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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Feb 04. 2023

탁구장의 그녀

그녀는 암팡지고 사나웠지만 속마음은 따뜻했습니다.

골목길을 여러 번 돌고 나서야 나오는 동네 탁구장은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지나쳐 가기에도 두려운 마음이 생겨났다. 한 번씩 골목길을 지나치다 맞닥뜨리는 낯선 형들의 손에 들린 담뱃불과 험한 인상이 무서웠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가 고모님 댁에 조립식 탁구대를 들였고, 당시 중학생이던 사촌형이 라켓을 내 손에 쥐어 주어 비교적 이른 나이에 탁구를 배울 수 있었다. 운동 신경이 남달랐던  형은 씨름이나 권투와 같은 투기종목뿐만 이니라 축구나 정구와 같은 구기종목에도 두루 능했고, 어디서 배웠는지 몰라도 어린 내가 보기에 형의 탁구 솜씨는 기본기부터가 남달랐다.


형의 손에 이끌려 종종 동네 탁구장에 드나들면서, 탁구장 주인집 아들로부터 정식으로 지도를 받게 되면서 내 실력도 일취월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주인집 아들은 학교 탁구부에 소속된 엘리트 선수는 아니었지만, 경상북도에서 주관하는 탁구대회에 개인자격으로 출전해서 입상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 형으로부터 라켓의 그립 잡는 법과 포핸드와 백핸드의 타구법, 다양한 서브 구사 방법까지 배우면서부터는 웬만한 동네 형들과 겨뤄도 좀처럼 지는 법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탁구장을 오가면서 느꼈던 이질감과 두려움이 말끔히 지워지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1학년이던 1973년,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이에리사와 정현숙이 주축이 된 여자대표팀이 대한민국 구기종목 사상 처음으로 단체전에서 세계 제패를 하게 되자 전국적으로 탁구붐이 일어났다. 동네 탁구장 역시 방과 후나 주말이 되면 탁구를 치러오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그 무렵엔 나도 키가 부쩍 자라 또래보다 머리 하나를 눈 아래로 둘 만큼 키가 컸었는데, 고등학생인 동네 형들과 자주 어울려 탁구를 치곤 했다. 게다가 함께 어울리던 친구의 여동생이 도대표로 출전한 전국대회에서 초등부 3위로 입상까지 한 터여서, 합숙을 하던 여동생이 한 번씩 탁구장에 놀러 와 함께 탁구를 치면 사람들이 탁구대 주위로 둘러서서 구경까지 할 정도였다.

"넌, 왜 탁구장엘 다녀. 애들 저러고 다니는 꼴이 보기에 좋니?"
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땅바닥만 발로 툭툭 차고 있었고, 몇 번의 발길질에 패인 흙먼지가 지나가는 바람에 솟구쳐 모르자 그녀는 홱 몸을 돌려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사라졌는데, 찰랑거리던 그녀의 단발머리에서 풍기던 샴푸 냄새가 골목길 깊숙한 곳으로 자욱이 뒤를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큰길 넘어 시장터 안 쪽 어딘가에 살고 있었다. 어느 날부턴가 친구가 누나, 누나 하며 그녀를 따르길래 어쩌다 탁구장엘 가면 그냥 스쳐가듯 한 번씩 보는 정도였고,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동네 아이들과도 잘 어울리지 않던 내가 나보다도 나이가 더 많은 건너 마을 여자 아이에게 흥미가 있을 리 만무했고, 무엇보다도 고작 한 살 밖에 나이차가 나지 않는 여자 아이에게 누나라고 부르기는 정말이지 알량한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았다.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탁구장에 가는 일이 뜸해졌지만, 당시 사춘기를 심하게 겪고 있던 친구가 집밖으로 불러내면 어쩔 수 없이 동네 탁구장을 찾게 되었다. 그땐 탁구장에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 가운데서도 낯선 아이들도 자주 눈에 띄었는데, 다른 동네서 온 소위 말하는 노는 아이들이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잠시 탁구를 치다가는 탁구장 뒤편 골목길에 모여 몰래 담배를 피우 했었다. 물론, 내 친구도 그 무리 가운데 하나여서 마뜩지 않지만 그들 가운데는 서로 눈인사를 나누는 아이들이 몇몇 섞여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마치 여왕벌과도 같은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존재가 바로 그녀였다.


감청색 교복을 잘록한 허리선을 따라 몸에 딱 맞도록  맞춰 입은 그녀의 몸매는 멀리서 보아도 금방 표시가 났다. 어쩌다가 친구와 함께 그들이 모여 담배 피우는 아지트를 들릴 때엔 미리 헛기침부터 해야만 했다. 일전, 밤이 어둑해질 무렵에 친구를 만날 일이 있어 무턱대고 그곳을 찾았다가 담뱃불을 숨기느라 허둥대고 있는 무리들 가운데서 그만 그녀와 눈이 딱 마주치고 만 때문이었다. 당시 그녀가 담배를 확실히 피우고 있었는지는 자신할 순 없지만, 이후로 그녀가 스치듯  곁을 지나칠 때엔 샴푸 냄새보다 혹시 담배를 피우고 난 냄새가 풍길까 봐 괜스레 걱정했던 기억이 난다.


그날부터였던 것 같다. 그녀에 대한 알 수 없는 적대감이 마음속에서 불타 올라, 마치 내 친구의 온갖 비행(非行)이 오로지 그녀 탓으로 여겨졌으며, 남의 동네까지 기어들어와 온 동네 물을 흐리고 다니는 그녀 주변의 노는 녀석들까지 더욱 싫어졌다. 결국, 공연히 센 척 보이기 위해 한 번씩 친구를 만날 때면 이들과 서로 나누는 말이 험해졌으며 내가 입는 바지의 아랫단도 노는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는 처럼 하루가 다르게 좁아져 갔다. 아울러, 이전과는 다르게 친구가 따로 부르지 않아도 탁구장을 찾는 일이 잦아졌으며, 괜히 할 일도 없이 탁구장 뒤편 공터에 들렀다가 아이들과 서로 눈인사만 건네고 돌아서곤 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은, 아이들이 그녀와 어울려 있을 때는 무슨 영문인지는 몰라도 좀처럼 대놓고 담배 피우는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부터는, 은근히 눈을 아래로 깔고 그녀 몰래 담배를 건네는 못된 녀석들도 있었기에, 지기 싫은 마음에서 마음의 갈피도 잡지 못한 채 괜히 주눅이 들어 있던 시기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별스럽게도 꼭 내 나이 또래의 아이들하고만 어울렸다. 탁구장 안에는 자기 또래나 그 보다 나이가 많은, 소위 노는 아이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저 오빠라 부르며 따를 뿐, 탁구장을 벗어나기만 하면 그녀 주위로는 오로지 남자 중딩들만 몰려들었다. 그런 애들 가운데는 가출을 했거나 학교에서 정학을 맞은 아이들도 수두룩 했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하긴, 평준화가 되긴 했어도 신흥 명문 인문계 여자고등학교로 진학할 만큼 그녀는 공부 잘하고 예쁘기조차 한 데다, 좀체 길들여지지 않는 망아지 같은 선머슴아들을 수월하게 다룰 만큼 대차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내 눈에 비친 그녀는, 그녀 주변 아이들처럼 비행 청소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연합고사를 치르고 겨울방학을 맞아 학교배정을 기다릴 때였다. 하는 일없이 탁구장에 죽치고 을 때가 많아졌다. 종종 사촌들과 어울려서 갈 때도 있었지만, 친구가 중학교에서 자퇴를 하고 난 이후론 탁구장에서 좀체 친구 얼굴 보기가 어려웠다. 희한한 일은 그에 때맞춰 탁구장 주변에서 놀던 아이들 역시 감쪽같이 함께 모습을 감추고 만 것이다.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하거나, 대부분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로가 결정되어 진작부터 공장에 다니고 있든지 아니면 일치감치 나쁜 길로 빠져버린 아이들이 있기는 했었다. 탁구장 주변에서 아이들이 한꺼번에 사라지고 나자 그녀도 덩달아 땅아래로 쑥 꺼지고 만 듯 모습을 영영 감추고 말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이후로도 내가 탁구장을 계속 드나든 것은 그녀의 소식이 궁금한 탓도 있었지만, 혹시라도 길을 오가다 그녀를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속내 때문이었을는지 모른다.

그녀는 그날 왜 자신이 놀던 공터에서 나를 쫓아내려는 듯 매몰찬 말을 했던 것일까요?
자신이 보기에도 싹수가 노란 아이들 틈에서, 그녀는 무엇 때문에 거친 들판에 홀로 피어있는 한 떨기 야생화처럼  자신의 존재감을 오롯이 드러내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녀를  다시 만난 것은 그녀가 고등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동네 골목길 어귀에서였다. 나도 모르게, "누나 오랜만이네요.", 라는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지난날,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부르지조차 못했던 말이, 노도(怒濤)와 같이 흘러간 사춘기의 변곡점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를 사람이기에 마치 훈장처럼 불러칭호였을는 지도 모른다. 어쨌든 내 젊음이 거친 탁류(濁流) 속으로 흘러들지 못하도록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목덜미를 낚아채어준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은 분명하니까. 사실, 그녀는 나에게 몰래 말해주었듯, 자신의 평소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고자 대구교대에 지원을 다고 한다. 물어보진 많았지만, 그녀가 탁구장에서 갑자기 모습을 감춘 이유가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줄곧 담배를 피우고 있는지도.


그 후로, 그녀의 이름을 여전히 잊지 않고 있을 때 고등학교 친구 부인으로부터 그녀의 소식을 들은 적이 있었다.  대구의 한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하고 있는데, 여전히 미혼으로 주위에 알고 지내는 선생님들이 많다고 다. 그녀의 성격으로 미루어, 엄할 때는 엄하지만 속정이 많은 다정한 선생님으로 학생들의 신뢰를 듬뿍 얻고 있을 게 분명했다. 아니, 이젠 세월이 흘러 그녀도 정년을 맞았을 테니, 존경스러운 선생님으로 학생들 뇌리 속에서 기억되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애써 떠올려보니 그녀와 둘이서 탁구를 딱 한 번 친 기억이 납니다. 단발의 생머리를 찰랑이면서 강하게 스매싱을 하고 돌아서는 그녀의 앙다문 입술과, 득점을 하고 난 자신감으로 왼 주먹을 꼭 쥐며 파이팅을 외치는 그녀의 짤랑거리는 목소리가 길고 긴 여운으로 남아 아직까지 내 귓전을 맴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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