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 손이 부끄러웠던 적이 있다.
40대 후반, 학교에 근무할 때다.
책상 위에 손을 얹고 뭔가를 설명하다가 느닷없이 내 손을 본 것이다. 삐쩍 마르고 손가락 마디가 유독 굵고 거친 손을.
그 손이 창피해서 설명을 끝내자마자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그때 처음으로 워킹맘으로 살면서 함부로 부리기만 했던 내 손에게 참 미안하다는 생각을 했다.
흔한 핸드크림도 챙겨 바르지 않았고, 일의 속도를 내기 위해 고무장갑조차 끼지 않은 손으로 집안일을 하는 일이 허다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싶으면서도 그날 이후로 난 어지간해서는 남 앞에 손을 내밀지 않는다.
2017년, 내 나이 환갑에 모든 것을 내려놓겠다는 마음으로 귀촌을 했다. 마음의 짐은 내려놨지만, 부지런한 성격은 여전해서 내 손놀림은 또다시 바빠졌다.
시골 마당을 가꾸는 일, 텃밭에 이런저런 채소를 심는 일, 또 꽃길을 조성하는 일까지 모두 내 두 손이 감당해 온 것들이다. 지금도 심고, 뽑고, 가꾸고 있으니 내 손은 여전히 쉴 틈이 없다.
이 수많은 일을 해내는 손 중에서 손뼉 쳐주고 싶은 손 하나를 꼽으라면 수백 평의 땅에 손수 잔디를 심고 관리하는 손이다.
남편이 내게 새집과 함께 내민 집터는 1500여 평이었다.
그 안에 대나무숲 200여 평을 빼더라도 내가 관리해야 할 땅은 사실 내 작은 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버거울 정도로 넓다.
처음부터 작정하고 이 커다란 땅에 잔디 심고, 꽃과 나무를 심어서 그림 같은 정원을 만들 욕심을 냈다면, 애초에 짐 싸들고 서울로 다시 돌아갔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그 넓은 땅이 있는 그대로 그냥 좋았다.
햇살이 좋았고, 아침의 새소리며 숨 쉴 때마다 느껴지는 상쾌한 공기, 관리하지 않고 버려지다시피 한 땅의 냄새도 좋았다. 그리고
잡초가 무성한 감나무 밭이며 굴러 다니는 크고 작은 돌까지. 그런 모든 것들이 그저 있는 그대로 좋았다.
그렇다고 마냥 내 손을 놀린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습관대로라면 뭔가를 저질러서 부지런을 떨어야 나다운 일이니까.
가장 먼저, 마당에 잔디를 심기 시작했다.
일 무서워하는 남편은 200만 원에 일꾼을 부리자 했지만, 난 생각이 달랐다. 내 손이 놀고 있고, 또 시간에 쫓길 필요 없는 백수이고, 무엇보다 우린 연금 수급자 아닌가?
그러니 가능하면 돈을 아껴야 한다는 잔소리를 해가며 마당 잔디는 손수 심자는 쪽으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말이 쉽지 사실 잔디를 심어본 적도 없고, 또 심는 사람을 지켜본 적도 없어 걱정만 하고 있을 때, 귀촌 선배가 잔디심기는 식은 죽 먹기라며 대강의 방법을 일러주었다.
"잔디 심고자 하는 곳의 땅을 직선으로 쭈욱 파서, 파 놓은 곳에 잔디를 놓고 흙을 덮어주면 끝이라요."
그런데 무슨 일이든 대충 하는 법 없이 꼼꼼하면서도 정확한 남편은 잔디심을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냥저냥 땅을 파서 심으면 될 걸, 자로 재고 줄을 띄운 다음에서야 땅을 파고, 마당에 그림 그리듯 잔디를 심는 것이다. 성질 급한 나는 보다 못해서 "여보! 잔디가 자라면 삐뚤빼뚤 심으나 반듯하게 심으나 다 똑같을 텐데 대충 심읍시다." 그런 내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당장 보기에 깔끔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고, 난 또 느려진 일 속도에 화가 나서 서로 투닥투닥!
그렇게 며칠에 걸쳐 잔디심기를 끝내고는 "200만 원 벌기 참 쉽지 않네." 하면서 둘은 웃었다.
이것이 전원생활 시작이었다.
그러니까 이때부터 내 손을 땅과 함께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삼사 년 동안 크고 작은 꽃밭 20여 개와 9개의 꽃길을 조성했으며 잡초밭이었던 감나무밭은 온통 잔디밭으로 바뀌었다.
그러는 사이 내 손도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어디 내놓기 창피해졌다. 그래도 어디 아픈 곳 없으니 참 감사한 손이다.
아직도 여전히 잔디밭이나 꽃밭에 있는 풀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손이 먼저 간다. 그럴 때는 일장갑도 끼지 않은 상태라 손에 흙이 범벅이고 또 손톱 속까지 흙이 들어가기 일쑤다. 해서 아무리 깨끗하게 씻는다 해도 가끔은 때가 낀 손톱까지 감수해야 한다. 결국 또 내 손을 감출 수밖에.
이쯤 되면 내가 조심성 없이 마구 부렸는데도 크게 아우성치지 않고, 열심히 도와준 내 손에게 깊이 감사해야 할 판이지만, 감사는커녕 창피하다는 생각으로 그저 감추기에 급급하니 참말로 못된 주인이 아닐 수없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내 손을 귀하게 대접해 주겠다며 일손을 놓아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원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내 손은 계속해서 바쁠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예쁜 손은 요원할 수밖에. 다만, 내 망가진 일손을 부끄럽게 여길 것이 아니라 우리 집 정원을 아름답게 꾸민 사랑스러운 손이라며 당당하게 내놓을 수는 있어야 할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나를 위해 애써준 내 손에 대한 예의이고 대접일 테니까.