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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케이트 Apr 22. 2024

04. 벚꽃 잎이라도 날리는 날은,
심장이 움찔움찔했다

언젠가 어떤 선배가 말했다. 여행지에 가면 인간은 두 유형으로 나뉜다고. 기분에 들떠 말이 많아지는 인간과 오히려 차분해지며 자신의 내면 속으로 침잠하는 인간. 그땐 그 말을 흘려들었는데, 어느 날 친구와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다. 창밖 풍경을 보며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기억해두려고 말수가 적어진 내 모습을 보게 되면서, 난 두 번째 유형의 인간이구나, 알게 되었다.   

            

물론, 선배 말이 완전히 맞진 않다.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니까. 어떻게 두 가지 유형으로 완벽하게 나눌 수가 있겠나. 나도 매번 차분해지는 건 아니니까. 친구들과의 여행에서는 세상 수다스러워지기도 하니까. 하지만 난 대체적으로 두 번째 유형의 인간이었다.               


그래서 사실 여럿이 하는 여행보다 혼자 하는 여행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또 그래서 여행지에 도착하면 내 모든 감각은 200% 예민해진다. 어떤 것도 놓치지 않기 위해. 이런 내가 때때로 너무 피곤하지만, 어느 순간 포기했다. 나란 인간은 이렇게 생겨먹었으니까, 그 덕에 그 기억으로 글도 쓰게 됐으니까. 역시 나쁘기만 한 일은 없다. 반대로 좋기만 한 일도 없지만.         

           

낭시(Nancy)는 하나의 등불과 함께 나에게 찾아왔다. 천지 분간을 할 수 없는 어두운 기숙사 마당에 섰을 때는 좀 막막했다. 어떤 시간들이 다가올지 모른다는 점에서, 깜깜한 기숙사는 하나의 복선 같았다. 그때 기숙사 입구에 있는 작은 오두막(단층짜리 작은 사무실은 마치 산속에서 발견한 오두막 같았다)에서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아쾌이(accueil)‘이라고 불리는 그 사무실은 기숙사에 있는 학생들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공간이었다. 한국에서 보낸 엄마의 택배도 받아주고, 생활에 필요한 모든 수속과 서류를 처리해줬다. 때로는 업무와 상관없는 일에 대한 상담도 친절하게 해주는 곳이었다. 그 사무실에는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가 업무를 보고 계셨는데(이상하게 다른 직원은 생각이 안 난다. 혼자 근무하지는 않았을 텐데) 낯선 이국 생활에 의지가 될 만한 분이셨다.                


물론 그 이후로 이런 분은 만나지 못했다. 아쾌이에 계신 분은 모두 친절한가 했지만, 그건 그분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동양인이라고 무시만 안 당해도 다행인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노골적으로 나의 더듬거리는 불어를 못 알아듣는 척하는 아줌마도 있었다(“난 너의 불어를 못 알아듣겠어” “그래서 천천히 이야기하잖아” “얘 뭐라는 거니?” “....” 뭐 이런 상황들).                


그땐 몰랐다. 그 할머니가 정말 좋은 분이라는 걸(도대체 내가 뭘 알고 있었겠는가). 그땐 프랑스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라 나의 불어는 그야말로 ‘괴발개발’이었다. 나의 엉망인 불어를 그분은 찰떡같이 알아듣고 문제들을 해결해주셨다. 아직도 인자하신 그 할머니가 종종 생각난다. 그리고 함께 떠오르는 불빛. 그땐 그게 내 인생을 인도할 불빛처럼 보였다.                    


도착한 다음 날은 어제와 다른 장면들이 상영되었다. 커튼 없는 큰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에 눈을 떴고, 창문을 열었는데 너무 아름다운 풍경이 선물처럼 대기하고 있었다. 봄이 오고 있는 풍경. 연초록으로 가득한 캠퍼스와 다정한 햇빛. 아직은 적당히 차가운 대기(2월이었다)가 상쾌하게 여겨졌다.     

           

대충 옷을 걸쳐 입고 마당으로 나왔다. 어둠 속에서 보지 못했던 건물의 전체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코디언 모양으로, 옆으로 펼쳐져 있는 4층 건물. 오래되긴 했지만, 멋있었다. 다행이었다. 이런 환경이 힘든 이국 생활의 위로가 되겠지. 아니 그땐 힘들지 어떨지도 모를 때라 마냥 설레기만 했던 것 같다.        

       

봄이 되자 역시 그 마당(이라기보다 캠퍼스)은 내 눈물을 닦아주는 곳이 되었다. 노랗고 빨간 꽃들이 흐트러지게 피기 시작했던 거다. 벚꽃 잎이라도 날리는 날은 연애라도 해야 할 것 같아 심장이 움찔움찔했다.            


트램(Tram), 높지 않은 건물들, 노천카페들이 둘러싸고 있는 광장, 여유로움. 낭시 하면 두서없이 떠오르는 것들이다. 낭시에는 파리에 없는 트램이 있었는데, 이 오래된 교통수단이 주는 낭만이 대단했다. 고풍스러운 골목들을 누비는 기차 속에 있으면 내가 유럽에 있다는 실감이 가슴으로 전해졌다. 왠지 모를 설렘들이 뿜뿜 솟아났다.               


너무 짧게 머물렀던 곳이라 더 아쉬웠던 도시다. 그래서 내가 놓쳤던 것도 많았을 거고, 그래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방문하고 싶다.          


난 몇 달 뒤 예정보다 빨리 파리로 이사했다. 독립 후 첫 이사였기에 이번에도 난 뭣도 몰랐다.    


photo by k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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