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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Jan 29. 2023

그날, 버스 안에서는

휴대폰에 진동음이 울려 확인을 하니 여행사에서 온 안내 메시지이다. 한동안 뜸하던 여행사 안내 메시지가 폭주하다시피 메시지 박스를 채우는 것을 보면 코로나 이전의 해외 관광 붐이 완연히 되살아 나고 있는 듯하다. 설을 지나 지인들과 전화로 안부를 나누다 보면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동남아 여러 나라로 골프 라운딩을 하고 온 여행담이 빠짐없이 이어지는데, 꼬지로 꿰어놓은 먹음직한 전을 빼먹을 때처럼 전해주는 이야기마다 하나같이 군침을 돋운다.


사실, 어디를 가든 여행에 대한 목마름이 누구보다 간절했었기에 교직에서 물러나 시간적으로 여건을 갖추고 나니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복병이 앞을 가로막았다. 코로나로 인해 해외는커녕 가까운 국내 여행조차 선뜻 나서기에 부담스러웠지만, 뜻 맞는 친구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 주었기에 하루나 이틀 여정의 가까운 여행길에는 기꺼운 마음으로 동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해외여행이 봇물 터지듯 다시 호황기로 접어들자, 마음속 깊이 잘 다독여 두었던 유랑벽이 다시 도지는 듯, 한 통의 여행안내 메시지에도 마음이 그만 출렁거리고 만다.


인터넷으로 여행기사 검색을 하다가 이번 설날에 태국 파타야로 골프 라운딩을 다녀온 여행담에 눈길이 갔다. 글을 읽던 중에 오래전 파타야를 다녀와서 써 둔 글이 갑자기 생각나 이를 다시 찾아 읽었는데, 글의 내용이 현지에서 보고 느낀 여행담이 아니라 여행을 끝내고 나서 김해공항을 출발해서 포항으로 돌아올 때 버스 속에서 겪었던 경험담을 글로 옮겨놓은 것이다. 실은, 당시만 하더라도 글쓰기가 여러 일들 가운데서도 뒷전이었기에 여행 중 있었던 세세한 일들은 이미 기억 속에서 까마득히 멀어진 지 오래이고,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속 풍경처럼 한참을 머릿속에서 떠올려야만 간신히 기억에 잡힐 듯 가물거린다. 그저, 여행 중에 힘들게 먹었던 낯선 음식과 골프장 주변의 이국적인 풍물들에 관한 어슴푸레 한 기억만이 조금 전 보았던 여행담 속의 사진들과 판박이로 겹쳐지고 있을 뿐이다.


그렇긴 해도, 바쁜 일상을 벗어나서 난생처음 휴가차 다녀온 당시의 해외 골프여행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다녀오고 나서부터 바로 해외여행에 대한 새로운 갈망이 마음 깊은 곳에서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더욱이, 퇴직을 눈앞에 두자, 마치 오랫동안 이어져 온 관행인 듯 이런저런 여행 제안이 한꺼번에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그러던 차에 생각지도 못했던 코로나가 느닷없이 터져버린 것이다. 그토록 바라왔던 일이 어쩔 수 없는 힘으로 인해 무기력해지자 이내 모든 것을 체념하는 쪽으로 마음이 굳어졌다. 막상 해외여행이 재개되었음에도 한번 무덤덤해진 마음속으로는 설렘조차 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요 며칠 사이 나도 모르게 해외 여행담으로 눈길이 가고 있는 것이다. 마치, 겨울바람과 추위에도 아랑곳없이 봄이 오면 한꺼번에 눈을 틔우려고 속을 단단히 여미고 있는 목련처럼, 잔뜩 웅크렸던 마음속을 비집고 만만찮은 기세로 예의 방랑벽이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돌아가서, 오래전 써 둔 그날 이야기를 다시 소환해  본다.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그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동남아 골프여행을 떠났습니다. 방학 중에도 어김없이 보충수업을 하게 되어, 다른 선생님들에게 과한 부담을 주면서까지 혼자 몸을 빼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므로, 그간 여러 차례 해외로 여행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을 삭이면서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침 올 해는 담임을 맡지 않고 3학년 영어수업만 담당했었기에, 모임을 같이해 온 지인들과 어울려 태국 파타야로 5박 6일간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각설하고, 지금  이야기는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전날 저녁 늦은 시간에 방콕을 떠나, 그다음 날 이른 새벽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포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겪은 일입니다. 당시, 거칠게 급히 메모해 두었던 글을 찾아 정리하면서, 그날의 심정으로 되돌아가서 글을 씁니다.

《 버스 안에서 》

이른 새벽,
김해공항에서
포항 가는 버스를 타다

우리 일행은 다섯,
젖먹이 손주를 품에 안은
할머니와
총각 한 사람 홀로 서 있고
연인인 듯 마주 안은 커플,
동남아인 엄마와
아빠를 더 닮았을 어린 딸

두 모녀를 마지막으로
서둘러 탄 버스 속
저마다 자리를 잡는다

수금이 시작되자
나이 지긋한 검표원,
안경 너머로 눈알 굴리며
사잇통로를 오간다

경주 칠천 오백 원
포항 만천 원,
사람 따라 수금 끝나고
맨 뒷자리에 달랑 남은 모녀,
건네받은 돈 눈대중하더니
수금원이 묻는다

"얼라는 몇 살인교?"

"따섯살요"

아이 말, 서둘러 끊으려
엄마가 얼른 말한다

마뜩지 않은 눈으로
아래위를 훑고 돌아서는
수금원 목덜미로
느닷없이 꽂히는 말

"아니야, 엄마!
난 일곱 살,
왜 다섯 살이라 말해?"

딸아이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 그득하고,
놀란 애 엄만 헛기침 섞어
재차 다짐을 한다

"아냐! 넌 따섯살이야,
따섯살!"

금세 힘 풀린 목소리로
슬픈 웃음, 눈물처럼 번진다

이를 어쩌려나!
딸 아인 두 살 작아진
제 나이 싫었던 거다

나이 일곱,
세상 알기엔 모자라지만,
까닭 없이 작아진
제 나이 싫어
그만 울음보 터지고 만 것이다

"얼른 가서 반표 끊어 오소!"

"손님 차면 내 무릎 위에
안출끼라예!"

딸 나이 대신 숨기고만
오천 오백 원,
부끄럼으로 버티기에
버겁지 않을 부피의 돈

어색한 분위기,
버스 속을 휘돌자
이곳저곳 흩어지는
헛기침 소리

"얼라 반표,
얼른 끊어 오소!"

앞뒤 어른들, 울음보 터진
아이 달래려 말을 건넨다

"아가야, 괜찮아
그러니 울지 마라"

속상한 심정
위로해 주려는 뜻임을
애 엄만 알기나 할까?

검표원 내려가자
표정 없이 다가온 운전사
거듭 묻는다

"얼라, 진짜 몇 살인교?"

"왜요? 일꼽살요!
내 무릎 위에 안꼬 갈 거라예!"

"안되니더, 돈 얼른 주소!
반표 끊어 올 거니까"

원망스러운 엄마 눈길이
아이에게 머물자
다른 손님들, 할 말을 잃었다
어찌할 거나, 이런 게 세상인걸!

그래, 모녀는 모처럼
고향을 다녀왔던 거다
넉넉지 못한 친정 살림,
오천 오백 원이면
고향 땅 피붙이 몇 끼라도
배불리 먹일 돈,
이놈의 삿된 돈에
그만 빈정이 상한고 만 거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끝내 잠 못 이룬
포항행 버스 안 풍경

(2015. 1. 20)


벌써 8년이나 지난 이야기지만 당시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눈에 잡힐 듯 선하다. 여전히 까만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녘의 공항대합실은 막 열대의 나라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짐을 찾은 후 대합실을 빠져나가면서 저마다 입 밖으로 내뿜는 숨결로 뽀얀 김서림이 여기저기서 묻어나고 있었다. 나라밖으로 나갈 때 입었던 두툼한 패딩으로 다시 갈아입기는 했으나, 찬바람 속에 칼날같이 곤두선 냉기는 사람들의 새벽 소름을 한껏 돋우면서 졸음으로 무뎌진 신경까지 거슬리게 만들고 있었다. 그날, 안쓰러운 마음에서 무심코 뒤돌아 본 순간 마주친 모녀의 동공 깊숙한 눈동자가 한동안 마음속을  떠나지 않았다.


뒤늦게 안 사실이지만, 파타야에는 고등학교 친구가 임대 숙박형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어 진작부터 동기들이 이곳을 즐겨 찾는다고 했다. 몇 해 전 그 친구가 포항에 왔을 때 넌지시 이야기를 꺼냈더니, 퇴직 후 내킬 땐 언제든지 와서 함께 놀자고 선뜻 먼저 제안을 했다. 생업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평소에도 친구들이 찾아오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이 친구는 일 년 중 거의 절반을 이곳에서 보내고 있으니 언제든 나만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곳이 파타야인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갔을 때는 일정을 짠 여행사의 스케줄에 맞춰 허겁지겁 돌아다니다 보니 골프 라운딩은 물론이고 이국의 정서를 느긋하게 느껴볼 겨를조차 없었다. 결국 변변한 여행기 한편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당시의 여러 기억들이 머릿속에서 아스라이 멀어지고 말았다.


여행은, 특히 나라 밖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남긴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까지 마음으로 단단히 결심을 하고, 설렘 속에 여행준비를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일이 그저 즐겁기만 하다. 막상 여행을 떠나고부터 맞닥뜨리게 되는 생각지도 못한 낯섦과 힘듦이 때로는 고달프기도 하지만 여행이 주는 즐거움과 행복을 깎아내리진 않는다. 그래서 지난날 여행한 추억이 이후로도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게 되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난번 파타야 여행은 이도 저도 아닌 여행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우선, 골프를 치러 떠난 여행이었지만 기대했던 만큼 골프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고 이 때문에 다른 여러 일정이 편하질 않았다. 여러 눈요기 관광이나 다양한 현지 음식을 두루 체험하긴 했어도 이를 즐길 마음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어떤 날은 하루 일정이 지겨울 때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김해공항에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는 아쉬운 마음보다는 홀가분한 마음이 더 컸었던 것 같다. 여행 중에 있었던 여러 기억보다는 앞서 이야기한 버스 안 풍경이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것도 결국 이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코로나가 유행한 이후로는 스크린 골프조차 치질 않고 있다. 우선은 실내 감염이 우려되어서였고, 어느 순간부터 골프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오늘, 휴대폰에서 여행사의 안내 메시지를 확인하고 이를 좇다가 여행기까지 읽게 되니 가물가물 흐려지던 지난날의 여행 기억이 새록새록 되살아 났다. 게다가, 책상 옆에 치워둔 골프백으로 우연히 눈길이 머물자 어깨 근육마저 근질거리기 시작했다. 제풀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빈 스윙까지 몇 차례 되풀이 해 보았는데, 아직은 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쓴웃음이 나왔다. 너무 오래 운동을 쉬고 있었던 것이다.


호되게 한번 몸을 앓고 난 뒤로는 몸에 조그만 이상을 느껴도 지나치게 과민해지고 생각이 많아졌다. 한편으론, 기회가 닿을 때는 결코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여러 의미 있는 행사들이 오는 봄부터 줄줄이 예정되어 있다. 하지만, 이런 바쁜 일정 가운데서도 어디를 가든 시간을 내어 꼭 해외여행을 한 번쯤은 다녀오고픈 마음이다. 그래서 지난번 여행에서 맘껏 누리지 못했던 여행의 즐거움을 제대로 누리고 싶고 기억에 남을 만한 여행담도 남기고 싶다. 얼른 이 겨울이 끝나고, 속을 단단히 여민 목련이 화사하게 꽃망울을 터트릴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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