수 있었을지는 알 수 없습니다. 메달의 색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올림픽 정신을 지켰습니다. 올림픽에 참가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습니다. 나를 밀친 관중도 용서합니다.”
많은 사람이 용서해야 한다고 생각은 하지만, 선뜻 용서할 마음을 내지는 못한다. 자신에게 피해를 주고 마음에 상처를 준 그 사람과 사건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 그렇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반드시 거쳐야 하는 필수과정이다. 그러나 용서는 도덕적 의무도, 심리적 억압도 아니다. 용서는 어두침침한 분노와 증오의 지하실에서 햇살 가득한 자유와 기쁨의 정원으로 나오는 것이다.
용서는 마음의 평화를 준다. 이것은 정말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마음이 평화로울 때에야 비로소 바람직한 선택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노와 복수심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자기 통제가 되지 않아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없다. 심한 경우에는 억눌러 놓은 감정이 폭발하여 돌발적인 행동을 하게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크고 작은 복수의 드라마가 연속되는 동안 엄청난 심리적, 시간적, 물질적 비용이 발생한다. 용서는 이처럼 불필요한 희생과 불행의 악순환을 끊게 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용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게 해 준다. 과거에 얽매인 부정적인 감정으로는 더 나은 미래를 향해 한 걸음도 내디딜 수 없다. 아니, 지금 당장 자신에게 주어진 일조차 제대로 집중할 수 없다. 그러나 용서는 과거의 사건이나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지배되는 삶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에 집중하게 해 준다. 자신이 하는 일에 즐겁게 몰입할 수 있게 해 주고, 주변 사람들과 사랑의 교감을 나누며 친밀하게 지낼 수 있게 해 준다. 온전한 삶을 위해 용서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반데를레이 리마가 자신을 넘어뜨린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얼마 더 달리지도 못하고 주저앉지 않았을까? 리마가 밀려 넘어진 것은 마라톤에서도 ‘사점(死點: Dead Point)’이라 불리는 35km 전후 지점으로, 극도의 호흡곤란과 피로감을 느끼는 상태에서였다. 아무 일 없이 그냥 달려도 당장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다는 구간을, 페이스를 잃어버린 상태에서 억울하고 분한 심정으로 얼마나 더 달릴 수 있었겠는가? 그리고 설령 마라톤 코스를 완주했더라도 그 길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과정이었겠는가?
그러나 리마는 용서했다. 그리고 달렸다. 그에게 한참이나 뒤져있던 선수들이 하나 둘, 지친 그를 앞질러 가도 그는 묵묵히 달렸다. 자신을 밀친 사람도, 경기 중반 이후 내내 1등으로 달렸던 기억도 뒤로 하고, 완주하는 자신의 모습만 상상하며 달렸다. 숨이 턱에 차오르고 다리가 후들거렸지만, 그는 달리고 또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는 금메달이라는 작은 가치보다, 마라톤을 완주하는 기쁨이라는 더 큰 가치를 추구했던 것이다. 경기 운영 미숙에 대한 소송과 비난으로 얼룩질 뻔했던 아테네 올림픽은 리마의 용서 덕분에 가장 감동적인 올림픽으로 마무리되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선수단이 귀국하던 날, 상파울루 공항을 가득 메운 브라질 국민은 리마 선수가 나타나자 “금메달! 금메달!”을 외치며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올림픽 메달리스트에게 포상금을 약속한 유통업체는 그에게 동메달 포상금 대신 금메달 포상금을 지급했다. 각종 언론사와 TV 방송 인터뷰 요청도 쏟아졌다. 비치발리볼 금메달리스트 엠마누엘 레구는 '당신이 진짜 금메달리스트'라며 자신의 금메달을 리마의 목에 걸어주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올림픽 정신을 감동적으로 보여준 리마에게 근대 올림픽 창시자의 이름을 딴 ‘피에르 쿠베르탱’ 메달을 수여했다.
그리고 12년이 지난 2016년, 그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개막식에서 성화를 점화했다. 올림픽에서도 가장 상징적 의미가 있는 마지막 성화봉송 주자가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지만, 수많은 금메달의 영웅들을 제치고 동메달리스트였던 반데를 레이 리마가 그 영예를 차지했다. 브라질 올림픽관계자들과 국민들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뒤에도 진정한 스포츠맨 정신과 용서가 무엇인가를 보여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팀장님이 잘못해서 발생한 문제의 책임을 전적으로 나에게 돌릴 때 나는 그 팀장님을 용서하기 힘들다. 승승장구하던 회사의 재무와 회계를 믿고 맡겼더니 거액의 회사돈을 빼돌린 후배를 용서하는 것은 어렵다. 어려서부터 이유 없이 나를 때리고 괴롭힌 형을 용서하는 것도 정말 쉽지 않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닌데, 저 사람의 잘못을 왜 내가 용서해야 하는가? 잘못한사람은 벌을 받아야 마땅하지 않은가?
용서는 선택이다. 예외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를 선택함으로써만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진정한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 그리고 그때 비로소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알고 보면 용서란 자기 안에 있는 어두운 기억들을 걷어내는 일이다. 그러나 어둠을 사라지게 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빛이 나타나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과 즐거움을 선택하면 미움과 분노는 사라진다. 보다 가치 있는 삶, 자신의 본질인 사랑과 생명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정한 용서다.
아직 다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지금 당장 용서를 선택하기 바란다. 그래야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 보다 가치 있는 삶, 자신의 본질을 실현하는 삶을 살 수 있다. 용서는 대가를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미 리마 선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그에 따르는 현실적인 보상도 상상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