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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영 Apr 28. 2023

한땐, 파트너였다

  

 “엄마, 설날 때 나은이(가명) 만났어? 많이 컸겠네.”

 “그래. 공부하느라 잘 오지도 못하고. 힘내라고 장어 많이 맥여 보냈다. 수능 때까지 못 올 것 같다더라.”

 “에구, 우리 엄마. 조그마했던 애가 벌써 그렇게 컸네. 그때 참 재밌었는데.”


 2003년 10월. 내가 스물세 살이었던 해, 첫 조카 나은이가 태어났다. 친정 집 근처에 신혼집을 차렸던 큰언니의 첫 딸이었다. 그때부터 우리 식구들의 모든 초점이 나은이에게 맞춰졌다. 

 큰언니는 출산휴가 3개월을 마치고 바로 복직했다. 서울로 발령이 난 큰 형부를 따라 언니도 서울로 가기로 했다. 언니는 엄마에게 당분간 아이를 봐 달라고 부탁했다. 나은이는 이제 갓 백일이었다. 

 “내가 키워줄게. 니는 애 걱정 말고 직장 다녀라. 여자는 직장이 꼭 있어야 한다.”

 그렇게 우리 집에 오게 된 나은이. 그즈음 나는 막 졸업을 하고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학교 도서관에 있다가 저녁 전에 집에 갔다. 함께 술 마시자는 친구들에게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조카 보러 가야 돼. 눈앞에 아른거린다고!”

 대여섯 시쯤 집에 가면 엄마는 얼른 내 품에 나은이를 안겨주었다. 엄마가 저녁준비를 할 동안 나는 분유를 타고, 나은이에게 먹이고, 안아서 트림을 시키고, 까꿍 놀이를 했다. 

 목욕을 시킬 때면 2인 1조로 움직였다. 엄마가 목욕물을 받는 동안 나는 전기난로를 옆으로 옮겨주었다. 그리고 몸을 씻기는 엄마 옆에서 큰 수건을 들고 기다렸다가 목욕이 끝나면 나은이 몸을 얼른 감쌌다. 우리는 마치 호흡이 척척 맞는 파트너 같았다. 미션명은 ‘최나은 돌보기’. 나은이가 뒤집고, 기고 웃을 때마다 우리도 함께 손뼉을 치며 웃었다.



 큰언니가 나은이를 서울에 데리고 가자, 엄마는 크게 몸살을 앓았다. 허리가 아파 오랫동안 한의원에 다니기도 했다. 나는 계속 도서관에 갔지만, 책을 읽고 문제를 풀다가 문득 나은이 생각이 났다. 엄마도 그랬나 보다. 함께 피자를 시켜 먹다가, 새로 산 옷 이야기를 하다가 엄마는 불쑥 나은이 이야기를 했다. 

 “니가 옷만 갈아입으면 나은이가 막 버둥대고 그랬는데. 모든 걸 다 아는 듯이 말이야.”  


 임무가 끝난 파트너들은 어떻게 할까. 영화처럼 쿨 하게 ‘굿바이’ 외쳐주고 원래 있던 자리에 돌아갈까. ‘최나은 돌보기’라는 임무가 끝난 이후, 엄마와 나도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에게는 곧 취업이라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지만, 엄마는 자기 할 일을 찾지 못하고 헤맸다. 


 이후 파주로 취업해 진작 떠나 있던 작은언니가 결혼했다. 곧이어 2006년 나까지 스물여섯에 경기도로 집을 떠나, 스물일곱 봄에 결혼했다. 그때부터 엄마는 긴장을 탁 놓아버린 사람같이 행동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뭐 해?” 물어보면 “집이지” 대답뿐이었다. 대화를 하다가 멍하니 대답을 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친정에 가면 엄마 얼굴에 표정이란 표정은 다 사라진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에게 자꾸 말을 걸었다.

 “엄마, 하고 싶은 거 없어?”

 “이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기가 텅 빈 것 같고 옛날 생각만 자꾸 나네.”

 생전 전화를 하지 않던 아버지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엄마가 걱정된다고 말했다. 밥도 안 차리고 잘 먹지도 않는다고 했다. 무엇보다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엄마 때문에 아버지와 언니들, 나 모두가 계속 전화를 주고받았다. 우리는 결국 엄마를 정신과에 데리고 가보자고 결정했다. 

 “내가 왜 거기를 가! 절대 안 가!”

 “요즘엔 많이 상담하러 가. 마음의 감기라고 들어봤지? 이상한 게 아니고 호르몬 때문에 그런 거래. 한번 같이 가보자.”



 참 절묘하게도 내가 결혼하고 나서 엄마가 그렇게 변했다. 엄마는 친구가 없었다. 그래서 가끔 나를 데리고 쇼핑을 가고 외식도 했었다. 친구 대신으로 말이다. 다른 사람에게 터놓고 얘기할 순 없었지만 나는 엄마에게 빚을 진 것 같았다. 

 그동안 세 딸을 끼고 살다가 하나 둘 떠나니까 엄마가 그러나 보다 생각했다. 엄마를 잠깐씩 보러 가고 싶어도 거리가 머니까 답답했다. 

 한편으론 엄마에게 서운하기도 했다. 솔직히 나는... 정말 부산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제야 독립해서 내 마음대로 살고 있는데, 엄마가 아프니 꼭 내가 엄마를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엄마가... 미웠다. 


 얼른 엄마가 원래 모습을 찾길 바랐다. 걱정을 그만하고 싶었다. 그러다 보니 엄마를 자꾸 바꾸려고 하고 문제를 해결하려 들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하면,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고 끊는 경우가 많았다.

 “엄마! 집에만 있으면 자꾸 쳐져. 운동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해 봐. 제발 우리 집에도 오라니까 그러네. 약은 계속 챙겨 먹고 있는 거지?”

 “그래. 선영아, 나는 그냥 집에 있는 게 좋다. 걱정 말고… 이제 끊자.”

 한때 나은이로 인해 같이 웃고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엄마는 그대로 멈춰있고 나만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다. 



 한참 지나서야 알 게 됐다. 그동안 나는 내 방식대로 엄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엄마의 새로운 모습을 받아들이기 싫어했던 것 같다. 엄마는 우리가 나누었던 겉도는 대화보다, 그냥 엄마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 나는 갈수록 작아지는 엄마의 공간이 답답해 보여서 자꾸 밖으로 나오길 원했다. 그러나 어쩌면 엄마는 활동 공간을 넓히기가 무척 두려웠을 것이다. 

 엄마 입장에서 어떤 내 모습이 편할지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엄마는 소소하게나마 자기가 무얼 하든 인정해 주고, 예전에 좋았던 기억을 꺼내어 함께 웃고, 열심히 맞장구쳐 주는 내 모습을 바랐을지도 모른다. 


 재작년 명절 때 친정에 갔다가, 요즘 푹 빠진 드라마에 대해 줄줄 얘기하는 엄마를 봤다. 엄마는 드라마를 좋아하고, ‘미스터트롯’ 프로를 즐겨본다. 의사들과 연예인 패널들이 나오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나 ‘동치미’ 같은 프로도 좋아한다. 전화로 나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이나 몸에 어떤 것이 좋은지 장황하게 설명할 때마다 그렇게 듣기 싫어했는데, 좀 미안했다. 나도 이제 꿈쩍 않는 바위같이 집에만 있는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작년부터 나는 인터넷으로 ‘미스터트롯’ 영상을 찾아보고 가수 이름을 외워두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처음으로 흰머리 때문에 염색하러 가는 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 나도 이제 새치염색 해야 하나 봐. 이제 너무 표 나서 염색하러 가.” 

 “새치용 말고 멋내기용으로 해도 돼. 니도 날 닮아서 머리가 빨리 새나 보다.”



 엄마는 엄마다. 나와 다른 생각과, 다른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다. 언니들보다 가까이서 엄마를 지켜봐 왔다고 생각했기에, 내가 부담감을 잔뜩 느꼈었나 보다. 이제 나도 변해야 한다.

 엄마에게 전화 걸 때마다 오늘은 어떤 얘기를 할까 고민한다. 드라마나 예능프로는 내가 잘 몰라서 얘기하다 보면 말문이 막힌다. 그래서 엄마랑 나랑 둘 다 좋았던 기억을 더듬어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은이를 함께 키울 때 밖에 생각이 안 난다.


 오늘 나는 엄마에게 17년 전 기억을 꺼내어 놓기로 했다. 엄마는 그때가 좋았을까, 지금이 좋을까? 그때 참 많이 웃었는데. 지금도 엄마가 많이 웃었으면 좋겠다. 

 “어이구. 나은이는 할머니가 애쓴 거 알까 몰라. 그때 우리 꼭 파트너 같았다, 그치?”

 “아 맞네, 맞아. 듣고 보니 그렇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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