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이야기입니다.
겨울방학을 이용해서 그동안 벼르고 별러왔던 동남아 골프여행을 떠났습니다. 방학 중에도 어김없이 보충수업을 하게 되어, 다른 선생님들에게 과한 부담을 주면서까지 혼자 몸을 빼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므로, 그간 여러 차례 해외로 여행 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을 삭이면서 포기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마침 올 해는 담임을 맡지 않고 3학년 영어수업만 담당했었기에, 모임을 같이해 온 지인들과 어울려 태국 파타야로 5박 6일간의 여행을 떠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각설하고, 지금 이야기는 여행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전날 저녁 늦은 시간에 방콕을 떠나, 그다음 날 이른 새벽 김해공항에 도착해서 포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면서 겪은 일입니다. 당시, 거칠게 급히 메모해 두었던 글을 찾아 정리하면서, 그날의 심정으로 되돌아가서 글을 씁니다.
《 버스 안에서 》
이른 새벽,
김해공항에서
포항 가는 버스를 타다
우리 일행은 다섯,
젖먹이 손주를 품에 안은
할머니와
총각 한 사람 홀로 서 있고
연인인 듯 마주 안은 커플,
동남아인 엄마와
아빠를 더 닮았을 어린 딸
두 모녀를 마지막으로
서둘러 탄 버스 속
저마다 자리를 잡는다
수금이 시작되자
나이 지긋한 검표원,
안경 너머로 눈알 굴리며
사잇통로를 오간다
경주 칠천 오백 원
포항 만천 원,
사람 따라 수금 끝나고
맨 뒷자리에 달랑 남은 모녀,
건네받은 돈 눈대중하더니
수금원이 묻는다
"얼라는 몇 살인교?"
"따섯살요"
아이 말, 서둘러 끊으려
엄마가 얼른 말한다
마뜩지 않은 눈으로
아래위를 훑고 돌아서는
수금원 목덜미로
느닷없이 꽂히는 말
"아니야, 엄마!
난 일곱 살,
왜 다섯 살이라 말해?"
딸아이 눈망울에
그렁그렁 눈물 그득하고,
놀란 애 엄만 헛기침 섞어
재차 다짐을 한다
"아냐! 넌 따섯살이야,
따섯살!"
금세 힘 풀린 목소리로
슬픈 웃음, 눈물처럼 번진다
이를 어쩌려나!
딸 아인 두 살 작아진
제 나이 싫었던 거다
나이 일곱,
세상 알기엔 모자라지만,
까닭 없이 작아진
제 나이 싫어
그만 울음보 터지고 만 것이다
"얼른 가서 반표 끊어 오소!"
"손님 차면 내 무릎 위에
안출끼라예!"
딸 나이 대신 숨기고만
오천 오백 원,
부끄럼으로 버티기에
버겁지 않을 부피의 돈
어색한 분위기,
버스 속을 휘돌자
이곳저곳 흩어지는
헛기침 소리
"얼라 반표,
얼른 끊어 오소!"
앞뒤 어른들, 울음보 터진
아이 달래려 말을 건넨다
"아가야, 괜찮아
그러니 울지 마라"
속상한 심정
위로해 주려는 뜻임을
애 엄만 알기나 할까?
검표원 내려가자
표정 없이 다가온 운전사
거듭 묻는다
"얼라, 진짜 몇 살인교?"
"왜요? 일꼽살요!
내 무릎 위에 안꼬 갈 거라예!"
"안되니더, 돈 얼른 주소!
반표 끊어 올 거니까"
원망스러운 엄마 눈길이
아이에게 머물자
다른 손님들, 할 말을 잃었다
어찌할 거나, 이런 게 세상인걸!
그래, 모녀는 모처럼
고향을 다녀왔던 거다
넉넉지 못한 친정 살림,
오천 오백 원이면
고향 땅 피붙이 몇 끼라도
배불리 먹일 돈,
이놈의 삿된 돈에
그만 빈정이 상한고 만 거다
이리저리 뒤척이다
끝내 잠 못 이룬
포항행 버스 안 풍경
(2015. 1.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