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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진 Mar 12. 2023

어쩌다가

비움에 잠시 익숙해졌던 몸이 최근에 급속히 다시 채워지고 있다. 체중 이야기이다. 근 한 달의 입원 기간 중에 10kg 가까이 빠졌던 몸무게가 회복기를 거쳐 몸이 정상상태에 이르자 무섭게 다시 불어나더니 80kg를 훌쩍 넘어섰다. 지금부턴 폐렴이 문제가 아니라, 이전처럼 다시 불어난 체중에서 기인하게 될 심혈관계 질환이나 예측 못할 성인병과 다시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줄어든 체중을 유지하기 위해 소식(小食)이나 다이어트를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약화된 체력을 보충하고 소실(消失)된 근육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한동안 필요 이상의 영양 보충과 고단백질 식단이 불가피했었다. 그랬더니, 퇴원한 지 겨우 3개월 만에 체중이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다시피 한 것이다. 다만 믿는 구석이 없진 않았는데, 그건 이 시기에 집안에서 스트레칭과 아령 운동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우선 서재에 매트부터 깐다. 양손에 두 개씩, 2.5kg의 아령을 들고 발뒤꿈치 들기 100개를 하고 나서, 양팔 수평으로 벌려서 들기, 위로 들기, 가슴에 모았다가 펴기, 뒤로 들었다가 앞으로 펴기를 각 60회 하고 난 뒤, 어깨로 모아 들기 100회로 오전 아령 운동을 끝낸다.


그다음은 의자에 앉아 탄력 밴드를 종아리와 허벅지에 끼우고, 각 50회씩 다리 벌리기를 한다. 마무리는 매트 위에 누워서 스트레칭을 하는데 역브리지 자세로 버티기 1분, 그 자세로 엉덩이 올렸다 내리기 60회, 모로 누워 한 다리 들기 각 30회, 탄력 밴드를 종아리와 허벅지에 다시 끼우고 다리 벌리기를 각 60회를 하고 나서, 누운 채 위로 다리 기 1분, 무릎 모아 좌우 굴리기 60회와 마무리 운동으로 플랭크 자세로 1분 이상 버티는 것으로 오전 운동을 마무리한다.


몸무게를 재는 시간은 보통 11시 경이다. 샤워를 마치고 신발장의 전신 거울에 몸을 내밀앞면과 측면의 실루엣을 살핀다. 양쪽 가슴살이 확연하게 줄어 손 한 줌의 근육으로 도드라져 있고, 옆구리살은 양쪽 비게살이 모두 빠져 아랫배만 볼록한 올챙이배다. 뒤룩뒤룩해 보이던 배둘레살이 웬만큼 정리되어, 이젠 목욕탕에서도 발가벗은 몸이 남사스러울 것 같지 않다. 체중계에 몸을 얹으니 앞자리 수가 7로 시작되어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아령을 들고 발뒤꿈치를 다시 든 채로 종아리살을 만져보니 종아리와 정강이 옆으로 잡히는 살이 돌덩이처럼 딱딱했다. 이제, 기침만 좀 잦아들고 목에 가래만 생기지 않는다면 몸상태가 예전 못지않아지리라 확신하면서, 오늘 마지막 숙제를 하려고 집밖으로 나섰다.


걷기보다는 야트막한 산이라도 오르는 게 살 빼기에는 훨씬 효과적이라는 것을 지난 며칠간 환호공원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오늘은 종아리 근육이 조금 당겨서 이전처럼 바닷길이나 걸을까 망설이다가 공원 능선으로 이어진 계단 입구에 이르러 마음을 고쳐 먹었다. 주말이 시작되는 날이니 능선이 이어지는 곳에 있는 스페이스워크가 몹시 궁금했다. 벌써부터 공원 공영주차장은 빈자리 하나 없을 만큼 만차(滿車)였기 때문이었다.


호젓하리라 생각했던 오솔길을 따라 걷는데, 풀물이 가지 끝으로 움트고 있는 나무들 사이를 뚫고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소리와 뒤섞여 들리는 확성기 소리로 마음이 어지러웠다. 멀리 영일대 앞 광장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산사태를 방지할 목적으로 비탈을 평탄하게 절개(切開)해서 평지로 만든 언덕 위를 오르니, 바다 쪽 하늘 높은 곳에서는 참수리 한 마리가 양 날개를 아래위로 휘적여 허공을 근근이 버티면서 세찬 바람에도 아랑곳없이 제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그런데, 어쩌다가 무리에서 이탈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참수리는 근 한 달 여 전부터 이곳을 머물고 있다.


스페이스워크 주변은 이미 짐작했었듯 인산인해였다. 사람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웠고, 표정은 제각기 차려입은 옷 색상만큼이나 화사하고 밝았다. 대기열은 스페이스워크로 올라가는 비탈길 아래쪽부터 이어져있었지만, 미리 조바심을 내거나 이를 크게 성가셔하는 눈치는 아닌 것이 사람들 표정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었다. 바야흐로, 저마다 화려한 봄나들이가 시작된 것이다.


공원을 벗어나 영일대로 향하는 바닷길에 이르니 오가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졌고, 에코음 섞인 확성기 소리가 바닷바람 속에 갈피를 못 잡고 흩날렸다. 멀찌감치, 사람들이 무리 지어 있는 곳 주변으로는 검붉은 글씨의 갖가지 플래카드 걸려 있고, 이를 경계로 해서 안쪽은 시위를 하는 사람, 바깥쪽은 구경꾼이나 산책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광장 사이에는 경찰들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인의 장막을 치고 있었는데, 바로 건너편 쪽으로 우선 눈에 띄는 것이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는 태극기 물결이었다. 사람들이 발을 딛고 선 아래쪽 공간은 물리적 경계가 분명하게 나뉘어 있었지만, 바로 위 허공에서는 양 진영의 날 선 확성기 소리가 서로 세차게 부딪치면서 열띤 공방(攻防)을 벌이고 있었다.


말로만 들었던, 아니 방송으로만 보아왔던 광화문 시위가 영일대 광장으로 그대로 옮겨와 사람들 눈앞에서 실시간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지방 사람들에겐 다소 낯설긴 하겠지만, 우리나라의 민주주의가 이미 어느 정도 완숙의 단계에 접어들어 있다는 증표이니  이를 두고 왈가왈부할 마음은 없다. 하지만,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진 것은, 타고 있던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시위 구경을 하고 있는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서 거친 말로 상대 진영을 욕하고 있는 사람들을 목격하고나서부터였다. 이는 양쪽 진영 모두가 마찬가지였는데, 상대 진영을 향해 저주에 가까운 말을 쏟아붓는 어른들 말을 귓등으로 들으며 실실 웃고 있는 아이들을 보자니 나도  모르게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쩌다가 나라꼴이 이 모양이 되었는지. 아직 솜털도 가시지 않은 아이들을 두고, 정치적 판단을 강매(强賣)하듯 강요하는 어른들의 낯부끄러운 작태(作態)가 정말 보기에도 민망하면서 마음에 심히 거슬렸다.


영일대 누각(樓閣)에 올라 아래를 살펴보니 정말이지 이보다 더한 갈등과 분단이 없었다. 양쪽으로 나뉜 공간에는 완충(緩衝)이나 양보, 타협과 같은 중도적 가치를 가진 말이 자리할 여지는 아예 없는 듯 보였다. 건전한 시민교육을 함양(涵養)하고 올바른 정치적 식견을 갖출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제대로 된 학교 교육이 뒷받침되어야 함이 절실하게 피부에 와닿는 순간이었다.


돌아서 가는 길을 왔던 길 그대로 택해서 갈 때까지 마음이 줄곧 불편했다. 진정한 교육자라면 학생들 앞에서는, 정말이지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것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만큼 정치란 민감한 것이 사실이고. 하지만 어느 쪽이든,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을 만큼 진정으로 국민의 편에서 국민의 눈물을 닦아줄 세력이 과연 존재하긴 했던 것인가. 어쩌다가 나라가 요 모양 이 꼴로 수렁 속 깊은 곳으로 빠져들고 있는가. 바다 쪽 높은 허공을 맴돌던 참수리는 네댓 마리 까마귀 떼가 모습을 드러내자 그 위세에 질린 듯 잠시 머뭇거리더니 숲 속 깊은 곳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산비탈을 내려와 공원 안쪽 평지를 걸을 땐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지만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아마 집을 나설 때보다는 체중이 족히 1kg은 빠졌으리라. 우리나라 정치도 이랬으면 좋겠다. 비우고자 한다며 비울 수 있고, 채우고자 한다면 실속 있게 채울 수 있는. 그래서, 아이들의 맑은 눈에도 희망이 보이고 미래가 보이는 그런 나라가 되었으면 정말 좋겠다.


생각 없이 어쩌다가 바라본 세상은, 짙은 암울(暗鬱) 속에서도 봄날을 맞아 화사하게 깨어나고 있다.


절개지 위에서 바라본 영일만 풍경
허공을 자유롭게 맴돌고 있는 참수리
스페이스워크로 이어지는 오솔길
환호공원 전망대 쉼터, 앞쪽에 스페이스워크가 보인다
스페이스워크 앞 풍경
스페이스워크 입장을 기다리는 대기줄
봄을 맞은 스페이스워크
야당을 지지하는 시위대
여당을 지지하는 시위대
여와 야, 양 진영으로 분단된 시위대
다시 되돌아 가서 본 스페이스워크. 사진 삼매경에 빠져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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