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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영 Mar 09. 2024

무명 사회

 누구나 '제니'로 불리는 사회. 

 제니가 아니면 '우리 반 1번', '10시반으로 간 2번' 등으로 불리는 사회.

 문화센터 수영장에 있는 무명 사회다. 


 근처 문화센터 수영장을 다닌지 1년이 넘었다. 처음엔 강습만 다니다가 이젠 자유수영까지 등록해 주말만 빼고 매일 나간다.(토요일에 갈 때도 있다) 그러다보니 평일 오전이면 수영장에 나타나는 사람들과 안면도 트고 말도 섞으며 지낸지 꽤 됐다. 

 그들은 10시나 11시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난다. 그래서 내가 그 시간에 잘 맞춰 가기만 하면 만날 수 있다. 따로 약속을 잡을 필요도 없다. 만나면 주로 수영 얘기만 하기 때문에 서로 깊이 알지도 못한다. 그렇지만 함께 수영하는 마음으로 그때만큼은 서로 소중하다. 함부로 말하지도 않고 함부로 대하지도 않는다.


 한번은 호칭을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성함을 여쭤보았더니, 그냥 '제니'라고 불러달라고 하셨다. 그랬더니 옆에 계신 다른 분이 여긴 다 '제니'라며 자긴 '밍크'라고 해야할까봐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느 누가 한동안 보이지 않아 누군가에게 물어볼라치면, 이름을 몰라 생김새를 묘사해야 했다. 수영장에선 친하게 지내도 서로 연락처 교환도 잘 하지 않는다. 서로를 설명하기 불편하기도 하고 애매하기도 하지만, 적당히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걸 안다. 


  보통 집단 어딘가 들어갈라치면 내 스펙을 노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냥 애 키우는 주부'의 스펙은 나이, 직업, 아이 수(?), 남편 직업 등이다. 원하지 않더라도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 또는 차별화 전략으로 어쩔 수 없이 공개해야 할 때가 있다. '그냥 애 키우는 주부'라는 나의 타이틀은 이렇게도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부차적인 것들까지 꾸며주어야 '나'를 설명할 수 있다. 나 외에 다른 누군가가 나의 수식어가 되고나면, 왠지 씁쓸할 때가 있었다. 


  수영장에선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서로 자식 얘기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말이 통하고, 함께 한가지 목표를 향해 가는 동지의식도 느끼게 해주는 사회.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수영으로 나를 얘기할 수 있는 사회. 


  누구에게나 이런 무명사회가 필요하다. 내가 무슨 사정이 있든 간에 나를 숨기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내 속에 수 많은 나의 모습 중에서 한 가지만 드러내고 싶을 때도 있으니까. 이런 점이 내 무명 사회가 소중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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