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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Apr 21. 2024

03. 운명적인 파리의 첫인상

파리의 첫인상이라,

“보석같은 조명으로 무장한 에펠탑이 고고하게 빛나고 있더라”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파리의 첫인상은 기억도 안 난다. 당연하게도. 파리는 가보지도 못했으니까.

샤를 드골 공항에서 바로 버스를 타고 교육도시(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그냥 소도시)인 낭시(Nancy)라는 곳으로 이동했다. 프랑스어라고는 “봉주르(Bon jour, 아침인사)” “메르시(Mercy, 고맙다)” 밖에 몰랐던 나는 당연히 어학연수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리고 살인적인 방값을 자랑하는 파리보다는 작은 소도시에서 시작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대부분의 유학생들이 그렇게 한다. 어학 연수는 물가가 비교적 저렴한 지방에서).

첫인상이라는 게 결국 공항의 모습인데, 최첨단(?)을 자랑하는 인천공항에 있다가 샤를 드골 공항에 내리니, 좀 과장하자면 70년대로 시간 이동을 한 느낌이었다. 인천 공항이 웅장했다면, 샤를드골은 ‘코지(Cozy)’했다.

그때 나의 기억이 제대로 됐을 리 없겠지만(앞에서 밝혔듯 난 완전 긴장 모드였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레트로’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인천 공항보다 한참 전에 만들어진 공항이라 낡은 느낌이 없지 않았고, 당연히 규모도 작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데서나 담배를 피우는 여자들의 모습이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당시 한국에서는 여자들이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면 어른들이 혀를 찼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던 나에게 공공장소에서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피우고, 그 꽁초를 아무 데나 버리는 그들의 모습이 너무 낯설었다.

지금 다시 샤를 드골 공항에 간다면 당시 내 기억이 얼마나 왜곡돼 있었는지 깨닫게 되겠지. 그리고 물론 살다 보니 유모차를 밀며 담배 피우는 아기 엄마들의 모습도, 거리 곳곳에 널려 있는 담배꽁초들도 아무렇지 않게 되었다. 심지어 ‘청소부들 일자리 없어질까봐 거리에 쓰레기와 꽁초를 버린다’는 프랑스인들의 말도 안 되는 논리도 믿게 됐다.     


시골 얼뜨기, 촌뜨기 같았던 나의 프랑스 생활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해질녘에 유학원에서 빌린 버스를 타고, 나처럼 얼어있는 유학생 무리들과 낭시로 향했다.

몸은 이미 녹초였지만 정신은 이상할 정도로 또렷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파리 외곽 도로는 이미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난 필사적으로 파리를, 프랑스를 보려고 했던 것 같다.

TV 속 모습이 아닌 프랑스의 실제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앞으로(몇 년이 될지 모르지만) 살 게 될 곳이 어떤 곳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깜깜했다. 한국보다 가로등도 더 없는 것 같았고, 집들도 너무 띄엄띄엄 있어서 집인지도 모르게 스쳐 지나갔다.

기숙사에 도착할 때까지 과장해서 말하자면, 천지 분간을 하기가 힘들었다. 낭시에 도착해서도 그런 분위기는 계속되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번쩍이는 한국의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저녁 8시만 되면 상점들이 다 문을 닫는다). 주황색의 오래된 가로등들이 길을 잃지 않을 정도로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확연한 차이가 불편하다기보다 유럽다워서 좋았다. 낡고 적당히 불편하고, 그런 것들이 오히려 낭만적으로 느껴졌다.     


하늘을 날고, 산을 넘고 강을 가로지르는 긴긴 여행 끝에 마지막 종착지인 기숙사에 도착했다. 유학원에서 나온 직원이 기숙사 관리인에게 미리 받아놓은 열쇠를 내밀었고, 나는 늦은 밤 기숙사 마당을 쩌렁쩌렁 울리는 캐리어 바퀴 소리에 미안해하며(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기숙사는 방학을 보내러 집으로 돌아간 아이들 때문에 거의 비어있었다), 이제 몇 달 동안 내 집이 되어줄 보금자리에 도착했다. 캐리어를 들여놓고 문을 닫고 낡은 침대에 앉는 순간, 안도의 한숨과 함께 왈칵 슬픔이 밀려왔다.

긴장이 풀린 탓이었을까. 아님 침대 하나 책상 하나 덩그러니 놓여있는 을씨년스러운 방 풍경 때문이었을까, 또 아님 너무 멀리 와버렸다는 자각이 그때서야 든 것일까.

난 그 슬픔을 날리려 하기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김윤아의 처연한 노랫소리를 들으며 그 감정에 더 빠져들었던 것 같다.

프랑스, 쓸쓸한 기숙사 방, 긴 여행의 피로감, 적당히 센티멘탈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문 옆에 있는 작은 세면대의 물을 틀었다. 큰 소리에 놀랐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방음이 전혀 안 되는 얇은 나무 벽이었다. 다른 방에서, 복도에서 나는 소리들이 벽을 다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불안한 이방인을 더 불안하게 만드는 벽이었다. 견고하고 안정감마저 느껴졌던 한국 아파트의 콘크리트 벽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까칠까칠한 모포를 덮고 삐걱거리는 침대에 누워, 김윤아의 노래를 들으며 잠을 청했다. 피곤했지만, 잠은 쉽게 오지 않았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인가. 당장 내일 아침엔 뭘 먹어야 하지. 슈퍼는 어디에 있지 등등 온갖 걱정에 둘러싸인 채 새벽녘이 되어서야 겨우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을까 싶다. 해외라고는 제주도(그땐 해외처럼 느꼈다) 밖에 가보지 못했던 내가, 이역만리에 혼자 갈 생각을 하다니. 첫 독립을, 말도 안 통하고,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투성이인, 어떻게 보면 이상한 나라에서 시작할 생각을 하다니.

간이 부어도 한참 부었지 싶다. 그만큼 내 삶이 갑갑하게 느껴졌던 걸까. 그 모든 두려움을 상쇄시킬 만큼? 아님 그 시절은 나도 몰랐던 내 속의 호기심과 도전정신이 폭발하던 시기였을까. 진짜는 뭣도 몰랐기 때문이 아닐까. 

언어가 안 돼 하루하루 그놈의 불어와 씨름할 일도 몰랐고(알았지만, 내가 언어 천재일 거라고 지레 착각했고), 싼 방을 구하느라 이사를 그렇게 자주 할 줄도 몰랐고, 무엇보다 한국이 그렇게 그리워질지도 몰랐다(애국자도 뭣도 아닌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유학을 가겠냐고 하면....물론 YES다. 때때로 센 강의 치명적인 노을도, 낭만의 상징 에펠탑도 위로가 되지 못할 만큼 힘든 순간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또,  YES다.

파리는 내 인생의 많은 부분을 바꿔놓았으니까. 어항 속 물고기로 살아온 내 인생에 큰 변곡점이 되어주었으니까.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요? 프랑스 유학이죠!”라고 말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

건축과를 전공했던 내가 영화 관련 일을 하게 된 것도 프랑스때문이었고, 내가 그림을 좋아하게 된 것도 파리가 기폭제가 되었고, 무엇보다 여행형 인간이 된 게 다 그놈의 파리 때문이었다. 

이 외에도 너무 많은 것들이 유학 이전과 이후로 나뉘어졌다. 나와 다른 인간을 포용하는 방법(말이 거창하지만 사실은 참고 봐줄 수 있는 인내), 인생을 나무가 아닌 숲으로 보는 법, 그리고 부모님 품에서라면 절대 겪지 않았을 인생의 쓴맛까지도 알려줬다. 그놈의 사랑스러운 파리가. 어쩌면 지금의 나라는 인간에게 조금이라도 괜찮은 구석이 있다면 파리, 프랑스 때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는 많은 기회와 경험을 제공해줬으니까.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랄드가 부른 노래 중에

‘I love Paris'라는 노래가 있다.

엘라는 매력적인 목소리로

“나는 봄날의 파리를 사랑한다

나는 가을날의 파리를 사랑한다

나는 여름날의 파리를 사랑한다

나는 겨울날의 파리를 사랑한다

나는 파리의 모든 순간을 사랑한다“

라고 노래한다.

난 파리가 그리울 때마다 

음도 맞지 않는(난 음치다) 이 노래를 흥얼거린다.

이 노래처럼 난 파리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울증 걸리기 딱 좋은 겨울 날씨까지도.

비오는 겨울이면 생생하게 떠오르는 풍경이 하나 있다.

어두컴컴하고 습기로 가득 찬 어느 겨울 아침,

(프랑스는 겨울이 우기다)

한쪽에서는 빵집 아저씨가 입간판을 펴며 영업 준비를 하고,

나는 동네를 달리고 있다.

그때 맡아지던 버터향 가득한 빵 냄새, 

코끝에 느껴지던 차가운 공기, 

이 모든 게 4D 영상처럼 떠오른다.  

   

파리는 그런 곳이다. 

나에게.

모든 순간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도시.


photo by 이케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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