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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Aug 14. 2021

인어공주, 백화점에 취직하다

브런치X저작권위원회 공모전 출품작

인숙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한시라도 빨리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야 했다. 

‘그래, 큐를 찾아가자. 그 애라면 다 알아낼 수 있을 거야.’

뭘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일단 방향이 정해지고 나니 달리는 일만 남았다.

아니 헤엄치는 일만 남았다.

큐 집 앞에 순식간에 도착한 인숙은 숨을 잠시 고른 뒤 벨을 눌렀다.

CCTV를 통해 내 얼굴을 봤는지 문은 금방 열렸다.

검은색의 육중한 대문이 열리자 아름다운 수초와 산호초로 꾸며진 정원이 나왔다. 보통 때 같으면 정원의 수초들을 둘러보며 여유 있게 현관 앞으로 갔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현관문 앞에 서자 문이 갑자기 열렸다.

“아이 깜짝이야!”

인숙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뒤로 물러섰다.

큐가 얼굴을 내밀며 문을 열어주었다.

“무슨 일인데? CCTV를 보다 네가 너무 다급해 보여서 마중 나왔어.”

“그게, 너한테 부탁할 일이 있어서...”

“그래, 어서 들어와. 들어가서 얘기해.”

큐의 집은 언제나처럼 깨끗했다. 블랙과 화이트로 꾸며진 모던한 인테리어가 인어를 차분하게 만들어주는 집이었다.

“사실은, 어제.... 내가 누굴 구했어.”

소파에 앉자마자 인숙은 말을 쏟아냈다.

“어제 바닷가에 사람들의 유람선이 떠 있었는데, 파티를 하는지 꽤 소란스럽더라구. 배도 화려하고 예뻐서 호기심에 다가갔는데....”

인숙은 잠시 한숨을 내쉬며 숨을 골랐다.

큐는 서서 인숙의 이야기를 듣다가 물을 한잔 가지고 왔다.

인숙은 큐가 가져온 물을 순식간에 비웠다.

“천천히 얘기해. 오늘은 시간 많아.”

“게임 안 해?”

“오늘은 좀 쉬려고, 새벽까지 했더니... 피곤해.”

그제야 인숙은 큐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눈에 다크서클이 진했다.

“자고 있었던 거 아니야? 내가 방해했나?”

“아니. 한숨 잤어. 밥 먹을 참이었어.”

“그럼, 밥 먹어. 먹으면서 들어.”

“그럴까.”

그는 주방으로 가 커피 머신의 버튼을 누르고, 빵을 꺼냈다.

인숙도 그를 따라 식탁 앞에 앉았다.

“그 검은 물 맛있어?”

“응, 아침에 꼭 이걸 먹어야 잠이 깨.”

“마셔볼래?”

인숙은 큐가 내민 컵에 입을 내고 한 모금 마셨다.

“앗, 써!”

인숙은 냉장고 문을 열어 유리병에 든 물을 꺼냈다. 그리고 커피의 쓴맛을 떨쳐내기 위해 물을 마셨다.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큐는 아무렇지 않은 듯 커피를 마시고 빵을 뜯어 입에 넣었다.

“응, 근데 갑판에 아주 잘생긴 남자가 나타나는 거야. 한참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배가 흔들리더라. 그 남자, 술에 취했는지 중심을 못 잡고 바다로 떨어졌어. 근데, 그때 갑자기 내 가슴이 철렁하는 거 있지. 이 남자를 죽게 해서는 안된다는 소리가 갑자기 들리더라구.”

인숙은 그때의 상황을 생각하는지 하트 눈이 됐다가 갑자기 심각해졌다가 했다.

큐는 말없이 빵을 오물거렸다.

“결국 그 남자를 구했어. 인공호흡까지 해서 구했지. 바닷가에 눕혀놓고 바위 뒤에 숨어 있다가 사람들이 발견하는 거 보고 돌아왔어. 사람들이 발견하고 구급차 오는 거 보니 안심이 되더라. 그제야 팔이 아픈 게 느껴지더라구. 무거운 남자를 안고 한 손으로 헤어 쳤으니...”

인숙은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다 굽혔다 폈다를 몇 번 하고, 그때처럼 숨이 차는지 숨을 길게 쉬기도 했다.

인숙은 그러면서 어제의 상황을 곱씹었다. 인숙은 바닷가에 그를 내려다 놓고 그 남자에게 인공호흡을 했다. 숨 쉬는 것을 확인한 인숙은 그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고 있었다. 반듯한 이목구비가 이 세상 생물이 아닌 것 같았다. 그때 그가 무의식 중에 뭐라 뭐라 하며 눈물을 보였다. 인숙은 그가 정신이 돌아오는 줄 알고 바위 뒤에 얼른 숨었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사람이 되고 싶다고?”

큐는 마지막 커피를 마시고 잔을 내려놓으며 갑자기 침묵을 깼다.

“어떻게 알았어?”

인숙은 자신의 마음을 바로 알아차린 큐에게 놀라며 말했다.

“요는 네가 사랑에 빠진 거잖아. 그래서 그 남자 곁에 있고 싶고.”

큐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금희 누나 알지? 그 누나도 남자 때문에 이곳을 떠났어.”

“정말? 어쩐지 안 보인다 했어. 근데 정말 사람이 될 수 있는 거야? 그들처럼 나도 두 발을 가질 수 있는 거야?”

“응.”

“진짜였구나! 전설로만 내려오는 얘긴 줄 알았는데. 그럼 그 남자와 결혼 못 하면 물방울이 되고 그러는 거?”

“아니, 그건 그냥 전설일 뿐이야. 그런데...”

“그런데 뭐?”

“다신... 못 돌아와. 남은 평생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거지. 가족들과도 영영 이별이야.”

인숙은 그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자신이 살던 고향, 가족들, 친구들을 영원히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 갑자기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어제 처음 만난 남자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을까? 그 남자와 잘 될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인데, 가족들과 맞바꿀 만한 가치가 있을까? 참, 난 지금 그 남자의 이름조차 모른다!’

“너 그 남자 이름은 알아?”

큐가 그런 인숙의 마음을 읽었다는 듯 물었다.

인숙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갑자기 배 이름이 생각났다.

“배 이름이 승리호였어. 혹시 이것만으로... 힘들겠지?”

큐는 한숨을 쉬었다.

“그 배가 그 남자 소유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큐는 인숙의 실망하는 표정을 보고 안쓰러웠는지,

“그래도 조사는 한번 해볼 수 있겠지.”

라고 마지못해 말했다.

“정말? 고마워. 정말 정말 고마워.”

인숙이는 어두운 터널에서 한 줄기 빛을 발견한 것처럼 갑자기 표정이 밝아졌다.   


       

인숙은 카페에 앉아 커피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최근 한 달 동안의 일이 꿈인 것만 같았다. 봐도 봐도 익숙해지지 않는 다리를 내려다보며 잘한 일인지 자꾸 드는 의심을 애써 외면했다. 

‘그 덕에 이렇게 예쁜 운동화도 신었잖아. 드라마를 많이 봐 두길 잘했어. 요즘은 운동화가 대세야.’

큐는 컴퓨터를 뒤져 승리호가 엘 백화점 대표 아들 송중기 소유라는 것을 알아냈다. 송중기! 그렇다. 다행히도 인숙이 구한 남자가 송중기였다. 화면에서 그 얼굴을 봤을 때 인숙은 바로 소리쳤다.

“저 사람이야!”

그는 단순히 초대된 사람 아니었다. 그 배의 소유주였다. 큐는 어떻게 할 건지를 물었고, 인숙은 화면에서 그 얼굴을 보는 순간 결심이 굳어졌다.

“20년 넘게 인어로 살았으니, 이젠 사람으로 살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큐는 SR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는 아버지에게 연락했다. 캘리포니아 앞바다에 있는 그 연구소는 지난해 인어가 사람이 될 수 있는 신약을 개발했고, 이미 시판에 들어간 상태였다.

그 약은 한 달 만에 인숙의 손에 쥐어졌다. 인숙은 다시 한번 가족을 생각했다. 인숙이 처음 자신의 결심을 부모님에게 말했을 때, 부모님이 지었던 충격과 공포의 표정이 떠올랐다. 두 언니는 “미친 거 아니냐”며 비난을 퍼부었다. 인숙은 설득도 하고 식음도 전폐하며 부모님의 반대에 맞섰고, 결국 부모님은 인숙의 결정을 마지못해 응원하시기로 했다. 인숙의 엄마는 끝내 눈물을 보였다. 마음 약한 둘째 언니도 울면서 “힘들면 언제든지 돌아와”라고 말했다.

인숙은 혹시 모를 부작용을 걱정해 큐네 집에서 약을 마셨다. 토할 것 같은 증상 이후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큐는 그런 인숙을 걱정스럽게 쳐다봤다. 인숙은 어지럼증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소파에 누웠다가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어나니 큐는 없었다. 꼬리 부분의 느낌이 이상했다. 일어나서 보니 꼬리가 있던 자리에 다리가 있었다! 신기했다. 내 다리가 맞나, 만져보고 쓸어보고 보고 또 보고.

큐는 인숙에게 금희가 마중을 나올 거라고 했다. 인숙은 바닷가 근처 카페에서 금희를 기다렸다. 다행히 금희가 엘 백화점 식품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이런 행운이! 역시 하늘은 내 편인가’ 

인숙은 금희가 많은 백화점 중 하필 엘 백화점에서 일하고 있는 것도 하늘의 뜻인 것만 같았다. 하늘이 자신의 사랑을 응원하는 것만 같았다. 가족 생각에 표정이 어두웠던 인숙은 다시 밝아졌다. 인숙은 아까 시켜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윽!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구나.”

인숙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제 이 쓴맛에도 익숙해져야 할 것 같아 한번 시켜봤는데, 역시 사람이 되는 일은 멀고도 험한 일인가 싶다. 앉은 채로 다시 발을 굴러봤다. 걷는 일은 여전히 낯설기만 했다.

그때, “인숙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문 쪽에 금희가 서 있었다. 금희는 아주 익숙한 듯 사람처럼(?) 걸어왔다. 인숙은 그런 금희가 낯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찬찬히 훑었다.

“뭘 그렇게 봐?”

“너무 오랜만이라서... 언니의 변한 모습도 낯설고.”

“크크... 나는 너의 모습이 더 낯설다.”

금희는 테이블 밑의 인숙의 다리를 슬쩍 쳐다봤다.

“다리 예쁘네. 운동화는 어디서 났어?”

“큐가 마련해줬어. 이 옷들도.”

“티셔츠에 미니스커트라 큐답다. 배 안 고파?”

“아직 이 상황이 꿈인가 생시인가 싶어서 그런가 배 고픈 줄도 모르겠네.”

“응. 그 기분 알 것 같다. 나도 그랬으니까.”

금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나갈까. 밥은 집 근처에서 먹자.”

“언니, 고마워.”

“뭐가?”

“언니 집에서 지낼 수 있게 해 준 거.”

“고향 동생이 왔는데, 갈 곳도 없다는데 재워줘야지.”     



금희가 렌트한 차를 타고, 두 사람은 서울로 향했다. 인숙은 운전까지 하는 금희가 신기해 새삼 쳐다봤다. 금희는 그런 인숙의 시선을 느끼며

“왜 신기해?”

라고 물었다. 시선은 앞에 고정한 채였다.

“응 언니가 운전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

“물속에서 자유롭게 다니다가 걸어 다니까 좀 깝깝하더라구. 가까운 거리도 뭐 그렇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내 성격이 좀 급한 편이었나 봐. 사람으로 살면서 몰랐던 나 자신을 많이 발견한다. 그런데 아직 차는 못 샀어. 바퀴 네 개 달린 철 덩어리가 왜 그렇게 비싼지. 내 월급으로는 엄두가 안 나. 이 차는 렌트한 거야.”

인숙은 씁쓸한 듯 웃는 금희의 얼굴에서 피로감이 느껴졌다. 아까는 발견하지 못했던 다크서클도 보였다.

“언니는 왜 사람이 되려고 했어? 큐 말로는 남자 때문이라고 하던데.”

“맞아. 너도 남자 때문에 이 쇼를 하는 거 아냐?”

“응.”

인숙은 갑자기 자신이 없어져 힘없이 대답했다.

“여하튼 못 말리는 로맨티스트들.”

“언니는 그 남자와 어떻게 됐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잘... 됐지?”

“잘 됐으면 이렇게 혼자 왔겠냐.”

씁쓸하게 웃던 금희는 한참 뜸을 들인 뒤

“잘 안됐어.”

라고 말했다.

“삼 개월쯤 사귀었나. 서로가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라구. 그래서 내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겠다, 내가 원래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야겠다 싶더라구. 그래서 구구절절 이야기했지. 당연히 이해해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거든. 그런데...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봐. 충격을 받은 듯하더니, 며칠 동안 연락이 없더라. 그러더니, 자기랑 나는 안 맞는 것 같다구. 나를 품을 그릇이 안 된다고 했었나. 암튼, 이상한 핑계를 대더니...”

“헤어... 졌어?”

“뭐, 그렇게 됐어.”

금희는 그때의 아픔이 다시 생각나는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인숙은 혼란스러웠다. 운명적 사랑? 이런 건 없는 걸까?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사랑의 결말이 비극이라는 것이 큰 충격이었다. 갑자기 무서워졌다.

“내 경우가 이런 거지. 넌 다를 수도 있어. 너무 겁먹지 마. 넌 잘 될 거야.”

금희는 겁에 질린 인숙의 표정을 보고 응원의 말을 건넸다.

“그런데, 누구니? 너의 마음을 훔친 그 도둑놈은?”

“송중기래. 이름이....”

“설마, 엘 백화점 송중기 전무?”

“전무인지 뭔지는 모르겠고, 사장 아들 이랬어. 큐가.”

금희는 어이없어하며 웃었다.

“이런 순진한 아가씨를 봤나. 무려 재벌 아들내미를 찍은 거야?”

“재벌이 그렇게 대단해? 사람들이 만든 드라마 보니까 가난한 여자와 재벌 아들이 사랑한 이야기 투성이더만.”

“그거야 드라마니까... 그래서 큐가 엘 백화점에 취직자리 알아봐 달라고 했구나.”

“응. 나 때문에.”

“식품관 매니저님에게 말해 놓긴 했는데.... 너를 응원해야 할지 말려야 할지....”

“인간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해. 겉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계층이라는 게 엄연히 존재하거든.”

“언니가 사랑한 남자는 뭐 하는 남자였어?”

“그냥 회사원. 나도 그 사람의 생명을 구했어. 그런데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우린 만나기 힘들었을지도 몰라. 그 사람은 사람들이 말하는 화이트 칼라 계층이고, 난 블루 칼라 계층이니까.”

“화이트 칼라? 블루 칼라?”

“암튼 그런 게 있어.”

금희는 그 뒤로 입을 다물었다. 차 안은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인숙은 그제야 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녹색 천지인 세상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물이 없다는 게, 빈 공간이 보이지 않는 공기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에 왔다는 것을 실감 나게 했다. 금희는 그런 인숙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창문을 조금 열어줬다. 인숙은 공기를 깊숙이 마셨다.          



며칠 후 인숙은 금희와 함께 백화점 지하에 있는 식품관에 출근했다. 인숙은 채소 코너에 배치됐다. 채소 코너에서 오랫동안 일을 해오고 있는 명숙이 인숙의 교육을 담당했다. 처음 해보는 일 투성이었지만 인숙은 열심히 했다. 빨리 인간 세상에 적응하는 게 그 남자와 빨리 잘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숙은 같은 ‘숙’ 자 돌림이라 반갑다며 동생처럼 인숙을 챙겼다. 좋은 사람을 만난 건 인간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인숙에겐 다행한 일이었다. 채소 이름들도 모양들도 너무 낯설어 인숙은 자주 실수를 했다. 하지만 명숙은 그런 인숙을 타박하지 않고 차근차근 가르쳤다.

“너 귀하게 자랐구나.”

명숙은 세상 물정 모르는 인숙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런 말들을 던지곤 했다.

인숙은 휴식 시간에 직원 휴게소에서 금희와 자주 만났다. 같이 살고 있지만 낯선 환경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건 또 다른 의지가 됐다. 인숙은 금희의 존재가 새삼 고마웠다.

“일은 할 만해?”

“명숙 언니가 많이 참아줘서 그럭저럭 해내고 있어.”

“힘들지?”

“응 다 처음 해보는 일들이라, 그리고 채소 종류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어.”

“언니는 이런 일들을 어떻게 다 해냈어?”

“나도 처음엔 실수투성이었어. 나도 명숙이 언니가 많이 가르쳐줬지. 처음엔 채소 코너에서 일했거든.”

“왜 베이커리로 옮겼어?”

“인간 세상에서 살다 보니 빵이 좋아지더라구. 여기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기술 하나쯤 있어야겠다 싶기도 하고. 지금 제빵사 자격증 따려고 준비 중이야. 보조로 일하고 있는 게 시험 준비에도 도움이 많이 돼.”

“언닌 왜 다시 돌아갈 생각을 안 했어?”

“어디? 바닷속?”

“큐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하던데, 그게 이유야?”

“사실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나서는 너무 막막했어. 그 남자만 바라보고 왔는데, 눈앞이 깜깜하더라구. 그래서 다시 돌아갈까 생각도 했지만, 이 두 다리로 어떻게 바닷속에서 살겠어? 큐에게 부탁하면 무슨 수가 나지 않을까 했지만.... 결국 여기 남기로 했지. 사람으로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살아보자, 마음을 굳게 먹었지. 여기도 적응하니까 그렇게 나쁘지 않아. 재밌기도 하고...”

금희는 지금의 인생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숙은 ‘나는 어떻게 될까. 해피엔딩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앞에 놓인 코코아를 한 모금 마셨다.          



이틀을 쉬고 출근하자 채소 박스가 쌓여 있었다. 의외로 인숙은 힘쓰는 일이 체질에 맞았다. 여직원들이 끙끙대며 옮기는 박스도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다. 바다에서 늘 헤엄치고 다녔던 것이 팔 근육을 키운 모양이었다.

감자가 가득 든 박스를 캐리어에 올리고 있는데 명숙이 말을 걸었다.

“오늘 아침에 채소들이 많이 들어와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 언제 출근했어?”

“좀 전에 왔어요.”

“네가 오니까 든든하다야. 여기 있는 박스들 매장으로 옮기고 감자 코너에 진열도 부탁해.”

“네.”

“참, 지석 씨 알지?”

“누구?”

“왜 까무잡잡한 피부에 다부지게 생긴, 농촌 총각 있잖아.”

인숙은 일을 시작하고 며칠 뒤 창고에서 인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 알 것 같아요.”

“첫 만남에 너에게 예쁘다 어쩌다 수작을 거는 것 같더니, 너 좋아하나 봐.”

“에, 놀리지 마세요. 그분 모든 여자한테 예쁘다고 하시는 그런 캐릭터인 것 같던데.”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총각이 많이 싹싹하잖아. 이모, 고모, 어머님 해가며... 근데 너 휴무날 너를 그렇게 찾더라. 오늘 안 나오셨나, 혹시 그만두신 거 아니냐. 이거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가 않아.”

명숙은 놀리며 인숙의 반응 살폈다. 인숙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다. 명숙은 그런 인숙의 반응에

“자기는 관심 없구나!”

라고 말하며 아쉬워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젊은 애들의 연애 사건은 종종 활기가 되기도 했다.

“잘해봐. 그 총각 괜찮아. 농사짓고 있지만 알부자래. 밭 평수도 어마어마하고, 이렇게 큰 백화점과 직거래 하는 것만 봐도 알잖아. 아, 맞다! 인터넷으로 농산물 파는 사이트도 운영하고 있대. 그게 또 수익이 많이 난다고 하더라.”

인숙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관심도 없는 남자를 자꾸 들이미는 명숙이 좀 성가셨다.

“흐흐... 이거 매장으로 옮기면 되죠?”

인숙은 모호한 웃음으로 무마하며 캐리어를 끌고 재빨리 매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저 혹시, 송중기 전무 아세요?”

인숙은 일이 손에 익을 즈음 명숙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사장 아들? 알지. 그 사람은 나를 모르겠지만. 호호. 왜 너두 전무한테 반했냐.”

“그 사람 좋아하는 사람 많아요?”

“얼굴이 반반해서 젊은 애들은 뭐 연예인 보듯 하긴 하더라. 근데 싸가지 없다고 소문났던데..."

"정말요?"

"응. 재벌 아들 딸들이 다 그렇지 뭐. 어릴 때부터 '오냐 오냐' 지 비위 맞추는 사람들 천지고, 그런 분위기에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게 더 하늘에 별 따기 아니겠어? 근데, 넌 언제 봤어? 식품관에는 온 적도 없는 사람인데. 설마, 아는 사람이야?"

"그게 아니라.... 예전에 어디서 좀 마주쳐가지고..."

"뭐? 난 또 뭐라고. 마주친 것으로 치면 주차장에서 일하는 애들은 뭐 아주 친구라고 하겠다."

갑자기 인숙은 한숨이 나왔다. 그 사람 만나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얼굴 한번 보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내가 너무 순진했나. 갑자기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져 힘이 쭉 빠졌다.

"저기 오이 코너 많이 비었더라. 오이나 좀 채워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잡생각은 일로 잊어야 돼."

명숙은 인숙을 재촉하며 창고 쪽으로 밀었다. 인숙은 힘없이 대답하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오후 인숙은 쉬는 시간이 끝나고 매장에 들어서다 직원들이 웅성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직원들이 쳐다보는 쪽을 보니 양복을 차려입은 서너 명의 무리가 매장을 돌고 있었다. 딱 보기에도 회사 임원들이었다. 그런데 무리들 앞에 그 사람, 송중기 전무가 서 있었다!

인숙은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쉬는 시간에 그를 직접 찾아가야 하나, 나를 못 알아보면 어떡하지 등 온갖 생각을 하며 절망에 빠져 있던 인숙이었는데, 인숙은 지금 상황이 꿈같았다. 여직원들은 "송중기 전무님 너무 잘 생겼다" "그런데 식품관엔 웬일이야?" 등등 감탄과 궁금증을 쏟아냈다.

그때 송중기 일행은 갑자기 방향을 돌려 직원 쪽으로 걸어왔다. 인숙은 숨이 멎을 것 같아 그의 얼굴만 뚫어지게 쳐다봤다. 직원들은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임원들에게 목례를 했다. 하지만 송중기는 직원들 쪽은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매장에서 유유히 사라졌다.

잠시 후 매니저가 무리들을 해산시키며 "하던 일 하라"고 재촉했다.

인숙은 명숙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뭘 그렇게 멍하니 서 있니? 송 전무 때문이야? 아는 사이이면 인사라도 하지."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잖아요."

"식품관 리모델링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것 때문에 직접 행차하셨나. 오래 일했지만, 송 전무를 여기서 본 건 처음이네."

'정말 명숙 언니 말대로 인사라도 할 걸 그랬나. 난 왜 바보같이 얼어서 아무 말도 못 했지? 황금 같은 기회였는지도 모르는데.'

인숙은 갑자기 폭풍 같은 후회가 밀려왔다.     



그날 저녁 인숙은 허탈한 기분으로 직원 전용 출입구를 나왔다. 퇴근하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인숙 씨 되시죠?"

"그런데요."

"여기는 송중기 전무님 비서실이에요."

'송중기 전무?'

"송 전무님이 뵙자고 하시네요. 지금 시간 괜찮으시면 전무실로 올라오시겠어요?"

'갑자기? 이 전개는 뭐지?'

"네. 별일은... 없어요. 그런데 여기 백화점이 문을 닫았는데 어떻게 가면 되죠?"

"VIP 주차장에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어요. 모르면 주차 직원한테 물어보시면 될 거예요."

전화를 끊고 나자 인숙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역시 나를 기억하고 있었던 거야. 아, 하늘은 내 편이야!'

마음이 급해진 인숙은 급히 주차장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엘리베이터부터가 달랐다. 고급 자재로 만들어진 듯 화려했고, 인숙은 위화감을 느꼈다. 긴장된 마음이 더 쪼그라드는 것 같았다. 

'인숙아, 가슴을 펴. 당당하고 자신만만했던 모습은 어디 간 거냐.'

인숙은 엘리베이터 벽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용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한숨이 나왔다. 인간 세상에 발을 디디고부터는 쪼그라들게 하는 일 투성이었다.

인숙은 엘리베이터가 '땡' 소리를 내며 도착을 알리자 심호흡을 하고 복도로 나섰다.

비서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비서는 퇴근한 모양이었다. 인숙은 전무실로 보이는 문 앞에 섰다. 조심스럽게 '똑똑' 두드리자 안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묵직한 저음에 인숙은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다. 인숙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송중기가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인숙은 문 앞에 서서 그가 돌아보기를 기다렸다. 송중기는 천천히 돌아서며

"맞지?"

라고 대뜸 물었다.

인숙은 송중기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문맥을 파악하느라 머뭇거리는 사이 송중기는 다시 물었다.

"바닷가에서 나를 구했던 사람. 맞나? 기억이 어렴풋했는데 오늘 식품관에서 너를 보는 순간 기억이 명확해졌어."

"맞습니다."

"얼마면 돼?"

"네?"

"얼마면 되냐고? 사례비 받고 싶어서 내 앞에 나타난 거 아니야?"

인숙은 머리를 한 대 맞은 듯 띵 해졌다. 갑자기 머릿속 회로가 고장이 난 것 같았다.

송중기는 소파에 앉으며 인숙에게도 자리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인숙은 자리에 천천히 앉으며 말했다.

"대가를 바라고 구한 건 아니었어요."

"대가를 바란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 내 앞에 나타났지?"

"그게... 그러니까."

이렇게 차갑게 구는 사람에게 첫눈에 반했다는 말은 절대 할 수가 없는 인숙이었다.

"뭐, 어설픈 로맨스라도 꿈꾸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는 피식 웃더니

"생명을 구해준 건 고마워."

그제야 감사 인사를 했다.

"나중에라도 필요한 게 생각나면 연락해. 차든 집이든 사줄 테니까. 난 깔끔한 게 좋으니까."



인숙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한 표정으로 백화점을 나왔다.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송중기가 좋은 사람일 거라는, 자신을 운명으로 알아봐 줄 거라는 순진한 환상에 사로잡혔던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아서, 미칠 것 같았다. 


"송 전무, 싸가지 없다고 소문났던데... 재벌 아들 딸들이 다 그렇지 뭐. 어릴 때부터 '오냐 오냐' 지 비위 맞추는 사람들 천지고, 그런 분위기에서 착한 사람이 되는 게 더 하늘에 별 따기 아니겠어?"


"인간 세상은 생각보다 복잡해. 겉으론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고 하지만, 계층이라는 게 엄연히 존재하거든."


명숙이 했던 말도, 금희의 말도, 그 순간 인숙의 머리가 아닌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생각해보면 송중기의 행동은 타당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감사의 말을 먼저 하지 않은 건 괘씸하지만, 집이며 차며 보상을 해준다고 하지 않는가. 그의 상황에서는 그게 최선일지도 몰랐다. 제정신도 아닐 때 만난 여자를 갑자기 사랑하게 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말이다. 머리로는 납득이 됐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온 자신의 가슴은 이해를 거부했다.

인숙은 한 손에 쥐어진 명함을 멍하니 보며 눈물을 흘렸다. 그때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따뜻하게 잡았다.

"인숙 씨, 아니세요?"

인숙은 서둘러 눈물을 닦고 소리가 나는 쪽을 올려다봤다. 지석이었다.

"어디 아프세요? 왜 이런 데 앉아 계세요?"

지석은 걱정스러운 눈길로 인숙을 쳐다봤다. 인숙은 서둘러 일어나려 했지만 풀린 다리 탓에 한쪽으로 휘청했다. 지석은 그런 인숙을 부축하며 길가에 있는 벤치에 인숙을 앉혔다.

"거래처 다녀오는 길인데 인숙 씨가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고 급하게 내렸어요. 괜찮으신 거죠?"

인숙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리 지석이 세워둔 트럭이 보였다.

"여기 잠깐 계세요. 물이라도 사 올게요."

지석은 인숙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다 편의점 쪽으로 서둘러 뛰어갔다.

인숙은 그런 지석의 뒷모습을 보며 갑자기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절망적인 순간에 손을 내밀어준 지석이 고마웠다.     



'나는 어떻게 될까. 이 일을 계기로 송중기 전무와 조금은 가까워질 수 있을까. 그 차가운 인간이 나에게 마음을 여는 순간이 올까.'

그건 모든 바다가 땅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처럼 보였다. 

'아니면 나는 지금 손을 내밀어준 저 사람을 따라가게 될까.'

인숙은 잠시 지석과 함께 농사짓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또 아니면 나도 금희 언니처럼 내 길을 찾아 인간으로서의 내 삶은 꾸려나가게 될까'

인숙은 머리 위에 떠 있는 달을 쳐다봤다. 바다 위에서는 명확하게 보였던 달이 고층 빌딩 사이에서는 어쩐지 빛을 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인숙의 미래처럼 달도 뿌옇게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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