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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지현 May 14. 2021

28살, 출판사를 열다

도서출판 잇다름 창업일기


 28살. 출판사 대표.

 지금의 내 이력이다.


 출판사를 운영하시는 분들 중 꽤 많은 분들이 그러실 텐데(자기 책을 출판하려고 출판사를 여는 분들이 많다), 원래 나는 출판사 운영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가. 이야기를 하자면 이렇다. 내 원래 계획은 해외에서 인지과학을 전공하는 것이었다. 이 분야의 가장 큰 강점은 명절 때 친척들에게 구박을 받는 일이 드물다는 점이다.


"섬별이는 요새 뭐하니?"
"저 요새 유학 준비하고 있어요. 석사 유학이요."
"요새는 유학 가도 시원찮다던데.... 뭘 공부하려고?"
"철학 기반으로 인지과학을 공부해보려고 해요.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인지하느냐라는 질문을 둘러싸고 뇌과학, 인공지능, 심리학, 언어학 이런 분야들이 통합돼 있는 융합학문이에요."

(가상 친척과의 대화 시뮬레이션. 

내 친척들이 부당한 오해를 받지 않도록 덧붙이자면 실제로 '유학 가도 시원찮다'라고 하신 분은 없었다)


 보통 내가 인지과학이 무슨 학문인지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할 때쯤 되면 "아, 그렇구나. 열심히 하렴. 꾸준히 공부하는 모습이 멋지다."하고 대화가 훈훈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잘 아는 분야가 아닌 분들이 대부분이라 아마 이것저것 더 말씀하실 만한 얘기가 없으셨던 듯하다. 그만큼 인지과학은 관심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잘 알려진 분야는 아니다.


 그래도 나는 이 분야에 꽤 많은 흥미를 갖고 있었다. 특히 공부해보고 싶었던 것은 시간에 대한 인지였다. 이건 지금도 가끔 논문을 찾아볼 정도로 좋아한다. 또 학부에서부터 나 스스로의 주장을 만들어가는 걸 즐겼기 때문에 직접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대부분인 석사 과정은 아마 적성에 잘 맞았을 것이다.





 그럼 나는 왜 이렇게 재밌는 전공을 놔두고 한국에서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는가. 놀랍지 않게도 코로나 때문이다. 다년간의 휴학으로 나는 동기들에 비해 꽤 늦게 졸업해 27살에야 학부를 끝마쳤다. 그리고 졸업할 때쯤 때맞추어 코로나가 발발했다. 한국은 상황이 비교적 나았지만 유럽은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코로나 이후 증가한 아시안 혐오 문제도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붕 뜬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동안 취업에 눈을 돌리기도 했지만, 아르바이트나 잡다한 대외활동 외에 내가 쌓아 둔 경험은 기껏해야 학부 연구생 정도가 다였다. 문과생, 그중에서도 인문학도의 학부 연구 이력은 취업을 위한 것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러던 중 친구가 운영하던 1인 출판사에서 같이 일을 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원체 책을 좋아하고 인생 버킷리스트에 '노벨문학상 받기'를 써 둔 내겐 꽤 구미가 돋는 이야기였다. 또 그동안 출간된 책들도 내 기준에 잘 맞는 좋은 텍스트들이었다. 그렇게 작년 여름부터 함께 일을 하기 시작했다.


 가까이서 보니 출판사 운영- 특히 소규모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도서 기획, 작가 관리, 원고 편집, 디자인(직접 하거나 외주. 친구의 출판사는 대개 외주를 맡겼다), 발주, 영업, 마케팅, 회계까지. 출판사에서 하는 일이라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친구 혼자 처리하고 있었다. 모든 소규모 사업체가 다 그렇겠지만, 출판은 시장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은 분야라 더더욱 힘겨워 보였다.




 그럼에도 동기부여가 되었다.

 처음 내가 진행을 맡았던 책이 서점에 나왔을 때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내 눈에는 매대 위에서 그 작고 소중한 단 한 권의 책이 유난히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꼭 나와야 하는 책인데도 아직 빛을 보지 못한 글이 너무 많다.' 시장의 기호에서는 어긋났을지도 모르지만 그 나름의 빛나는 가치를 갖고 있는 글들 말이다. 그리고 가치를 알아보는 누군가가 함께 책을 펴낸다면 어쩌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가치 있는 글을 내 손으로 펴내고 싶어 출판사를 차리게 되었다.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전 출판사에서 일할 때 그곳의 특색과는 맞지 않아 아쉽게도 펴낼 수 없었던 투고 원고가 하나 있었다. 처음 그 글을 검토했던 당시 나는 조용한 공유 사무실에서 눈물을 흘리기 싫어 화장실을 계속 오갔다. 심지어는 그날 밤, 글에서 나왔던 장면이 내 꿈에 나왔다.


 이게 내가 출판사를 차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다. 투고를 거절하기로 결정이 된 이후로도 계속 글이 눈에 밟혔다. 그렇게 결국 출판사를 직접 차릴 것을 결심하고선 다시 연락을 드렸다. 작가님께서는 텀블벅 진행을 준비하는 중이셨고, 텀블벅까지는 직접 진행하시되 이후 유통과정을 함께 진행하기로 협의했다.


 출판사 이름은 잇다름 Itdareum. '다름을 잇다'라는 출판사의 소명을 담고 있다. 여기에도 에피소드가 있다. 출판사를 내기 전 일단 작가님께서 함께 글을 펴내실 의향이 있으신지를 먼저 여쭤봤는데, 새로 출판사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듣고선 작가님께서 '잇다'라는 이름을 제안해주셨다. 마음에 드는 이름이었지만 찾아보니 이미 몇 개 출판사가 등록되어 있었다. 그러다 고민 끝에 '잇다름'을 떠올리게 되었다. 책마다 담고 있는 서로 다른 이야기들을 이어, 세계를 축소한 작은 그림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또 절대 서로의 세계를 경험해볼 수 없는 개인들(그래, 나는 철학과 출신이다)의 이야기를 통해 일종의 서사 연구처럼 그들 사이의 접점을 만들고 싶었다. 


 나는 천성적으로 융합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원래 전공하려 했던 인지과학이 전형적인 융합학문이라는 점만 봐도 그렇다. 글을 쓰면서도 다른 예술 분야와 언젠가 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런 내게 지금의 이 과제, 출판사를 만든다는 과제는 각기 다른 글들을 모아 하나의 세계를 완성하는 장기적이고 큰 규모의 협업이 될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잘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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