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치남 Jul 04. 2024

나는 중국에서 결혼하고 중국에서 이혼했다. 02

아내는 자꾸 일을 벌였다.

  결혼 전에 아내는 장인어른이 일하는 중국민항에서 비행기표 파는 일을 했다. 하지만 의논도 없이 결혼과 동시에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 눌러앉았다. 중국의 일반적인 여자들은 퇴직할 때까지 일을 하는데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던 가게가 도시계획으로 문을 닫게 되고 작은 회사들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겨우 친구 소개로 모바일 게임을 만드는 회사의 중국지사를 맡게 되었다. 그때쯤이었다. 아내가 갑자기 아동복 가게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


  결혼하고 작은 아이가 만 3살이 되고 유아원에 들어갔던 때였다. 우리나라와는 달리 중국은 만 3살이 되면 여자가 직장을 다니든 안 다니든 다 유아원에 보낸다. 엄마가 밖으로 나돌기에는 너무 이른 시기라고 생각이 들었지만 아내의 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북경 코리아 타운에 있는 한국 여성복점 한쪽 귀퉁이를 재임대받아서 가게를 열겠다고 했다. 자금이 부족해서 그렇게 판단을 한 것 같았다. 한국인과 결혼은 했지만 한국어도 전혀 못하고 한국문화에 1도 관심 없는 아내가 코리아 타운에서 한국 주부 대상으로 아동복 가게를 연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롭다는 한국 아줌마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아무리 설득을 해도 통하지 않아서 그냥 밀어주기로 했다. 예상대로 재고는 쌓여가고 아내는 더 광적으로 집착하며 아동복을 사모았다. 하지만 한국 아줌마들은 끄덕하지 않았다. 솔직히 아내의 패션 감각은 내가 보기에도 꽝이었다.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뼛속까지 깨달았다. 그렇게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아동복 가게는 10개월 만에 안돼서 문을 닫았다. 가게 여사장은 2년 계약을 하고 1년도 안돼서 그만둔다고 난리를 폈다. 내가 가서 사과하고 얼마 안 되는 보증금은 받지 않기로 했다. 아내의 마음 같지는 않겠지만 날마다 퇴근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와 아이들까지 봐가면서 지원했던 내 마음도 큰 상처를 입었다. 


 그때부터 아내와 나는 사사건건 충돌했다. 난 점점 아내를 피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교회 생활에 올인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현실 도피였던 것 같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났을 때 아내가 갑자기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사실 나 작년에 가게 접으면서 시내에 가게 하나 신청했어."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이야기해 봐."

  "시내에 있는 **쇼핑 건물 알지? 그 회사에서 다른 지역에 똑같이 쇼핑 건물을 시작한다고 해서 신청했어."

 

  그 순간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남편과 아무 상의 없이 또 일을 벌이다니... 자세히 알아보니 **쇼핑에서 건물 하나를 임대해서 동대문 상가들처럼 가벽을 쳐서 분양을 한 것이었다. 분양이라고 해도 가게가 우리 것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권리만 양도 받는 형태였다. 아내가 내게 어렵게 입을 연 것은 잔금이 모자라서였다. 본인이 백방으로 알아봐도 안되니까 어쩔 수 없이 이야기를 한 것이었다. 


  "거기는 정말 될 것 같아?"

  "그럼, 그 가게도 겨우 얻은 거야. 사람들이 줄을 서고 난리가 났어."


  직접 가보니 주변은 주택가이고 정말 조용했다. 아무리 봐도 상권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건물 안에 들어가니 정말 훵했다. 우리나라의 동대문 건물들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가벽을 치고 문을 만든 것 외에 **쇼핑 회사는 무엇을 한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가 맡았다는 가게는 3층이었는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한참 구석에 위치하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둥으로 가려져있어서 멀리 서는 보이지도 않았다. 


  한숨부터 나왔다. 아무리 봐도 상권이 형성되려면 몇 년은 걸릴 듯 보였다. 결국 처음에 들어온 사람들은 권리금을 목적으로 들어온 사람들이었다. 제대로 장사를 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어떤 가게는 입던 옷을 가져다가 걸어놓은 곳도 있었다. 아내의 안목에 다시 한번 실망했다. 결국 큰 소리가 오고 갔다.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거 딱 봐도 권리금 받고 나가야 돈을 벌 수 있는 건데 이런 위치에 있는 가게를 누가 원하겠어. 여기서 옷 장사를 한다고? "

  "아니 당신이 잘 모르니까 하는 소리지. **쇼핑이 북경에서 얼마나 유명한데. 여기도 금세 사람들로 북 쩍 일거야. 이번에는 정말 믿어보라고."


  며칠간 옥신각신 했지만 결국 아내가 승리했다. 모아놓은 돈도 모자라서 타던 차까지 팔아서 잔금을 치르게 하고 한국에서 필요한 옷을 주문해서 채워주었다. 대막의 오픈 날에 손님들이 좀 북적이나 싶더니 한 달도 안돼서 개미새끼 한 마리 다니지 않았다. 권리금 받고 빨리 나가려고 하는 주인들이 대부분인 쇼핑몰에 살만한 옷이 걸려있을 리 만무했다. 소문은 금세 퍼졌고 파리만 날리는 곳이 되었다. 가게는 1년 만에 문을 닫았다. 내 마음도 굳게 닫혔다. 


  "판사님, 아들이 미국 유학을 가는데 학비정도는 아버지로서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변호사에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판사님, 제가 이혼하고 직장을 잡은 지 겨우 1년입니다. 그동안 계속 필요하다고 할 때마다 돈을 보내주었고요. 제가 돈이 있다면 자식에게 돈을 아끼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저 여자도 잘 알 겁니다." 


  잠시 변호사와 아내가 소곤대는 모습이 보였다. 


  "판사님, 저희는 무리한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때까지 침묵을 지키던 판사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변호사, 일반적으로 중국인 가정에서 양육비로 얼마를 주는지 알고 있죠? 15만 원이에요. 그런데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아무리 외국인이라고 해도 80만 원을 양육비로 해주겠다고 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요? 유학을 서로 상의한 것도 아니고 유학비까지 책임질 이유는 없는 것 같습니다."


  '미국이라니... 정말 황당했다. 지금 이 상황에 미국 유학을 생각했다니...'


  아내의 교육열은 대단했다. 큰 애가 초등학교에 가야 되는 나이에 벌어진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불안과 충동속에 살아가는 이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