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동기 야유회는 경주 양남면 읍천리에서 1박 2일의 일정으로 열리는데, 대구 동기들을 중심으로 서울과 부산, 포항과 울산에서도 여러 명의 친구들이 참석할 거라고 알려왔다. 경향(京鄕) 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오후 네시에 민박을 할 '선희네 횟집'으로 모두 집결을 하면, 숙소 가까운 곳에 있는 양남 주상절리군까지 바닷길을 걸어 돌아오는 한 시간 거리의 떼거리 산책이 예정되어 있다.
전날, 뜻하지 않은 동기의 부고로 어수선해진 심정에다, 이른 새벽부터 심한 비바람이 몰아쳐 꼬박 밤을 새우다시피 했지만, 11시로 예정된 포항에서의 출발시간을 일부러 늦출 마음은 없었다. 지난해 늦가을, 나왕대와 주사암, 목월 생가를 함께 둘러보았던 이 실장과, 이번에는 원원사지와 장항리 절터를 모임에 앞서 탐방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RIST에서 정년을 한 이 실장은 우리나라 역사와 유서 깊은 사적지에 관한 한 문화해설사에 버금가는 소양을 갖추고 있지만, 율곡 이이의 직계 후손이기도 하다. 지난가을 이 실장과 함께 한 경주 탐방이 너무나도 인상적이었기에, 숙소로 가는 길에 경유할 원원사지와 장항리 절터, 그리고 이 둘을 폭넓게 아우를 친구의 정감 있는 해설을 진작부터 기대하고 있었다.
경주 원원사지 동, 서 석탑은 동일한 구조와 양식으로 축조된 2중 기단의 삼층석탑이다. 원원사지는 외동읍 모화리의 외딴곳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절터로, 현재는 금당이 있던 자리와 두 기의 삼층 석탑, 석등, 네 기의 부도만이 남아 있고, 사적지의 정식 명칭은 사적 제46호 ‘경주 원원사지’이다.
원원사는 천왕문은 따로 없지만, 비바람이 심하게 몰아치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석조 사천왕이 산사의 입구를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밀교 계통의 대한불교진각종에서 설립한 심인고등학교를 모교로 두고 있어서인지, 신라의 승려 명랑(明朗)이 전했다고 알려진 밀교의식 '문두루비법(文豆婁秘法)'이 처음 들어본 말임에도 그리 낯설지만 않은 것이 되려 신기했다.
문무왕 때 당나라가 신라를 침략하자 이를 물리칠 비방으로, 명랑이 낭산 남쪽에다 사천왕사를 짓고 도량을 열 것을 건의하였는데, 시간이 급박하였으므로 채백(彩帛)으로 가건물을 짓고 5방(五方)에다 신상을 세운 뒤 유가명승(瑜伽明僧) 12인과 함께 문두루비법을 썼다고 한다. 그런데, 당나라군과 신라군이 아직 접전하기도 전에 바람과 물결이 사납게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바닷물에 침몰하였다 전해진다. '문두루'는 범어(梵語) '무드라(mudra)'의 음사(音寫)로 신인(神印)으로 번역이 되는 말이다. 명랑에 의해서 처음으로 신라에 전해진 이 비법은 불단(佛壇)을 설치하고 불경을 독송하면 국가적인 재난을 물리치고 나라를 수호하여 사회를 편안하게 할 수 있다고 한다.
빗물이 고인 절간의 마당에 서니 원원사의 대웅전 격인 천불보전으로 오르는 돌계단이 있고, 그 왼쪽으로 방하착(放下着)'이라는 세 글자를 음각으로 선명하게 새겨놓은 표지석이 서 있다. 방하착은 '손을 내려 밑에 둔다'는 뜻인데, 흔히 내려놓아라, 놓아 버려라라는 의미로 불교의 선종에서 화두로 삼고 있는 말이다. 마침, 산문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더욱 거세진 비바람에 정신줄마저 놓을 지경이었으니,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마음 한 곳을 비우기는 했나 보다. 무엇보다도, 인적이 끊어진 산사의 고즈넉함이 마음에 들었다. 전각의 구성이 천불보전과 종각, 그리고 단출하게 요사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어, 우선 보기에도 소담스러운 것이 탐욕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마침, 비바람을 피해 절간으로 숨어든 길냥이 한 마리가 멀뚱한 눈으로 방하착 표지석을 훑어보며 돌계단을 오르고 있었는데, 집착을 버린 산중의 고승처럼 이 빗속을 요량도 없이 유유자적이었다.
유적 제45인 장항리 사지(寺址)를 들리기 전에 토함산 아래 순두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경주 장항리 석탑이 서 있는 폐사지(廢寺址)에 관해서는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지금은 절터가 자리 잡은 구역의 이름을 따서 장항리 사지라고 부르고 있다. 이 외딴 절터에는 국보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는 서 오 층 석탑과 동탑, 석조불대좌 등의 유구(遺構)가 남아 있는데, 비바람이 약간 잦아들긴 했어도, 멀리 보이는 장항리 사지 쪽으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계곡을 따라 내려오는 개울물을 건너야 했다. 그런데 날씨가 조금 을씨년스럽기는 하나, 목조다리가 놓인 천변(川邊)을 따라 심어놓은 오동나무의 연보랏빛 꽃이 만개(滿開)하여 비 오는 봄날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었다.
가까이서 본 장항리 사지는 금당터를 중심으로 동탑과 서탑이 나란히 서 있는데, 도굴범이 도괴(盜壞)한 것을 서탑부터 우선 복원해 놓았다고 한다. 동탑은 1층 탑신(塔身)과 5층까지의 지붕돌만 남아있으나, 서탑은 비교적 원형으로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서탑은 2단의 기단(基壇)을 비교적 넓게 만들어 위에다 5층의 탑신을 얹고도 안정감이 있으며, 1층 몸돌에는 면마다 권각(拳脚)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한 쌍의 인왕상(仁王像)을 각각 부조(浮彫)해 놓았다. 그런데 이 실장의 말을 빌자면, 동탑 바로옆의 팔각형 부도의 몸돌에 새겨진 사자의 형상이 오히려 더 사실적이고 익살맞아 보였다. 석조물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양각(陽刻)으로 부조한 사자상의 조밀한 새김질 어느 하나라도 인상적이지 않은 것이 없었고, 나머지 다른 일곱 면의 부조물은 일부 훼손되어 있거나 아예 망가져 있어 이를 둘러보는 내내 속이 상했다.
장항리 사지를 돌아서 나올 때, 사방을 에워싼 산봉우리부터 물안개로 흐려지더니, 이내 개울 아래 물아지랑이와 함께 어우러진 풍경이 한 폭의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畫)를 보는 듯했다. 이제, 장항리 계곡을 넘어 산길을 따라 곧장 달리면 양남으로 내려가는 해안도로로 이어질 것이다. 아직, 네시가 되기에는 시간이 넉넉하긴 했지만 멀리서 오는 옛 친구를 기다리는데 소요되는 그 정도의 기다림은, 까마득히 먼 지난날 멀리서 면회올 여자친구를 손꼽아 기다리던 젊은 날의 분홍빛 설렘에 못지않을 터이다.
처음 모임에 오기로 약속했던 사람들 가운데 열명 가까운 친구들이 오질 못했다. 저마다 말 못 할 사정이 있겠지만, 참석 예정자 가운데 꼭 만나야 할 친구가 몇몇 보이지 않는 게 몹시 서운했다. 오후 늦게까지 비가 그칠 기미조차 없었기에, 주상절리까지의 산책은 날이 개일 것으로 예상되는 내일 새벽으로 미루기로 했다. 서울서 출발한 친구들의 도착이 다소 늦을 것 같았지만, 1층 식당으로 우선 모이고 나니 마치 쉬는 시간, 떠들썩한 교실 안 풍경 같았다.
첫날의 만찬은, 동해안에서 갓 건져 올린 신선한 횟거리와 해물탕, 그리고 다양한 어패류였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전날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한 묵념이 있었고, 잠시 고인과 맺었던 여러 인연에 대한 회고가 잇따랐다. 그리고 다음부터는, 그간 소원했던 친구들끼리 서로 어울려 지난 학창 시절을 떠올리며 술잔을 기울였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것이 세상인심이라면, 마찬가지로 변치 않은 것이 바로 지난날 친구들의 성정(性情)일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저마다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조금씩 파여 있어도, 그리고 살아온 곳에 따라 말투도 약간씩 달라져 있긴 했지만 몇 마디 말을 섞고 나니 금방 욕투성이, 경상도 보리 문디로 돌아와 있었다.
늦게 도착한 서울 친구들까지 모두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읍천리 노래방으로 바로 자리를 옮겼다. 한적한 어촌마을이라긴 하지만 월성원자력발전소가 지척이어서 오색 깜빡이 불을 켠 노래방들이 이 골목 저 골목에서 열심히 손님들을 호객하고 있었다. 준비해 온 백화점 상품권을 걸고 스무 명 가까이 되는 친구들이 100점 도전에 나섰으나, 노래 못 부르는 나를 포함해서 99점을 맞은 사람 두엇 말고는 끝내 100점짜리 가왕(歌王)을 영접(迎接)하지 못하고 말았다. 숙소로 돌아와, 미처 못다 나눈 이야기와 여흥을 잠시 더 즐긴 후에 대부분의 친구들이 잠자리에 든 것은 자정을 훌쩍 넘긴 밤늦은 시간이었다.
다음날 아침, 동녘 하늘은 여전히 옅은 구름에 가려있었지만 해돋이의 기운이 슬며시 기세를 더하자 먼바다부터 서서히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친구들은 주상절리로 이미 산책을 떠나고 난 뒤였다. 아침 식사로 준비한 음식은 인근 바다에서 해루질한 자연산 전복죽과 매운탕이었다. 전날의 과음을 일거에 해소해 줄 만큼 전복죽은 풍미가 걸쭉하고 구수했으며 고춧가루를 듬뿍 풀어 끓인 매운탕은 얼큰하면서도 시원했다. 술을 꽤 마시긴 했지만, 속이 불편해서 아침을 거르는 친구들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나이 되도록 모두들 건강관리만큼은 제대로 해 온 듯했다.
조문(弔問)을 가야 할 친구들이 서울로 먼저 떠나고 나서, 대구에서 대절해 온 관광버스와 선희네 횟집을 배경 삼아 단체사진을 찍고 난 후, 오는 5월 18일 모교 교정에서 열리는 총동문회체육대회에서 다시 모일 것을 기약했다. 모임에 참석하기에 앞서 미리 울진 여행계획을 세우고 온 곽 총장만 따로 남아 우리와 함께 포항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모두들 자신이 왔던 곳으로 뿔뿔이 흩어지긴 했지만, 마냥 헤어지기에는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아 있을, 이른 아침 읍천리 풍경이었다.
곽 총장은 서울대 사회학과 출신으로, 고등학교 동문인 유시민의 한 해 직계 후배이다. 대학시절 운동권 학생으로 수형생활의 고초까지 겪기도 했지만, 김대중 참여정부 시절에는 제도개선 비서관으로 청와대에서 봉직(奉職)한 이력도 있다. 얼마 전까지 대한한의사협회 사무총장으로 일을 했지만, 지금은 잠시 자리를 물러나, 동기회 모임까지 참석할 만큼 노년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이기도 한 곽 총장은, 몇 해의 시차를 두고 포항을 방문해서 함께 양동마을과 영덕 해파랑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오후 1시 반에 포항역사에서 울진으로 출발하는 동해선 기차를 타기로 되어 있어서, 그 사이 남는 시간을 활용해 골굴사와 오어사를 둘러보기로 뜻을 모았다. 곽 총장은 마음 내키면 옷가지나 하나 달랑 챙겨 집을 나설 만큼, 전국 방방곡곡으로 홀로 떠나는 나들이가 잦다. 그런데, 이번에는 친구들 모임에 참석하는 길에 말로만 전해 듣던 골굴사와 이름조차 생소한 오어사까지 덤으로 방문하게 되었으니 신이 나도 단단히 난 모양이었다.
골굴사는 그 이름이 특이한 것처럼, 유래나 가진 역사도 특별나다. 이 사찰은 1,500여 년 전 인도의 광유스님 일행이 경주 함월산 인근에 인도의 사원을 본떠서 석굴로 조성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석굴사원이기도 하다. 조선 중기의 화가 겸재 정선이 남긴 그림으로 볼 때 골굴사는 여러 석굴들 앞에 목조 전실을 만들고 여기에 기와를 얹은 형태일 것으로 추정되지만, 화재로 인해 소실(燒失)된 상태로 오래도록 방치되어 있다가 지금으로부터 불과 70여 년 전 다시 사찰로 복원되었다. 한동안 개인 소유의 사찰로 명맥만 이어오던 중, 1989년,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 스님이 매입을 해서 지금은 불국사의 말사로 등록(末寺)되어 있다고 한다.
보물 제581호인 마애여래좌상이 주불(主佛)로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조성되어 있으며, 이를 중심으로 관음굴과 지장굴, 칠성단, 산신당 등 여러 굴법당과 함께 남근바위와 여궁 등 민간 무속신앙의 흔적까지 엿볼 수 있어 우리나라 석굴사찰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좁다란 암도(岩道)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듣는 사찰의 유래에 귀가 솔깃하면서도, 간간이 불어오는 청량(淸凉)한 바람과 앞이 탁 트인 산세의 아름다움에 잠시동안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쯤 해서, 한 마디씩 추임새를 넣던 곽 총장의 말이 귀에 쏙 걸려들었다.
곽 총장은 홀로 다니는 여행을 즐겨긴 하지만 함께 떠나는 나들이 모임도 있는데, 그 구성원들은 학창 시절 운동권으로, 주로 전라도 출신의 관료들이 많다고 한다. 요즘 들어선 함께 어울려 경상도로 종종 여행을 다니기도 하는데,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이쪽 지역의 요철(凹凸) 많고 굴곡진 지형에 푹 빠졌다고 했다. 호남의 곡창지대는 대부분 평야이고 서쪽 해안선을 따라서 한참을 가더라도 달리 이름 붙일 만한 야트막한 산지조차 없으니 이루 말 다했지 않은가. 이들의 심사(心思)에 한편으론 공감이 가면서도, 기회가 닿는다면 동해안으로의 여행을 함께 하며 기꺼이 교분이라도 나누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무려면, 이쪽이든 저쪽이든 서로 정을 나누며 함께 먹는 떡이 당연히 크고 맛있지 않겠는가!
산사로 들어서는 산문(山門) 주변의 여러 조형물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골굴사에는 불가의 전통 수행법인 선무도의 수련원이 개설되어 있어, 내국인은 물론 수많은 외국인들이 즐겨 찾는 불교무예의 도량으로 자리 잡고 있다. 골굴사가 불교 고유 무술인 선무도가 전승되는 도량이 되기까지에는 감은사와 문무대왕 수중릉은 물론이고, 경주 일원의 이름 모를 사찰이나 석탑에 깃든 호국의 간절한 염원이 선무도의 고유한 유술(柔術)로 발현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는 기림사까지 둘러보려 했으나, 그쪽으로 오가는 시간이 빠듯해서 역사로 가는 길에 있는 오천의 오어사만 구경하고 그 인근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마음속으로는, 전라도 친구들이 앞으로 먹게 될 떡이 라면 이곳 오어사도 틀림없이 그중 맛난 떡일 될 것이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설핏 웃음이 났다. 아침이 되어 날이 활짝 개어서인지 경내를 오가는 사람들이 표정이 밝았다.
오어사는 신라의 고승(高僧) 원효대사와 혜공선사가 남긴 설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두 스님은 이곳에서 수도를 하며 법력을 겨루곤 했는데, 그중 하나가 냇가의 고기를 누가 되살릴 수 있는지였다. 원효대사가 물고기를 살렸지만 혜공선사는 되살리지 못했다. 하지만 되살아난 물고기를 두고 서로 자신이 살린 물고기라고 다투니, 그 와중에 '나 오(吾)'와 '고기 어(魚)'를 합쳐서 오어사라는 사찰 이름이 탄생했다는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몇 해 전, 태풍 힌남노가 동해안을 덮쳤을 때는, 운제산 아래로 일시에 흘러내린 계류가 오어지의 방둑을 무너뜨렸다. 산아래의 냉천이 범람하여 인근 아파트의 지하주차장이 침수되어 애꿎은 희생자가 속출하였고, 급기야 포스코까지 물에 잠기는 막대한 홍수 피해가 발생하고 말았다. 지금은 대부분 복구가 되어 오어사 일대가 다시 평온을 되찾았지만, 급류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만 건물 하나는 멈춰 선 자리에 새로 준공이 되어 이 지역 명소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경내를 두루 둘러보고 있는데, 마침 고려 동종이 전시되어 있는 전각의 문이 열려 있었다. 곧 국보로 지정될 예정인 동종의 유리상자 보수를 위해 한시적으로 관람이 폐쇄되어 있었지만, 상자마저 들어낸 동종의 실물을, 그것도 비천상의 섬세한 문양을 바로 눈앞에서 근접 촬영할 수 있었던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오어사 산문을 나서면서 행사상품으로 공짜로 나눠준 콩나물 한 봉지를 제각기 손목에다 꿰차고, 이 실장이 단골로 종종 찾는다는 오리불고기 식당에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일치감치 전복죽으로 아침을 먹어서였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시장기가 돌 때쯤 점심으로 먹은 오리불고기 맛이 맛나고도 각별했다. 아직은 12시도 되기 전이니, 지금부터 느긋하게 가도 포항역사까지 도착하기에는 시간이 넉넉했다. 가는 길에 곽 총장은 조만간 다시 한번 이곳을 들리고 싶은 마음을 슬쩍 흘렸다. 구미가 당겨서 흘린 말일 테니, 이참에 전라도 친구들을 앞세워 함께 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냥 속으로 삼키고 말았다. 나눠 먹는 떡이 크고 맛있긴 하더라도, 혼자 먹고 싶을 때도 왕왕 일을 터이니 말이다.
지난 1박 2일의 여정은 일정이 드라마틱하고 다채로웠다. 빗속을 뚫고 유적지 탐방을 했으며, 옛 친구들을 만나 맛있는 음식을 먹고 음주가무를 즐겼다. 새로운 여행지에 대한 여지를 엿보았고, 기회가 닿으면 동참해 싶은 생각도 있다.
때맞춰, 대선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정치인들이 험한 말로 이쪽저쪽을 양갈래로 찢어놓고는 모두가 나 몰라라 한다. 서로 나누어 먹어야 할 이 땅은 넓고도 많은데, 이들은 오로지 외눈박이가 될 것을 강요하고 있다. 내 그릇도 커지고 상대방의 그릇도 커지게 하는 지혜로움을 갖춘 후보자는 없는 것일까? 먹어보면 내 그릇 속의 음식만큼 달디 단 음식물이 저쪽 그릇에도 분명 많이 있을 텐데. 다가 올 6월에는 남도의 아름다운 풍광을 찾아 바람처럼 홀연히 이곳을 떠나고 싶다. 나눠 먹을 떡이 풍요로운 그곳을 찾아서!
친구여 by. 조용필
https://youtu.be/Bk-3kGQgApQ?si=T8Z0W5UT--hAoQQ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