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독감 치료차 시내에 있는 병원까지 운전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마을 언덕배기에 있는 우리 집은 큰 눈이 오면 차 빼기가 쉽지 않다. 그것을 경험으로 알게 된 남편은 대설 특보 안내문자가 뜨자 곧 자동차를 마을 공터에 이동주차 해뒀다.
예보한 대로 밤새 눈이 엄청 내렸다. 데크마루에 쌓인 눈높이를 가늠해 보니 10cm는 족히 넘어 보였다.
간밤에 차 빼놓기를 잘했다.
자동차에 수북하게 쌓인 눈을 대강 쓸어내고 도로를 따라 서서히 달리는데 며칠 전만 해도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던가로수 나목들이하얀 눈꽃으로 몸을 가린아름다운 모습이다. 저것들을 도로변이 아닌 한적한 숲속에서 만났으면 정말 황홀했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펄펄 날리는 함박눈이 바람에게 쫓겨 자꾸만 우리 자동차에 곤두박질친다.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도 눈발속에온통 하얗고, 가까이 있는 이정표도 설핏 눈옷을 입었다. 그림 같은 설국이다.
병원 갈 일 아니었으면 이 아름다운 장면을 놓쳤겠구나 하는 생각에 그만 독감에게 너그러워질 뻔했다.
진료 마치고 집에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눈은 내리고 있었다.
남편은 엊그제 사온 대홍포차를 따뜻하게 내려준다.
독한 약때문에 미각을 잃은 나는 귀한 차 맛은 느끼지 못하면서도 툭트인 거실창으로 내다보이는 바깥풍경에는 "음~~ 좋다." 할 정도로순한 마음이 들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눈이 오는 대로, 햇살이 쨍하면 쨍한 대로 또 먹구름이 덮치면 덮치는 그대로의 자연을 온전히 내주는 우리 집 거실창, 내 집에서 인기순위 1위다. 통창을 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긴 하지만, 세상에 완벽한 것은 없다 생각하면 그럭저럭봐줄 만하다.
차의 온기로 몸이 따뜻해질 때쯤, 바깥풍경을 지켜보던 나는 또 소리하나 밀어낸다. "좋다."
이때도 역시 차맛보다는 눈 내리는 바깥풍경에 홀딱 반한 소리다.
수십 년을 살았던 도심의 아파트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었던 자연의 몸짓, 그것들과 온전히 마주하는 기쁨은절대 식상한 법이 없다.
뭐든 싫증을 잘 낸 사람에게는 어느 한순간도 반복적으로 우려먹은 법 없는 자연이야말로 좋을 벗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제는 햇살이 좋아서 차를 내렸고, 오늘은 눈이 내려서 차를 우렸다면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의 자연이 차를 마시게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