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끼고 있는 안경의 렌즈가 자꾸 더러워진다. 깜냥에는 자주 닦는 편인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책의 글씨가 잘 안 보인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도 침침해지면 바로 안경을 벗어서 닦는 일이 잦다. 그러면서도 별 이상하게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이건 빈도가 너무 잦은 일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다. 안경을 벗어 유심히 살폈다. 당장 닦아야 할 만큼의 때는 안 보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으~~음. 뒤통수에 뭔가가 와서 부딪친다.
나는 자신을 좀 안다고 생각했었다. 내 장점은 내가 직접 나서서 말할 필요가 없지만, 그게 아니고 단점이라면 일단은 들여다보는 성의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인데도 우선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부분은 철저하게 피하는 인간이다. 그래서, 지금 안경을 끼고 봐도 글씨가 안 보이는 것은 골치 아프니까 무의식적으로 깊게 알아보는 것은 버릇대로 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 집에 늙은이가 둘이면 서로 먼저 죽으라고 떠넘긴다는 말이 있다. 그런 시샘으로 수명이 연장된다면 그건 긍정적인 일이겠다. 그러나 그리지 않고 저 영감이 먼저 죽으면 그때 나도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도 되겠지 라는 식이면 가슴이 답답할 사람이 몇 명 생기게 된다. 아전인수(我田引水)는 곁에 있는 사람의 복장(腹臟)을 터지게도 한다는 뜻이다.
지난 2월에 감기로 한 달 이상을 시달릴 때 나는 바짝 긴장했다. 더 살고 싶다는 욕심이라기보다 최소한 죽음에 대한 내 자세 같은 것쯤은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나를 모르는 것이니 그걸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일이 있고 난 뒤로 나는 거의 반년 이상을 조용히 엎디어 있었다.
명색(名色: 겉으로 내세우는 구실.)은 나를 들여다본다는 것이지만, 나이 팔십이 다 되어가는 영감이 웅크리고 있다고 보이는 것이 뭐 하나 있겠냐 말이다. 그래서, 누가 보고 싶다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염치없이 스스로 나와서 혼자 잘난 척하는 중이다.
변한 건 하나도 없다. 또한 모르는 데도 아는 척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것 한 가지는 알 것도 같다.
내가 나를 모르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워할 일이다.
2024. 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