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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영 May 30. 2023

수세미 세레나데

 건조기, 로봇청소기, 식기세척기. 3대 이모님 중 난 이모가 둘이다. 유일하게 나에게 고민을 안겨주는 이모가 있었으니, 바로 식기세척기 이모다. 

 

 밥 차리는데 에너지를 쓰고, 밥 먹는 데까지 에너지를 쓰고 나면, 치우고 설거지 할 에너지까진 남아있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식기세척기를 살까, 고민해 보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아니올시다....

 건조기나 로봇청소기만큼 하루 한 번으로 딱 정리되지 못한다는 점이 가장 크다. 학교에서 분명 점심급식을 주는데, 왜 우리 아이들은 집에 오면 밥을 달라고 하는 건지. 그리고 밤에 남편과 시작한 맥주 한잔이 왜 안주 몇 접시로 끝나는 건지. 수시로 나오는 접시와 그릇들은 하루에 모아서 정리하기엔 양이 너무 많다. 식기세척기 도움을 조금 받고 나머진 설거지해도 괜찮겠지 생각을 해봤지만, 그러려니 찬장에 있는 그릇들까지 모두 꺼내놔야 할 판이다. 

 커다란 빨래 건조대가 고이 접혀 베란다 창고로 들어가는 순간, 기다란 목이 달린 청소기를 창고에 넣는 순간, 집은 깔끔해지고 허리는 건강해졌다. 그런데 그릇들이 나와있다고? 보고도 모른 척할 자신이 없다. 

 그래서 피할 수 없는 내 빌어먹을 성격과 설거지, 이 둘과 기분 좋게 협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지난겨울 초등 4학년인 딸과 집에서 할 만한 작업을 찾아보다가, 선택한 게 뜨개질이었다. 이제 슬슬 엄마와 무얼 하기엔 재미가 없어질 때긴 하지만, 집에 있으면서 유튜브만 끼고 있는 딸에게 무언가 다른 취미를 알려주고 싶었다. 진짜 심심해할 때 사주곤 했던 보석 십자수 같은 만들기 키트는 이제 싫다고 했다. 그래서 나도 이번에 같이 배우자 마음 크게 먹고 시작한 수세미 뜨개질.

 뜨개질 쉽다고 하는 말은 거짓말이다. 나는 코바늘 뜨개질 중 기본이라는 사슬 뜨기와 짧은 뜨기, 한길긴뜨기도 헷갈려서 유튜브 설명 영상을 열 번도 넘게 돌려본 것 같다. 그러다 딸은 배우기를 포기했다. 내가 할 줄 알았다면 쉽게 쓱 가르쳐줬을 텐데. 뭐 이번 기회에 딸과 같이 놀러 가거나 뭐 사주는 건 괜찮지, 배우는 건 아니라는 걸 배웠다. 

 분명 호빵 수세미라고 알고 시작했는데, 요상한 항아리치마 같은 수세미가 나온 이후 영상 돌려보기를 또다시.... 이후엔 제대로 된 호빵이 하나씩 손에서 만들어졌다. 

 색깔별로 만들어진 호빵으로 설거지 할 땐 더 감격스러웠다. 시중 수세미보다 손에 부드럽게 착 잡히고, 거품은 왜 그렇게 잘 나는지. 물에 불은 밥풀들은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쓱 잘 닦였다.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는 비유가 딱 생각났다. 보기 좋은 수세미가 설거지도 잘 된다, 보기 좋은 수세미가 기분도 좋게 한다. 뭐 그런 거?

 마침 봄 시즌이 여러 공모전 결과가 나올 때라 마음도 싱숭생숭할 때였다. 기다리는 것도, 하나 둘 떨어지는 거 지켜보는 것도 마음에 안 들 때, 손으로 바쁘게 호빵 수세미를 뜨며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그렇게 싱크대 서랍에는 내가 뜬 수세미들이 쌓여 갔다.

  

 나중에 사야 할 이유가 분명해지면 식기세척기도 살 예정이다. 그때는 화려한 수세미로 부수적인 설거지만 하겠지. 그렇지만 당분간은 더 손설거지를 할 것 같다.  

 수세미는 나에게 뜻하지 않은 위안을 주었다.  전업주부이지만 뒤늦게 시작한 (부캐라고 해야 할까?) 동시 쓰기.  그 누가 날 먼저 선택해 주기 전까지 내가 먼저 날 드러낼 수밖에 없다. 동시 쓰기가 동화 쓰기가 될 때까지, 그리고 모여진 이야기가 책으로 몇 권 쌓일 때까지 수많은 공모전과 대회에 참가해야 할 테니까. 훌훌 털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 그러려면 그 일들을 수세미 뜨기 같이 가볍게 볼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그때까지 수세미들은 집에 쌓여가고, 난 그걸로 열심히 설거지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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